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세계대전

경제대공항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총통이 된 히틀러

올드코난 2015. 8. 13.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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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세계대전의 가장 큰 책임이 누구냐하면 당연히 히틀러를 꼽을 것이다. 히틀러는 원래 화가를 꿈꾸던 청년으로 그의 남겨진 작품들은 수준이 있는 것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로 일컬어지는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결정적인 계기는 경제대공황이었다. 그 과정을 간략히 정리해 본다.

경제대공항으로 독일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총통이 된 히틀러


1. 히틀러의 등장

히틀러는 1919년 9월 독일 노동자당(Deutsche Arbeiter Partei, DAP)에 입당하고 곧 당내에서 뛰어난 연설로 지도위원회의 위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1920년 초, 히틀러는 독일 노동자당 선전부 책임자가 된다.

1920년 2월 24일, 뮌헨의 커다란 맥주홀인 호프브로이하우스에 모인 2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 앞에서 히틀러는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약자: NSDAP)라는 이름을 새롭게 발표하고 민주공화제 타도와 독재 정치 강행, 베르사유 조약 타도, 민족주의와 반(反)유대주의 그리고 백화점과 다국적 기업 공격 등을 포함한 25개 조항으로 된 나치당의 당 강령을 발표한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와 파시스트당의 로마 진군에 자극받은 히틀러는 1923년 11월 뮌헨에서 봉기를 시도하지만 바이에른 주의 군부와 관료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실패하고 베르세르크 감옥에 투옥되는데, 옥중에서 《나의 투쟁》을 출판해 베스트 셀러가 된다.



2. 경제대공황

히틀러의 6개월 동안의 수감 생활 기간 당은 사실상 해체된 상태였고 출소한 히틀러는 흩어진 당원들을 다시 모으고 재건에 나서지만 독일 경제가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하면서 극단적인 정당들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를 잃어가고 있었다. 극우와 극좌는 경제상황는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히틀러가 권력을 잡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경제 대공황이었다.

1929년 검은 목요일로 시작된 세계 경제 대공황으로 1차대전 이후 되살아나던 독일 경제는 실직자 수가 6백만 명으로 늘어나는 등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이는 독일뿐만이 아니라 당시 수많은 선진국에서도 경제대공황의 피해를 입게 된다.


3. 히틀러의 권력장악

경제대공황으로 독일인들은 극도의 불안에 시달리고 이를 호기로 여긴 나치당은 18.3%의 득표율로 독일 사회민주당에 이어 제2당이 된다. 연립내각에 입각하기를 거절하고 나치스의 단독 집권을 요구한다. 히틀러는 1932년 4월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로 출마 1,340만 표(36.8%)를 얻었지만 파울 폰 힌덴부르크 장군에게 패하고 7월 총선거에서는 37.3%를 득표 압도적인 당세를 과시하지만 계속해서 연립내각에 참가할 것을 거절한다. 11월 총선거에서는 33.1%로 지지율이 떨어지지지만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자본가나 농업계를 비롯한 지배세력의 많은 사람들이 히틀러를 지지한다.

정국 장악에 사실상 어려움을 겪던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1933년 1월 30일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한다.


1934년 8월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죽자 국민투표를 실시해 총리가 대통령의 지위를 겸하게 되고 그 지위를 총통 및 총리(Führer und Reichskanzler) 약칭 총통(Führer)이라 칭하였으며 보통 총통으로 불리게 되었다. 


히틀러에게 많은 독일인들이 기대를 한 것은 역시 경제문제였다. 경제 대공황이 아니었다면 히틀러는 권력과는 인연이 없었을 수 있었지만, 경제이 불안이 치안문제로 이어지고, 희망이 사라지던 시점에 히틀러의 달콤한 거짓말에 독일인들은 속을 수 밖에 없었고, 다른 대안도 없었다.


이제 히틀러는 독일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게 된 것이고, 이때부터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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