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

고려사) 2. 궁예의 몰락과 왕건의 고려 건국

올드코난 2010. 7. 22.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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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궁예의 몰락과 왕건의 고려 건국

 

시간이 흐르면서 후삼국 구도는 완전히 굳혀지는 듯하였다. 하지만 태봉에서

내분이 일어나 이들간의 관계는 다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왕건의 활약으로 태봉은 후삼국 구도를 주도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왕건의

지위도 점차 격상되어 913년에는 파진찬 겸 시중으로 임명되었다.

왕건의 지위가 시중에 이르자 주변에는 그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생겨났다.

궁예는 변덕이 심한 편이었고 성격도 포악했다. 왕건은 궁예의 그런 성격이

언젠가는 자신에게 칼을 겨누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위기감을 느낀

왕건은 궁예에게 변방으로 보내줄 것을 청하였다. 변방에 나가 있는 것이 중앙에

있는 것보다는 안전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변방을 다니며 세력을 형성한

장군이었기 때문에 적어도 변방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안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왕건의 간청에 따라 궁예는 그로 하여금 다시 수군을 지휘하게 하였다.왕건이

수군을 맡게 되자 한때 나주 지역을 압박해 오던 후백제 군사들은 다시 위축되었다.

왕건이 나주 지역을 완전히 회복했다는 소리를 듣고 궁예는

'나의 여러 장수들 중에  누가 이 사람과 비길만 하겠는가' 하면서 왕건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궁예는 한편으론 왕건의 세력과 입지가 강화되자

점차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이 때문에 궁예는 왕건을 급히 소환하여 선수를 쳤다.

왕건에게 역모 혐의를 씌워 위협을 가했던 것이다.

궁예는 평소 스스로 사람의 마음을 읽는 비상한 재주가 있다고 떠벌이곤 하였다.

터무니없는 독심술을 근거로 그는 이미 수백 명의 장수와 신하들을 죽인 상태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역모죄로 몰려 죽었다. 궁예의 처벌은 가혹했다. 심지어는

여자의 음부를 불에 달군 쇠방망이로 찔러 연기가 입과 코로 나오도록

하는 형벌을 가하기도 하였다.

이런 사태를 수도 없이 목격한 왕건은 궁예의 느닷없는 역모설에 바짝 긴장했다.

하지만 왕건은 그런 내면을 드러내지 않고 태연하게 대처했다. 이때의 상황을

[고려사]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하루는 궁예가 태조(太祝 왕편)를 대궐 안으로 급히 불러들였다. 그때 궁예는

처형시킨 자들로부터 몰수한 금과 보믈,가재도구 등을 점검하고 있었다.

태조를 보자 그는 성난 눈으로 노려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어젯밤에 사람들을 모아서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는데,이 말이 사실인가?'

이 말에 태조의 얼굴빛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태조는 오히려 태연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어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에 궁예가 다구치며 말했다.

'그대는 나를 속이지 말라,나는 능히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다.

지금 곧 정신을 집중시켜 그대의 마음을 꿰뚫어 보리라.'

궁예는 눈을 감고 뒷짐을 지더니 한참 동안 하늘을 우러렀다. 이때 최응이

옆에 있다가 고의로 붓을 떨어뜨리고는 그것을 줍는 척하면서 태조에게

귀엣말로 속삭였다.

'장군, 복종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워집니다.'

이 말을 듣고 태조는 거짓으로 역모를 인정하였다.

'사실은 제가 모반을 계획하였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태조의 이 말에 궁예는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그대는 과연 정직한 사람이다.'

궁예는 이렇게 말하면서 곧 금은으로 장식한 말 안장과 굴레를 태조에게 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그대, 다시는 나를 속이려 들지 말라.'

 

[고려사]는 왕건이 이렇게 거짓으로 모반 계켜을 인정하여 목숨을 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 내용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궁예는 처음부터

왕건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왕건의 충성심을 시험하면서 더욱

확실하게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궁예의 이 같은 행동은 왕건에게 더욱 위기감을 느끼게 하였다.

 그러던 차에 흥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이 왕건을 찾아와 모반을

 도모하자고하였다. 왕건은 망설이다가 부인 유씨의 설득에 힘입어 마침내 군사를

  모아 왕성으로 향하였다.

왕건이 군사를 몰고 왕성으로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궁예는

싸워봤자 승산이 없다는 판단을 하고는 변복을 하고 왕성을 몰래 빠져나가 겨우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산야를 전전하다 허기를 이기지 못해 남의 보리 이삭을

잘라 먹다 들켜 강원도 평강에서 살해되었다.

918년 무인년 f월 병진일, 왕건은 드디어 왕으로 등극하여 국호를 고구려의

뒤를 잇는다는 의미에서 '고려('라 하고 연호를 '卞卞라고 하였다.

 

고려라는 명칭은 고려 건국 당시에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고려는

어원적으로 볼 때 고구려와 다른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구려(勳子 명칭의 유래를 살펴보면 그것은 쉽게 확인된다. '(i

는 한자어에서 높여서 부르거나 또는 미칭으로 덧붙일 때 쓰는 접두사에 지나

지 않기 때문에 별다른 뜻이 없다.굳이 뜻을 붙이려고 한다면 '위대한', '숭고한,

'고씨의'등의 형용사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구려('는고

구려어로 성(t,,고을 등을 의미하는 '' .'' .'구루'등을 음차한 것이

.따라서 고구려는 '고씨의 고필,때대한 성붐 등으로 풀이되고 고려는 고

구려의 줄임말이거나 '구루'에 대한 한자식 표기로 볼 수 있다.

고려와 고구려가 고구려에 대한 같은 명칭이라는 사실은 고려 건국 이전의

일을 다루고 있는 [편년통록]의 왕건 조상들에 얽힌 설화에서도 확인된다.

왕건의 조부 작제건(作料舊 배를 탔을 때 중국인들이 그를 향해 이미 '

려인이라고 호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이나 일본 역사서들도 고려와

고구려를 같은 나라로 표기하고 있으며,일연의 [삼국유사]에서도 고구려를 고

려라고 표기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근거로 볼 때 코리아n=0rea)나 꼬레(Cure) 등의 알파벳식 명칭도

고려를 지칭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를 지칭한 것으로 판단된다. 고구려시대에

이미 고구려는 고려라는 이름으로 인도나 티벳뿐만 아니라 중국 서쪽 세계에

알려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인들이 고구려와 고려를 같은 이름으로

인식한 가운데 인도 계통 승려인 마라난타나 묵호자가 중국을 거쳐 불교를 전

하기 위해 고구려를 방문하고 돌아간 사실을 통해서도 이는 증명된다. 또한 고

려 성립 이전에 고구려 유민 출신 고선지(?-755)가 사라센 군대를 맞아 싸울

때 그가 고려인(또는 고구려인)이라는 사실이 아라비아 세계에 전해졌을 가능

성도 높다.

 

(저자:박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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