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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국사-조선 56

정유재란 최대 전투, 임진왜란을 사실상 종식시킨 울산성 전투(蔚山城戰鬪)

정유재란 당시 조명 연합군과 왜군은 울산에서 2차례에 걸쳐 큰 전투가 벌어지는데, 2번의 전투 모두 매우 치열하게 벌어진 전투로 비록 조명 연합군이 승리를 하지는 못했지만 정유재란의 판도를 바꾼 전투이며, 임진왜란을 종식시킨 전투로 평가 된다.정유재란 최대 전투, 임진왜란을 사실상 종식시킨 울산성 전투 (蔚山城戰鬪) 1. 전투전 상황조선수군의 명량해전의 승리이후 왜군은 사실상 북진을 포기하고, 조선 3도(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를 점령하겠다는 계획에도 차질을 빗고 왜군의 세력은 남해 지역에 한정되게 된다. 지루한 대치상태에서 조선 조정은 왜군을 확실히 몰아내기로 결정하게 되고, 당시 조선의 도원수 권율과 명나라 부총병 양호는 순천의 고니시 유키나가와 울산의 가토 기요마사 중 누구를 먼저 쳐야 할 지 의..

세계 해전사에 남을 이순신의 승리 명량 해전 (鳴梁海戰)

명량 해전(鳴梁海戰) 또는 명량 대첩(鳴梁大捷)은 1597년(선조 30) 음력 9월 16일(양력 10월 25일)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 12~ 13척이 명량에서 일본 수군 130여 척을 격퇴한 세계 전사에 빛나는 승리를 거둔 해전이었다.정유재란,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이순신의 위대한 승리 명량 해전 (鳴梁海戰)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이순신 장군은 명량해전을 준비하는데, 그 첫 전투였던 어란포 해전(於蘭浦海戰; 1597년 10월 7일(음력 8월 27일))으로 조선 수군의 사기를 높이고, 2번째 전투인 벽파전 해전을 벌이는데. 1. 벽파진 해전벽파진 해전(碧波津海戰)은 1597년 음력 9월 7일 (양력 10월 16일) 벽파진에서 왜군의 소규모 함대를 격파한 소규모 해전 이순신이 삼도수군..

정유재란, 왜군의 북상을 저지한 직산 전투 (稷山 戰鬪) 의의 설명

왜군의 2차 침입인 정유재란은 하삼도를 목표로 했었다. 조선 수군마저 괘멸시킨 왜군은 경상도와 전라도를 유린하고 다음 공략지는 당연히 충청도 지역으로 향하게 된다. 그리고 지금의 충청남도 천안시 근처인 소사벌에서 조명 연합군과 왜군의 전투가 벌어지는데.정유재란, 왜군의 북상을 저지한 직산 전투 (稷山戰鬪: 소사벌 싸움) 의의 설명 1. 전투전 상황정유재란이 시작되자 14만 1500여 명의 일본군은 경상도 일대를 점거하고 북쪽으로 진격하였고 명은 군도 병부 상서 형개를 총사령관으로 하여 재차 원병을 파병하게 된다. 조선은 체찰사 이원익, 도원수 권율의 지휘로 8도에서 군사를 모으고 대비한다.정유재란 초기 일본군이 총공세를 벌이며 남원과 전주가 함락되고 왜군이 한성 방향으로 북상하고 조선 조정은 당황하고 명..

정유재란, 이순신의 복귀와 첫 해전 어란포 해전 의미

원균에 의해 조선의 수군은 전멸하고 만다. 결국 선조는 이순신을 복귀시키는데,정유재란, 이순신의 복귀와 첫 해전 어란포 해전 의미 1.이순신의 복귀1597년 8월 28일(음력 7월 16일)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이끄는 조선 함대가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춘원포로 후퇴, 수군들은 상륙하여 도주하고 판옥선 대부분이 불타거나 왜군에게 노획당해 오사카로 끌려간다.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조선 조정에서는 경림군(慶林君) 김명원(金命元), 병조 판서 이항복(李恒福)의 건의로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 하지만 이순신이 다시 조선 수군을 모아 정비했을 때 함선은 배설의 함대 12척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선조는 이 병력으로 적을 대항키 어렵다 하여 수군을 폐지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이..

정유재란, 전라도 의병들의 장렬히 전사한 구례 석주관 전투

남원성과 전주성이 함락되고 왜군이 침공해 노략질을 당했던 구례 지역에서 전 남원 전투에서 패해 후퇴했던 구례 현감 이원춘이 의병을 일으켜 들고 일어나 석주관에서 9월과 11월(음력)에 걸쳐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다.정유재란, 전라도 의병들의 장렬히 전사한 구례 석주관 전투 1.전투 과정당시 구례는 남원과 전주로 통하는 전략적 요충지이자 교통지였기에 일본군은 다시 구례 지역을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돌려야 했다. 석주관에서의 전투로 구례 현감 이원춘은 전사한다.이후 구례 주민들이 다시 들고 일어나 10월 31일(음력 9월 22일) 구례의 선비 왕득인(王得仁)은 의병 50명을 모아 적을 여러 차례 기습, 공을 세웠으나 결국 전사하고 말았다.구례가 함락되고 적의 노략질이 심하여지자 왕득인의 아들 의성(義成)을 비..

정유재란, 조명연합군이 전멸한 남원성 전투(南原城 戰鬪) 설명

남원 전투(南原 戰鬪), 남원성 전투(南原城 戰鬪)는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이 전라도 남원성을 공격해 조명 연합군과 전투를 벌인 것으로 조명 연합군뿐만 아니라 각지의 의병장들과 군민들까지 합세해 전투를 치렀으나 결국 패배해 모두 살해당하고 지휘관 이복남은 자결하였다. 남원성이 일본군에게 점령당하자 이복남, 임현, 정기원, 신호 등은 성문으로 잠입하여 성을 점령한 5만 8천명의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전사하였다. 이때 명나라의 부총병 양원 등은 성을 탈출하였다.정유재란, 조명연합군이 전멸한 남원성 전투(南原城 戰鬪) 설명 1.전투전 상황정유재란이 발발하고 1597년 8월 28일(음력 7월 16일)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괘멸한 상황에서 왜군은 9월 17일(음력..

정유재란, 조선 최악의 패전 칠천량 해전(漆川梁海戰) 패배의 진실

칠천량 해전(漆川梁海戰)은 1597년(선조 30년) 8월 27일 (음력 7월 15일) 칠천도 부근에서 벌어진 정유재란의 첫 번째 해전이며 임진왜란 발발이후 조선수군 최악의 패전이었다. 이 전투에서 당시 수군을 지휘한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을 포함한 수많은 조선 수군이 목숨을 잃었다.정유재란, 조선 수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 칠천량 해전(漆川梁海戰)은 조선 수군의 전멸이 아니라 원균의 도주로 흩어졌던 것이다. 1. 이순신의 파면조선을 재침(정유재란)을 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목표는 임진왜란과는 달리 전라도를 포함한 조선의 하삼도였다. 문제는 조선 수군이었다.그리고 임진왜란에는 고니시가 1군이었지만, 명과의 협상 당시 풍신수길을 기만한 죄로 간신히 목숨을 건진 탓에 정유재란의 1군은 가토였고 고니시는 2군이었다..

임진왜란 조선을 도운 일본군 항왜(降倭) 조선을 배신한 순왜(順倭) 설명

[들어가기전]어느시대 어느나라에서든지 위기상황이 되면, 우리 편에서 협력을 하려는 자들도 생기지만, 배신을 하는 자들 또한 생긴다. 임진왜란 중에는 조선을 도와 일본을 버린 황왜군이 있었고, 반면, 조선에 불만을 품고 일본에 투항한 순왜가 있었다. 이들에 대해 간략히 정리해 본다. 임진왜란 조선을 도운 일본군 항왜(降倭) 조선을 배신한 순왜(順倭) 설명 1.항왜항왜(降倭)는 정유재란 당시 조선에 투항한 일본군을 이르는 말이다. 전쟁 당시 조선군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조선에 남아 자손을 낳고 살았다. 그들중 일부는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데에 활약하거나 병자호란 때 활약하기도 했다. 조선군은 전쟁 초반에는 포로들을 그냥 살해했으나 후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고 적극적으로 항왜 유..

왜(일본)의 제2차 침략 정유재란 발발 이유와 개요

임진왜란 전쟁 중이던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교섭이 결렬되자 풍신수길은 조선의 재침략을 명하고 다음해 1597년 3월 1일(정유년 음력 1월 14일)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일본군 선봉대가 조선의 부산을 재침하는데 이를 정유재란이라고 부른다. 가토에 이어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2군이 웅천으로 상륙하여 북진하였다. 같은 해 8월 20일(음력 7월 8일) 일본의 후속부대가 경상도 남해안 지역에 상륙하였다. 다음해인 1598년 철군할때까지 1년가량 전투가 벌어진다.왜(일본)의 제2차 침략 정유재란 발발 이유와 개요 1.임진왜란과의 차이점정유재란과 임진왜란의 가장 큰 차이점은 임진왜란의 최종 목적이 명나라까지 점령하는 것이었다면, 정유재란은 전라도 일대를 점령할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공격 목표가 분명해졌기에..

임진왜란, 왜와 명의 강화회담의 결렬의 원인 심유경

심유경은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石星)이 비밀리에 파견한 인물로 명나라의 유격 장군을 가칭하고, 적정을 탐지한다는 핑계로 조선에 파견되었다. 8월 17일 심유경은 선조를 만난 자리에서 명나라 70만 명을 파병 준비를 한다고 거짓으로 보고했고 당시 평양성에 있던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소 요시토시(宗義智) 등과 강화 교섭을 체결하는 데 중심을 이뤘지만, 거짓된 외교로 삼국(三國)을 크게 혼란에 빠뜨렸다.임진왜란, 왜와 명의 강화회담의 결렬의 원인 심유경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다음해까지 대부분의 전투가 벌어지고 이후부터는 거의 대부분 협상의 시간이 펼쳐진다. 여기에는 일본과 명의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는데, 일본군은 보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명군도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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