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세계사

베트남 전쟁, 한국군이 저지른 용서받지 못할 범죄 빈호아 학살 (Bình Hòa massacre)

올드코난 2015. 3. 17.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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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 전] 한국군은 베트남에 주둔하면서 생활필수품을 지원하고 태권도를 보급하며, 도로를 만들고, 학교와 병원을 세우는 등 대민 지원 사업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한국군이 자행한 수많은 민간인 학살은 이러한 대민 지원 사업의 빛을 바래게 하였다. 한국군은 작전 지역 안에서 수많은 민간인 살해와 가옥 파괴, 성폭력과 같은 범죄를 저질렀다. 대한민국은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일어난 한국의 전쟁 범죄에 대해 공식적인 인정을 하지 않고 있지만, 1998년 김대중 전 대통령은 베트남 방문 당시“양국 간의 불행했던 과거에 대해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사과한 바 있다



베트남 전쟁, 한국의 해병대 (청룡부대)가 저지른 만행, 용서받지 못할 전쟁 범죄 빈호아 학살 (Bình Hòa massacre)


1.요약

빈호아 학살은 베트남 전쟁 중이던 1966년 12월 3일부터 6일까지 대한민국 해병대 청룡부대에 의해 430명의 마을 주민이 학살을 당한 대량 학살 사건이다. 남베트남 꽝응아이 성 빈호아(베트남어: Bình Hòa)에서 일어난 이 학살의 희생자는 대부분 여성, 노인과 어린이였으며, 21명의 임신부도 있었다. 해병대는 마을 전체를 불태우고, 수백 마리의 가축들과 함께 사람들을 학살하였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한국군과 미군에 대항하기 위해 베트콩에 가입하게된다.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오히려 베트콩을 죽였다고 속였던 빈호아 학살의 진실을 살펴본다.


2.사건 배경

대한민국 해병대의 청룡 부대는 1965년 10월에 캄란 만에 주둔하다가 1966년 8월 꽝남 성 쭈라이로 이동하였고, 1967년 12월 부터는 호이안에 주둔하였다. 청룡부대가 관할한 꽝남 성, 다낭, 꽝응아이 성 등은 베트남 전쟁 이전 베트남의 남북을 분단하였던 북위 17도선과 인접한 베트남 중남부 지역으로 치열한 전투가 많았던 곳이다. 빈호아가 속한 꽝응아이 성 일대 역시 청룡 부대의 작전 구역이었다. 당시 청룡부대는 연합군의 최대 보급기지인 다낭 비행장과 남베트남군 1군의 배후에 있는 북베트남군을 제거하는 추라이 전역(戰域)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3.학살 사건 발생

1966년 12월 5일 새벽 5시, 출라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해병대 청룡여단 1개 대대가 빈호아로 행군했다. 이날 민간인 36명을 쯩빈 폭탄구덩이에 넣고 쏘아 죽였고 다음날인 12월 6일, 계속해서 꺼우안푹 마을로 밀고 들어가 273명의 양민을 모아놓고 각종 무기로 학살했다. 모두가 참혹한 모습으로 죽었고 겨우 14명만이 살아남았다. 

1999년 한겨레21의 구수정 통신원과 인터뷰를 한 마을 부주석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1966년 12월3일(음력 10.22) 빈호아 사, 롱빈마을의 쩌우레 언덕에 주둔하고 있던 청룡부대 1개 대대가 이곳 9개 마을에서 소탕작전을 펼치면서 학살이 일어났습니다. 3일에서 6일까지 모두 430명이 집단학살을 당했지요. 응옥흥마을에서는 80살 노인인 후인의 목을 잘라서 논에 걸어놓기도 했어요. 희생자들 중에는 임산부도 7명이 있었고, 2명의 여성이 강간당하기도 했지요. 또 2명이 산 채로 불구덩이에 던져졌고, 1명은 배가 갈라져 창자가 꺼내졌습니다.”


4. 증오비 건립

해병대 청룡부대가 민간인 36명을 학살한 쭈옹딘 폭탄 구덩이 옆에는 한국군 증오비가 세워졌다. 증오비에는 “하늘까지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영국과 일본에서는 빈호아 학살에 희생당한 주민들을 위로하는 위령비를 세우졌지만, 한국은 여전히 반성을 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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