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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방) 한방의 역사

올드코난 2010. 7. 2.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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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방의 역사

판도라(pandora)의 상자가 열릴 때 그 속에서 온갖 불행과 함께 질병도 튀어나왔다는 그리스 신화도 있지만, 인류는 질병과 더불어 역사를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최초의 인류 때부터 인간은 그들을 위협하는 온갖 자연조건 뿐만 아니라 질병과도 싸워야 했던 것이다.  동물은 자기 몸에 상처가 나거나 병이 생겼을 때 그 상처를 핥거나 굶어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본능적 행동을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도 어떤 병에 걸렸을 때 그 병을 물리치고 스스로의 목숨을 지키려는 본능이 있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자연계에 널려있는 여러 가지 것들을 이용해서 질병을 퇴치하려고 했다.

  몸이 아프거나 몸에 상처가 났을 때 주위에 널려 있는 풀이나 나무 잎사귀 같은 것들을 가져다 먹거나, 짓찧어 상처난 곳에 바르기도 했다.  때로는 병이 난 동물이 어떤 풀이나 나무 잎사귀를 먹고 낫는걸 보고는 그것을 활용하기도 했을 것이다.  또한 뜨거운 돌을 아픈 곳에 갖다대거나 뾰족한 돌이나 짐승뼈 같은 것으로 아픈 곳을 자극하여 통증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인간의 지혜가 발달되고 불을 사용할 줄 알게 되면서 부터는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약재로 약을 만들어 먹고 뜸도 뜨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의 한약과 침, 뜸의 시초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한방의학의 역사가 아주 오래되고, 또 한방의학이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난 원시적 경험의술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방의학이 오늘날처럼 체계적인 면모를 갖추기까지는 장구한 세월에 걸쳐 무수한 경험과 시행착오, 변천 그리고 수많은 한방의들의 노력과 집념이 뒤따랐음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

  고대 중국에 있어서 원시적 경험의술이 체계적인 임상의학으로 발전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2200여 년 전으로 추측된다.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던 의술이 춘추전국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기록된 것이며, 한방의학의 최고원전으로 불리우는 '황제내경'이 음양오행설에 입각한 철학적 논리를 바탕으로 독특한 의술 체계를 수립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다.

  '황제내경'의 저자는 분명치 않지만, 그 형식은 전설적인 가상 인물의 황제와 기백,뇌공 등 여섯 명의 명의들의 의술에 관한 질의체로 되어 있으며, 고대 의술사상이 집대성되어 있다. 여기에는 인체의 생리,병리,치료,섭생과 양생법 등이 논의되어 있는데, 영추편에는 해부,생리,경락,침구치료가 기록되어 있다.

  한편 천연자원이 풍부한 중국 서쪽의 산악지역에서는 일찍부터 초근목피의 신비한 효능을 깨달아 본초학(한약을 통털어 본초라 하며, 이것을 연구하는 학문을 본초학이라고 한다)이 발달했다. 즉 여러 가지 약재의 효능과 성분은 파악하여 이를 서로 배합한 처방이 병을 치료하는 약으로써 널리 쓰이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전설상이긴 하나, 본초학의 근본이자 의약의 시초를 이룬 사람은 신농씨로 전해져 오고 있다. 중국 전설시대의 삼황오제로 불리우는 성현 가운데 한분으로서 명의의 첫손가락으로 손꼽히는 신농씨는 백초를 직접 맛보아 독초와 약초를 구분하고 그 효능과 특성을 파악하여 약으로 제정했다고 하는데, 독초 때문에 하루에도 백번씩 죽었다 깨어났으며, 마침내는 독초를 먹고 목숨을 잃었다고 전해 온다.

  신농씨는 또 몸은 사람이고 머리는 소의 형상을 닮았으며, 그의 재위기간은 무려 140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최초의 명의로서 신농씨는 중국 고대의 여러 문헌에 나타나고 있다.

  그중 가장 오래된 것은 '주역'이며, 사서의 하나인 '맹자'에도 신농씨에 대한 언급이 있다.

  결국 신농씨는 유목사회에서 농경사회를 넘어가는 과도기의 제왕이었으며, 인간이 본능적이고도 경험적인 의료의 단계를 탈피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전설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중국의 의서중 신비한 효험을 보인 것에는 으레'신농'이란 이름이 머리에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예로 '신농본초경' '신농오장론', '신농명당도'등을 들 수 있다.

  특히 본초서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불리어지는 '신농본초경'은 후한시대에 도홍경이 신농씨의 이름을 빌어 지은 저서로서, 365종의 천연약물이 기재되어 있다.

  이후 이 '신농본초경'에 나오는 천연약물은 차츰 증가하여 365종에서 1,558종으로 크게 증가되었고, 명조에 이르러 이시진은 여기에 374종을 추가하고 내용을 고치는 등 심혈을 기울여 '본초강목'을 완성하게(1590) 됨으로써 본초학은 거의 완벽에 이르게 된다.

  '황제내경','신농본초경'과 더불어 고대 한방의학은 중추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책은, 서기 1세기 경에 장사태수 장중경이 지은 '상한론'과 그 자매편이라고 할수 있는 '금궤요략'이다.

  '상한론'은 주로 급성 발열성 질병에 대한 증후 변화의 법칙과 그에 상응하는 치료 원칙과 기준을 논한 것이고, '금궤요략'은 당시에 활용한 처방으로서 만성병 치료법은 논한 것이다.

  이밖에도 한방의학의 기초와 임상에 관해 절요한 81개 항목을 발췌하여 질의체로 논한 편작의 '난경', 맥학의 기본을 이루고 진단학상 빼놓을 수 없는 왕숙화의 '맥경', 침구학의 원전을 이루고 있는 항보밀의 '침구갑을경'등 수많은 저서가 저술되었다. 또한 중국에는 전국시대의 명의 편작과 후한 때의 명의 화타를 비롯한 수많은 명의들이 병자를 구하고 한방의학을 발전시켜 왔다. 특히 편작은 괵나라의 태자가 다 죽게 된 것을 살려'천하의 명의'라는 명성을 얻었으며, 화타는 독화살을 맞은 관운장의 팔뼈를 수술하여 화살독을 제거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처럼 중국에서 발상하고 발전된 한방의학은 맨처음 중국에서만 쓰여오다가 고구려 평원왕 때부터 우리나라에도 전래되기 시작했다. 이어 중국의 한방의학은 백제와 신라에도 전해졌고, 자연발생적으로 전해오던 우리의 토속의술과 합쳐져 실용화 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중국에서 받아들인 이 한방의학을 우리나라 사람 체질에 맞게 소화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삼국시대에 이미 독자적인 체계까지 세웠다.

  이때 벌서 '신라법사방','백제신집방'등의 의서가 나왔고, 멀리 일본에까지 의술을 전해줄 정도 였다.

  오늘날 일본의 오사카가 세계적인 제약도시로 성장하게 된 것도 기실 따지고 보면, .  495년경 고구려 사람으로서 백제에 귀화한 덕래가 일본 국왕의 초청을 받아 그곳으로 가 의약에 대한 기술을 전수함으로써, 이를 대대로 계승시킨 데 있다는 사실만 봐도 삼국시대의 의약 발달 정도를 능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이후 조선조에 이르러 국가의 적극적인 시책과 총예한 의인들이 많이 나옴으로써 우리나라의 의술과 의약은 놀라운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다.

  중국의 영향에서 탈피해 많은 이론과 학설을 검토 소화하여 경험과 실증을 바탕으로 예리한 비판을 가한 후 다시금 실제 임상의학으로 통합, 재정리한 실용의학으로서 독자적인 한방의학을 수립한 것이다.

  조선조 초엽에 국내 약재를 위주로 해서 집대성한 '향약집성방', 또 그 유명한 허준의 '동의보감'을 비롯해 허임의 '침구경험방', 조정준의 '급유방', 임언국의 '치종비방', 정경선,양예수의 '의림촬요', 정다산의 '마과회통', 황도연의 '의종손익''방약합편'등이 그 대표적인 것들이다.

  그리고 근세조선에 이르러서는 명의 이제마가 한방의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병자 치유의 오랜 경험 등을 토대로 독창적 의학서인 '동의수세보원'을 펴내고, 사람의 체질과 의약과을 놀라운 상관성을 밝혀 사상의학 체계를 확립했다.

  이 사상의학은 민족 주체성과 탁월한 독창성을 지닌 체질학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한의학의 새로운 미래상을 제시한 것이기도 하다.

  근대에 들어와 서양의학이 도래하면서 한방의학은 제도적으로 소외당하고, 한때 침체기에 빠진 듯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한방의학의 우수성이 널리 입증되고 한방의학자들을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면서 이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 또한 날로 높아지고 있는 추세다.

  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한방의학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이에 대해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렇지만 한방의학자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한방의 과학화와 주체성을 지닌 새로운 의학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계속 연구, 노력하고 있다.

(출처:한방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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