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왕건의 출생과 성장
아버지가 (송9오개성)의 호족이며 궁예가 세운 태봉(奉封)국 신하였다는
사실 이외에 왕건의 조상들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려진 이야기는 거의 없다. 다만
조선 문종대에 정인지 등이 139권으로 편찬한 '고려사'에 고려 '태조실록' 에서
발췌한 3대 조상들의 추존 묘호가 전해지고 있는 정도다.
고려를 세운 후 왕건은 증조부를 원덕대왕,증조모를 정화왕후,조부를
의조 경강대왕,조모를 원창왕후,부친을 세조 위무대왕,모친을 위숙왕후로
추존했다는 내용이 그들에 대한 모든 기록이다. 다만 고려 의종 때 인물인
김관의의 [편년통록 編고舊]에 실린 그들에 얽힌 민담들이 함께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는 왕전의 탄생설화도 실려 있는데, 이 이야기에는 신라말 도참사상
으로 유명했던 승려 도선(舊料)이 등장하고 있다.
왕건의 아버지 용건(龍하[고려사] 에 기록된 정식 이름은 륭隆이하)이 몽녀
한씨와 결혼하여 살림을 차린 곳은 송악산 남쪽 기슭이었다. 그들이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날 그들 부부에게 도선이 찾아왔다. 도선은 당나라에
유학하여 고승 일행에게서 풍수지리법을 익힌 후 귀국하던 중이었다
(도선의 당나라 유학설은 현재 정설로 인정되지 않는다).
도선은 용건의 집 앞을 지나가면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어허, 기장을 심을 터에 어찌 삼을 심었는가?'
이 말을 들은 용건의 아내는 급히 남편에게 달려갔다. 그녀가 도선의 말을
전하자 용건은 급히 도선의 뒤를 쫓았다. 용건이 자신을 쫓아오자
도선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일러주는 대로 집을 지으면 천지의 대수에 부합하여 내년에는 반드시
슬기로운 아이를 얻을 것입니다. 아이를 얻으면 이름을 왕건이라고 하십시오'
도선은 봉투를 만들어 겉에 간단한 글귀를 적어넣었다.
'삼가 글을 받들어 백 번 절하면서 미래에 삼한을 통합할 주인 대원군자를
당신에게 드리노라.'
용건은 도선이 주는 봉투를 받아 백 번 절하고 그가 시킨 대로 집을 짓고
살았더니, 그 달부터 아내에게 태기가 보였고 열 달 뒤에 아이를 낳았다.
용건은 도선의 말대로 아이의 이름을 왕건이라고 지었다.이때가 8긴년 1월이었다.
이 이야기는 김관의의 '핀년통록'에 기록된 내용을 [고려사]에 옮겨 적은것이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어쨌든 왕건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왕이 될 운명이었다는 것을 피력하고 있다. 이러한 운명론은 대개의
인물 설화가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형식이다.
왕건의 탄생설화에 도참사상으로 유명한 도선을 끌어들인 것은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한 편자의 극적 장치로 판단된다. 도선이 신라말기에 살았던
실존 인물인 점을 부각시켜 왕건의 탄생에 얽힌 이야기를 역사적인 사실로
이끌어가려는 의도가 짙게 배어 있기 때문이다.
도선과 왕건의 관계는 비단 탄생설화에만 그치지 않는다.민지의
[편년강목(編年綱目)]에는 왕건이 17세 때 도선이 다시 송악산을 찾아온 것으로
되어 있다.
왕건을 찾아온 도선이 말했다.
'당신은 혼란한 때에 상응하여 하늘이 정한 명당에 태어났으니,삼국 말세의
창생들은 당신이 구제하여 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도선은 왕건에게 군대를 지휘하고 진을 치는 법, 유리한 지형을 선택하고
적당한 시기를 택하는 법, 산천의 형세를 보고 이치를 헤아리는 법 등을
가르쳐주었다.
이 기록 이외에 왕건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고려사J '태조' 편에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지혜가 있고 용의 얼굴에 이마의 뼈는
해와 같이 둥글며, 턱은 모나고 안면은 넓직하였으며, 기상이 탁월하고 음성이
웅장하여 세상을 건질 만한 도량이 있었다.'
왕건에 대한 이야기 중 가장 정확하게 기록된 것은 그의 청년기 이후의 삶이다.
그가 청년으로 성장한 900년을 전후한 한반도 상황은 한 마디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란기였다. 신라는 진성여왕대에 이르러 국력이 극도로 쇠약해져,
국가의 통치력이 약화되고 재정이 바닥나 매일같이 백성들에게 세금을
독촉하고 있었다. 그러자 전국 각지에서 농민반란이 일어나고 도처에 도둑이
들끓어 민간경제는 극한으로 치닫게 된다.
8세기 말부터 간헐적으로 일어나던 농민봉기는 9세기에는 무장투쟁으로
발전했고 세기 말엽에는 농민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전국적인 농민봉기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왕건이 청년으로 성장한 10세기 초에 이르자 신라는 완전히
통치권을 상실하여 궁예의 태봉과 견훤의 후백제에 대부분의 영토를 내주고
경주 주변만을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이 시대를 흔히
'후삼국시대'라고 일컫는다.
후삼국 시대는 궁예와 견횐이 각각 태봉과 후백제를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태봉을 세운 궁예는 신라의 왕족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정권 경쟁에서
밀려난 세력이라 신라 왕실로부터 철저하게 배척을 당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궁예는 세속의 전력을 포기하고 일찌감치 세달사(世達쑤)로 출가하여
중이 되었다. 하지만 신라의 국력이 쇠약해져 곳곳에서 반란세력들이 일어나자
그는 환속하여 권력가로서의 길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궁예가 891년(진성여왕 5년) 처음 찾아간 사람은 죽주(지금의 안성 죽산)에서
봉기한 기훤이었다. 당시 기훤은 반란군을 형성하여 경기 지역에서 막강한
세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횐은 성격이 거만하고 부하들을
함부로 다루는 인물이었다. 궁예는 이에 불만을 품고 이듬해 기횐의 부하들과 함께
양길에게 투항하였다.
양길은 당시 북원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는데,궁예가 많은 부하들을
데리고 투항해 오자 그를 환대하였고 군사를 나누어주어 북원 동쪽 지역을
공략하도록 하였다.
강원도 동쪽 지역을 맡은 궁예는 누차에 걸쳐 승전을 거듭한 끝에 894년에는
명주(지금의 강릉) 땅을 완전히 차지하였고 군사의 수도 3천5백 명에 이르렀다.
그 후에는 양길과 손을 끊고 십여 개의 군현을 점령하여 철원을 거점으로
정하였으며, 895년에는 내외의 관직을 정하고 국가체제를 갖추기 시작했다.
왕건의 부자가 궁예 밑으로 들어간 것은 이 시기쯤이었다. 왕씨 일가는 당시
송악(개성)의 대호족이었는데, 궁예의 세력이 날로 커가자 마침내 부하들을
이끌고 896년 그에게 귀순하였던 것이다.
왕건 부자의 귀순으로 궁예는 송악을 비롯한 황해도 일대를 장악하게 되었고
898년에는 거점을 철원에서 송악으로 옮겼다. 그리고 이듬해 양길과 싸워
승리함으로써 충청, 경기, 황해, 강원 등 신라 북부지역을 장악하였다.
세력이 이렇게 커지자 궁예는 마침내 901년에 고구려 부흥과 신라 타도를
표방하며 후고구려를 세우고 왕이 되었다. 그가 국호를 후고구려라고
칭하게된 것은 신라 북부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이 대부분 고구려 유민이고
신라에 대해 많은 불만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고구려라는 이름은 오래가지 못한다. 궁예는 국력이 점차 강화되자
후고구려라는 이름을 버리고 '마진'이라는 국호를 채택하였다. 또한 독자적인
연호도 사용하였으며,정부의 관제도 새롭게 편성하여 국가적인 면모를 강화한다.
궁예는 905년 도읍을 다시 철원으로 옮겼으며, 911년에는 국호를 '태봉'으로
바꾸었다. 이렇게 하여 궁예는 완전한 기틀을 갖춘 새로운 국가를 탄생시키는 데
성공했다.
태봉과 더불어 후삼국 구도를 이룬 또 하나의 세력은 견횐의 후백제였다.
견횐의 본래 성은 이씨로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일설에는 진흥왕의 후손이라는
말도 있다. 이는 그의 아버지 아자개(阿慈介)가 진흥왕의 후손이라는 내용을
남기고 있는 [이제가기 李理舊펐노의 기록에 근거하고 있다.하지만 이 기록의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견횐의 성을 이씨로
보고 있다. 아자개는 상주 가은현(지금의 문경)의 농부였으나 나중에 장군이
되었으며, 견횐은 그의 장자였다. 체구가 장대하고 무예가 출중했던 그는 혼란한
정국을 틈타 세력을 형성할 요량으로 무장이 되었고 서남해안의 변방 비장으로
있으면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당시 신라는 망국적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진성여왕이 등극하면서 총신들의
횡포로 나라의 기강이 문란해지자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 세력을 형성했고
견훤도 892년 지금의 광주를 점령하여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다.
왕이 된 그는 원주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양길에게 비장 벼슬을 내리는등
초적세력을 끌어안으면서 힘을 키웠다. 그리고 마침내 900년에
지금의 전주를 도읍으로 정하고 국호를 후백제라 하였다.
궁예와 견횐이 각각 태봉과 후백제를 세움으로써 한반도는 이른바
후삼국시대로 접어들었다.
후삼국 구도 속에서 신라는 점차 멸망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천년을 지배한 신라 왕족의 영향력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나라는 비록
망해가고 있었지만 백성들은 여전히 신라의 왕을 그들의 왕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민심은 후삼국 구도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후삼국시대는 견횐이 나라를 세운 892년부터 고려가 재통일을 이룩한936년까지
약 44년간 지속된다.
후삼국 초기의 주도세력은 후백제였다. 후백제는 나주 지역을 제외한 전라도
전 지역과 경상도의 진주, 합천 등 서남부지역, 그리고 동으로는 상주, 북으로는
청주 및 공주에 이르기까지 영토를 확장시켰다.
후백제가 이처럼 곡창지대를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한 데 반하여 태봉은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충청 북부 등의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이는
견훤이 정규군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한 데 비해 궁예는 초적의 무리와 지방
호족을 연합한 세력이었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궁예가 힘을 정비하여 후백제의 곡창지대를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판세는
조금씩 변해갔다. 궁예가 후백제를 공략할 수 있었던 것은 왕건이라는 뛰어난
장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건은 병법에 밝았을 뿐만 아니라 덕망이 높고
추종자도 많았다. 왕건의 뛰어난 성품은 백성들에게 좋은 평가를 얻었고 싸움에서도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그는 충주와 청주 등의 충청도 지역과 경상도의 상주를 점령하여 태봉의
세력권을 넓혔으며, 나주를 공략하여 후백제의 배후를 위협하고 중국과의 뱃길도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되자 후백제는 태봉과 신라에 의해 사방이
가로막히고 말았다. 태봉이 나주를 점령하여 후백제 세력을 위축시키자
그 공로는 왕건에게로 돌아갔고 이때부터 왕건은 궁예에 이어 명실상부한 태봉의
제2인자로 자리를 굳히게 된다.
(저자:박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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