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조선

임진왜란 전 동아시아 (조선, 명, 왜) 상황

올드코난 2015. 3. 24.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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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壬辰倭亂) 1592년(임진년, 선조 25)에서 1598년(선조 31)까지 조선에서 벌어진 조선과 왜의 7년전쟁. 조선왕조실록에 제1차 침략을 임진왜란, 1597년의 제2차 침략을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고 구별하여 부른다. 최근 '조일전쟁, 임진전쟁'이라 부르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당시 왜의 연호를 따서 문록·경장의 역(일본어: 文禄・慶長の役 분로쿠게이초노에키)이라고 부르며, 북한에서는 임진조국전쟁(壬辰祖國戰爭)이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당시 명 황제 만력제의 호를 따 만력조선전쟁(萬曆朝鮮戰爭)이라고 부른다.

조선은 물론 일본과 중국 등 동아시아의 역사를 바꾼 당시 세계 최대 규모로 벌어진 임진왜란에 대해 차근 정리해 보겠다. (주로 위키백과, 징비록, 국사 교과서를 참고해 본다.)


임진왜란 (조일전쟁) 첫 번째, 전쟁전 동아시아 (조선, 명, 왜) 상황


1. 전쟁전 조선 상황

전쟁전 조선은 오랫동안 전쟁이 없어 군사적으로 매우 무능했다. 세조 이후 권력을 잡은 훈구파들의 부패가 극심해졌고 이에 대행해 성종대부터 성리학을 기반으로 사림파 세력이 등장하여 개혁에 나서고 치열한 정치 대결이 펼쳐진다. 이로 인해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중엽에 이르는 기간동안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등 네 차례에 걸친 사화가 일어나 사림파 신진 세력들은 크게 타격을 받고 이로 인해 국가 전체에 큰 혼란이 일어나면서 기존의 신분 제도와 군역 제도가 무너지면서 권문세도가가 농장을 확대해 대농장을 운영하게 되고 공납 제도도 문란해지게 된다. 사대부들은 세금과 병역을 사실상 합법적으로 면제를 받게 되고 이는 모두 백성들이 감당해야 했다. 이러한 시기 조선의 개혁을 해야할 중요한 시기인 선조대에 권력을 장악한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정치적인 대립을 하게 되며, 이러한 상황에서 제대로 된 전쟁 준비를 하기는 분명 무리가 있었다.


2.일본 상황.

1392년 무로마치 막부의 제3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남북조의 분열을 종식시키고 전국의 지배권을 장악했는데 15세기 중엽에 이르러 쇼군의 통제력이 약화하자 지방 봉건 영주인 슈고 다이묘들이 분열하게 되고 1467년 오닌의 난을 계기로 무로마치 바쿠후가 몰락하고 그로부터 100여 년간 센고쿠 시대(전국시대)가 시작된다. 

이 혼란기에 지방 신흥 무사 집단이 구 세력인 슈고다이묘 집단을 대신하여 자립 태세를 갖추어 센고쿠 다이묘로 등장하였다.

다이묘들은 난립하기에 이르렀고 이런 환경에 노출된 일본에 15세기 후반 유럽 상인들이 들어와 신흥 상업 도시가 발전하여 지배층인 다이묘들은 봉건적인 지배권을 강화ᆞ노력하였다. 전국시대 중반을 넘어 오다 노부나가가 국내 통일에 거의 성공하게 되지만 부하의 변절로 죽음을 당하고, 부하였던 하시바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시) 뒤를 잇는다. 

1583년 하시바 히데요시는 시바타 가쓰이에와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거의 수중에 넣었다. 같은 해 음력 3월에는 수륙 교통 요지인 이시야마 혼간지 자리에 장대한 오사카 성을 쌓기 시작했고 1584년 오다 노부나가의 차남인 오다 노부카쓰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연합군과 전쟁에 돌입했다. 결국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상경하여 화의가 성립되 후방이 안정된다. 

1585년 시코쿠를 평정하고 조정에서 간파쿠, 다음 해에는 다이죠 다이진에 임명되고 성(姓) 도요토미(豊臣)를 하사받았다. 간파쿠가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황에게서 일본 전국 지배권을 위임받고 강령으로서 소부지(墜無事;전국의 평화)를 내걸었다. 이를 토대로 쟁란을 거듭하던 다이묘들에게 정전을 명령하고 영토의 확정을 도요토미 히데요시 자신에게 맡기게끔 했다. 

1587년에는 명령에 불복하던 사쓰마 국의 시마즈 세력을 정벌하고 1590년에는 오다와라 정벌을 감행, 난공불락을 과시하던 오다와라 성을 함락시켰고 도호쿠 다테 세력 등의 다이묘를 복속시키면서 전 일본을 통일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전인 1585년에 대륙 진출을 최초로 언급했고 쓰시마 국주에게 조선 정벌을 준비하라고 명한 때는 1587년 이었다.


3. 명의 상황

영락제 사후 국력이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해 1449년에 정통제가 오이라트부를 친정하다가 도리어 패전하여 포로가 된 ‘토목보의 변’을 계기로 명의 국제상 영향력이 점차 약화하였고 내부 기강도 해이해져 갔다. 16세기에 이르자 명은 혼란해지고 왜구 집단은 명의 변경 해안 지대를 휩쓸었고 북방으로는 몽골족의 침입 등 양방에서 싸워야만 했다.(불로남왜) 만력제 초기부터 10년간은 장거정을 비롯한 대정치가가 등장하여 다시 중흥하는 기회를 맞았으나 장거정이 죽자 만력제는 자신이 직접 매관매직을 일삼으며 개인의 재산을 늘리는 데에만 노력을 기울이며 명나라의 국운은 급속도로 쇠퇴하게 된다.


4.요약

임진왜란 직전 상황을 돌이켜보면, 왜(일본)은 치밀하게 전쟁을 준비할 수 있는 상황이며, 특히 전쟁터를 누볐던 유능한 장수와 강한 병사들이 풍신수길에 복종하면서 당시로서는 최강의 군세를 갖고 있었지만, 명나라와 조선은 내부의 문제로 분열을 하면서 왜의 침략을 제대로 대비할 수 없었고, 이는 얼마 후 벌어진 임진왜란을 통해 그 댓가를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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