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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118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3

백범일지 김구선생 일대기 또 한 번은, 역시 그때의 일로, 아버지께서 엽전 스무 냥을 방 아랫목 이부자리 속에 두시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가 나가시고 나 혼자만 있을 때에 심심은 하고 동구 밖 거릿집에 가서 떡이나 사 먹으리라 하고 그 스무 냥 꾸러미를 온통 꺼내어 허리에 감고 문을 나섰다. 얼마를 가다가 마침 우리 집으로 오시는 삼종조를 만났다. "너 이 녀석, 돈은 가지고 어디를 가느냐?" 하고 내 앞을 막아 서신다. "떡 사 먹으로 가요." 하고 나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하였다. "네 애비가 보면 이 녀석 매맞는다. 어서 집으로 들어가거라." 하고 삼종조는 내 몸에 감은 돈을 빼앗아다가 아버지를 주셨다. 먹고 싶은 떡도 못 사 먹고 마음이 자못 불평하여 집에 와 있노라니, 뒤따라 아버지께서 돌아오셔서 ..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2

백범일지 김구선생 일대기 머리말 - 인, 신 두 어린 아들에게 아비는 이제 너희가 있는 고향에서 수륙 오천리나 떨어진 먼 나라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어린 너희를 앞에 놓고 말하여 들려 줄 수 없으매 그동안 나의 지난 일을 대략 기록하여서 몇몇 동지에게 남겨 장래 너희가 자라서 아비의 경력을 알고 싶어할 때가 되거든 너희에게 보여 주라고 부탁하였거니와, 너희가 아직 나이 어리기 때문에 직접 말하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지만 어디 세상사가 뜻과 같이 되느냐. 내 나이는 벌써 쉰 셋이언마는 너희는 이제 열 살과 일곱 살밖에 안 되었으니 너희의 나이와 지식이 자라질 때에는 내 정신과 기력은 벌써 쇠할 뿐 아니라, 이 몸은 이미 원수 왜에게 선전포고를 내리고 지금 사선에 서 있으니 내 목숨을 어찌 믿어 너희가 자..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1

백범일지 김구선생 일대기 백범김구선생의 말 (백범일지 서문) 이 책은 내가 상해와 중경에 있을 때에 써 놓은 "백범일지"를 한글 철자법에 준하여 국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끝에 본국에 돌아온 뒤의 일을 써 넣었다. 애초에 이 글을 쓸 생각을 한 것은 내가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서 내 몸에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험한 일을 시작할 때에 당시 본국에 들어와 있던 어린 두 아들에게 내가 지낸 일을 알리자는 동기에서였다. 이렇게 유서 대신으로 쓴 것이 이 책의 상권이다. 그리고 하권은 윤봉길의사 사건 이후에 중일 전쟁의 결과로 우리 독립운동의 기지와 기회를 잃어 목숨을 던질 곳이 없이 살아남아서 다시 오는 기회를 기다리게 되었으나 그때에는 내 나이 벌써 칠십을 바라보아 앞날이 많지 아니하므..

술) 술 이야기, 술의 기원, 역사

술의 기원 술은 인류 역사와 함께 탄생했다. 인류가 목축과 농경을 영위하기 이전인 수렵, 채취 시대에는 과실주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과실이나 벌꿀과 같은 당분을 함유하는 액체에 공기 중의 효모가 들어가면 자연적으로 발효하여 알코올을 함유하는 액체가 된 다. 원시시대의 술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모두 그러한 형태의 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최초로 술을 빚은 생명체는 사람이 아닌 원숭이로 알려져 있다. 원숭이가 나뭇가지의 갈라진 틈이나 바위의 움푹 패인 곳에 저장해둔 과실이 우연히 발효된 것 을 인간이 먹어보고 맛이 좋아 계속 만들어 먹었다. 이 술을 일명 원주(猿酒)라고 한다. 시대별로 주종의 변천을 살펴보면, 수렵, 채취시대의 술은 과실주였고, 유목시대에는 가축의 젖으로 젖술〔乳酒〕이 만들어졌..

라이프/요리 2010.07.07

삼국사기(三國史記) 원본 – 제 50편 끝

三國史記 卷 第五十 完 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守太保門下侍中判尙書事兼吏禮部事賢殿太學士監修國史上柱國致仕臣金富軾奉 宣撰 列傳 第十 (弓裔 甄萱) 弓裔 新羅人 姓金氏 考第四十七憲安王誼靖 母憲安王嬪御 失其姓名 或云 四十八景文王膺廉之子 以五月五日生於外家 其時屋上有素光 若長虹 上屬天 日官奏曰 此兒以重午日生 生而有齒 且光焰異常 恐將來不利於國家 宜勿養之 王勅中使 抵其家殺之 使者取於襁褓中 投之樓下 乳婢竊捧之 誤以手觸 其一目 抱而逃竄 勞養育 年十餘歲 遊戱不止 其婢告之曰 子之生也 見棄於國 予不忍 竊養以至今日 而子之狂如此 必爲人所知 則予與子俱不免 爲之奈何 弓裔泣曰 若然則吾逝矣 無爲母憂 便去世達寺 今之興敎寺是也 祝髮爲僧 自號善宗 及壯不拘檢僧律 軒 有膽氣 嘗赴齋 行次有烏鳥銜物 落所持鉢中 視之 牙籤書王字 則秘而不言..

역사/국사 2010.06.30

삼국사기(三國史記) 원본 – 제 49편

三國史記 卷 第四十九 列傳 第九 (倉助利 蓋蘇文) 倉助利 高句麗人也 烽上王時爲國相 時慕容 爲邊患 王謂 臣曰 慕容氏兵强 屢犯我疆 爲之奈何 倉助利對曰 北部大兄高奴子賢且勇 大王若欲禦寇安民 非高奴7子無可用者 王以爲新城太守 慕容 不復來 九年秋八月 王發國內丁男年十五已上 修理宮室 民乏於食 困於役 因之以流亡 倉助利諫曰 天災 至 年穀不登 黎民失所 壯者流離四方 老幼轉乎溝壑 此誠畏天憂民 恐懼修省之時也 大王曾是不思 驅飢餓之人 困木石之役 甚乖爲民父母之意 而況比 有强梗之敵 若乘吾弊以來 其如社稷生民何 願大王熟計之 王 曰 君者百姓之所瞻望也 宮室不壯麗 無以示威重 今相國蓋欲謗寡人 以干百姓之譽也 助利曰 君不恤民 非仁也 臣不諫君 非忠也 臣旣承乏國相 不敢不言 豈敢干譽乎 王笑曰 國相欲爲百姓死耶 冀無後言〔後 恐作復〕 助利知王之不悛 退與 臣謀廢之..

역사/국사 2010.06.30

삼국사기(三國史記) 원본 – 제 48편

三國史記 卷 第四十八 列傳 第八 (向德 聖覺 實兮 勿稽子 百結先生 劍君 金生 率居 孝女知恩 薛氏 都彌) 向德 態川州板積鄕人也 父名善 字潘吉 天資溫良 鄕里推其行 母則矢其名 向德亦以孝順爲時所稱 天寶十四年乙未 年荒民饑 加之以疫 父母飢且病 母又發옹 皆濱於死 向德日夜不解衣 盡誠安慰 而無以爲養 乃 肉以食之 又 母옹 皆致之平安 鄕司報之州 州報於王 王下敎 賜租三百斛 宅一區 口分田若干 命有司 立石紀事 以標之 至今人號其地云孝家 聖覺 菁州人 史矢其氏族 不樂世間名官 自號爲居士 依止一利縣法定寺 後歸家養母 以老病難於蔬食 割股肉以食之 及死 至誠爲佛事資薦 大臣角干敬信-伊 周元等 聞之國王 以熊川州向德故事 賞近縣租三百石 論曰 宋祁唐書云 善乎韓愈之論也 曰父母疾烹藥餌 以是爲孝 未聞毁支體者也 苟不傷義 則聖賢先衆而爲之 是不幸因而且死 則毁傷滅絶..

역사/국사 2010.06.30

삼국사기(三國史記) 원본 – 제 47편

三國史記 卷 第四十七 列傳 第七 (奚論 素那 驟徒 訥催 薛 頭 金令胤 官昌 金歆運 裂起 丕寧子 竹竹 匹夫 階伯) 奚論 牟梁人也 其父讚德有勇志英節 名高一時 建福二十七年庚午 眞平大王選爲 岑城縣令 明年辛未冬十月 百濟大發兵來 攻 岑城一百餘日 眞平王命將 以上州-下州-新州之兵救之 遂往與百濟人戰 不克引還 讚德憤恨之 謂士卒曰 三州軍帥見敵强不進 城危不救 是無義也 與其無義而生 不若有義而死 乃激昻奮勵 且戰且守 以至粮盡水竭 而猶食屍飮尿 力戰不怠 至春正月 人旣疲 城將破 勢不可復完 乃仰天大呼曰 吾王委我以一城 而不能全 爲敵所敗 願死爲大 喫盡百濟人 以復此城 遂攘臂瞋目 走觸槐樹而死 於是城陷 軍士皆降 奚論年二十餘歲 以父功爲大奈麻 至建福三十五年戊寅 王命奚論爲金山幢主 與漢山州都督邊品興師 襲 岑城取之 百濟聞之 擧兵來.奚論等逆之 兵旣相交 奚論..

역사/국사 2010.06.30

삼국사기(三國史記) 원본 – 제 46편

三國史記 卷 第四十六 列傳 第六 (强首 崔致遠 薛聰) 强首 中原京沙梁人也 父昔諦奈麻 其母夢見人有角 而妊身 乃生 頭後有高骨 昔諦以兒就當時所謂賢者 問曰 此兒頭骨如此何也 答曰 吾聞之伏羲虎形 女 蛇身 神農牛頭 皐陶馬口 則聖賢同類 而其相亦有不凡者 叉觀兒首有 子 於相法面 無好 頭 無惡 則此必奇物乎 父還謂其妻曰 爾子非常兒也 好養育之 當作將來之 國士也 及壯自知讀書 通曉義理 父欲觀其志 問曰 爾學佛乎 學儒乎 對曰 愚聞之佛世外敎也 愚人間人 安用學佛爲 願學儒者之道 父曰 從爾所好 遂就師讀孝經-曲禮-爾雅-文選 所聞雖淺近 而所得愈高遠 魁然爲一時之傑 遂入仕 歷官爲時聞人 强首常與釜谷冶家之女野合〔常 當作嘗〕 情好頗篤 及年二十歲 父母媒邑中之女有容行者 將妻之 强首辭不可以再娶 父怒曰 爾有時名 國人無不知 而以微者爲偶 不亦可恥乎 强首再拜曰 貧且..

역사/국사 2010.06.30

삼국사기(三國史記) 원본 – 제 45편

三國史記 卷 第四十五 列傳 第五 (乙巴素 金后稷 祿眞 密友-紐由 明臨 夫 昔于老 朴堤上 貴山 溫達) 乙巴素 高句麗人也 國川王時 沛者於昇留-評者左可慮等 皆以外戚擅權 多行不義 國人怨憤 王怒欲誅之 左可慮等謀反 王誅竄之 遂下令曰 近者 官以寵授 位非德進 毒流百姓 動我王家 此寡人不明所致也 今汝四部 各擧賢良在下者 於是四部共擧東部晏留 王徵之 委以國政 晏留言於王曰 微臣庸愚 固不足以參大政 四鴨 谷左勿村乙巴素者 琉璃王大臣乙巴素之孫也 性質剛毅 智慮淵深 不見用於世 力田自給 大王若欲理國 非此人則不可 王遣使以卑辭重禮聘之 拜中畏大夫 加爵爲于台 謂曰 孤 承先業 處臣民之上 德薄材短 未濟於理 先生藏用晦明 窮處草澤者久矣 今不我棄 幡然而來 非獨孤之喜幸 社稷生民之福也 請安承敎 公其盡心 巴素意雖許國 謂所受職不足以濟事 乃對曰 臣之駑蹇 不敢當嚴令 ..

역사/국사 2010.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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