역사/국사-조선

고려멸망 조선건국의 원인 요동정벌과 위화도 회군

올드코난 2015. 12. 8.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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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명 교체기 명나라는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를 두어 만주와 요동을 명의 영토로 삼으로 하는데 이 과정에서 고려 분쟁이 생기기 시작한다. 당시 고려는 1356년(공민왕 5년)에 철령을 넘어 쌍성총관부를 수복하고, 관서 지방(關西地方)과 관북 지방(關北地方) 북쪽으로 영토를 넓혀가고 있었고 고려는 외교적으로 반원친명 정책을 펴고 있었다. 하지만 명나라가 감당하기 어려운 세공(歲貢)을 요구하면서 관계가 틀어지고 1387년(우왕 13년) 명나라가 고려 사신의 입국을 거부하고 1388년 음력 2월 귀국한 설장수(楔長壽)는 '명(明)이 철령(鐵嶺) 이북의 땅을 차지하려 한다'고 전한다. 고려의 요동정벌이 바로 이런 명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요동정벌과 이어진 위화도 회군에 대해 정리해 본다.



고려멸망 조선건국의 원인 요동 정벌(遼東 征伐)과 위화도 회군(威化島 回軍)


1.배경

공민왕의 뒤를 이은 우왕 시기 고려는 극심한 혼란기였다.

우왕 즉위초 대외적으로는 북쪽에서 홍건적, 남쪽에서 왜구가 고려를 유린하고 북원 건재한 상황이었고 대내적으로는 신진사대부와 구 정치세력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정도전과 조준 등 신진사대부들은 이성계와 손을 잡았는데 최영은 귀족 세력을 대표한다기 보다는 보수적인 개혁주의자로 보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요동정벌은 당시 최영이 이성계를 제거하기 위한 목적도 있는 것이다.


2.요동정벌 계획

1388년(우왕 14년) 음력 3월 명나라가 철령위 설치에 착수했다는 보고를 받은 고려 우왕은 8도의 정예 병사 징발을 명령하고 요동 공격 준비를 본격화하는데 고려 조정은 신흥세력인 명나라와의 외교적 타협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을 주장하는 주화파(主和派)와 명나라의 지나친 요구에 반감을 품고 북원과 손을 잡고 요동(遼東)을 쳐서 명나라에 본때를 보이는 실력행사를 하자는 주전파(主戰派)로 의견이 갈리는데, 특히 농사철을 앞두고 왜구의 침탈 등으로 어려움을 겪던 백성들의 원성은 매우 컸다. 하지만, 당시 명나라가 고려에 대한 자세를 보면, 요동정벌이 고려에게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명나라는 고려를 속국으로 삼으려 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당시 고려는 여러가지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는 점이다.


3. 요동 출병

우왕과 최영은 반대여론을 억누르고 출병을 강행한다. 당시 고려의 시중(侍中) 최영(崔瑩)은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주전론(主戰論)을 지지하는 우왕과 더불어 평양으로 떠났고, 조민수를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 이성계를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하여 좌우군 3만8,830명 등 5만여 병력(10만명이라는 설도 있음)으로 요동정벌에 나서게 된다. 이때가 1388년 음력 4월 18일로 총사령관인 팔도도통사 최영은 국내에서의 역모를 걱정한 우왕의 고집으로 전선에 나서지 않고 평양에 남게 되는데 이는 큰 실수였다.


4.이성계의 4불가론

요동 출정은 본래 이성계의 본의와 소원은 아니지만 출정군은 5월 24일(음력 4월 18일) 평양을 출발하여 6월 11일(음력 5월 7일)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 진주하였다. 때마침 큰비를 만나 강물이 범람하고 사졸(士卒) 중 환자가 발생하게 되자, 이성계는 군사를 더 이상 진군시키지 않고 좌군 도통사(左軍 都統使) 조민수(曺敏修)와 상의, 요동까지는 많은 강을 건너야 하는데 장마철이라 군량의 운반이 곤란하다는 등 4가지 불가론을 왕께 올리며 회군을 청하였다.

이성계의 4불가론(四不可論)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역할 수 없다. (以小逆大)

둘째. (농번기인) 여름에 출병할 수 없다. (夏月發兵)

셋째. 원정군이 나가면 왜구가 그 빈틈을 노릴 염려가 있다. (擧國遠征, 倭乘其虛)

넷째. 장마철에는 아교가 풀어져 활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역병(전염병)을 앓을 수 있다. (時方暑雨, 弓弩膠解, 大軍疾疫)


5.위화도 회군

평양에 있던 우왕과 팔도 도통사(八道 都統使) 최영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도리어 과섭찰리사 김완을 보내 속히 진군(進軍)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래도 이성계 등은 또 한 번 평양에 사람을 보내어 회군시킬 것을 청하고 허락을 구하였으나 평양에서는 역시 이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일이 이에 이르자 이성계는 마침내 회군의 뜻을 결심하고 드디어 6월 26일(음력 5월 22일) 회군한다.

6.결과

돌연한 회군에 우왕과 최영은 평양에서 송도(松都, 개경)로 급히 귀경하여, 이성계군에 반격하였다. 그러나 최영은 회군 9일 만인 7월 4일(음력 6월 1일)에 개경에 당도한 이성계에게 잡혀 고봉현(高峰縣, 고양)에 귀양 갔다 개경에서 참형되고 우왕은 폐위되고 강화도로 추방됐다. 이후 창양과 공양왕이 차례로 왕이 되고 이 과정에서 신진사대부들은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다. 그리고 1392년 공양왕에게 강제로 선위(임금의 자리를 물려줌)를 요구하여 조선을 개국을 하게 되는 것이다.


7.올드코난 생각

만일 요동정벌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당연히 위화도 회군은 없었고, 고려 멸망과 조선 개국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설령 요동정벌을 감행했더라고 지휘관은 최영이 맡았어야 했다. 당시 고려 최강의 병력을 이성계에게 맡겼다는 것은 큰 오판이었다. 특히, 당시 요동정벌은 허무맹랑한 계획이 아니었다.


당시 명나라는 건국이 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고, 북원이 건재했다. 명나라는 고려와 전쟁을 계속 펼칠 상황이 아니었다. 만일, 최영이 직접 지휘를 했다면 요동 정벌은 절대 불가능한 계획이 아니었던 것이다.

우왕의 소심한이 최영을 평양성에 머무리게 하고, 이성계에게 힘을 실어다 준 것은 우왕 자신은 물론 고려를 망하게 만들었고 좀더 넓게 보면 요동을 되찾을 기회를 놓친 최악의 실수였던 것이다. 


글 작성/편집 올드코난 (Old Co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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