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조선

정유재란, 순천왜성 전투 이순신 최후의 승리 장도해전(獐島海戰) 설명

올드코난 2015. 7. 27. 21:51
반응형

사로병진작전으로 사천성 전투가 벌어지던 때에 순천 왜성에서 전투가 벌어진다. 하지만, 실재로는 육지에서 전투는 벌어지지 않고 바다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를 장도해전이라고 한다. 정리해 본다.

정유재란, 순천왜성 전투 혹은 왜교성 전투(倭橋城 戰鬪)와 이순신 장군 최후의 승리 장도해전(獐島海戰) 설명


1. 풍신수길의 사망과 왜의 철군 결정

1598년 8월 18일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직후 고부교(奉行)과 고다이로(大老)는 일본군의 철병을 결정한다.


2. 사로병진작전

풍신수길의 사망과 철군 소식이 조선 조정에 알려지고 조·명 연합군은 철병하는 왜군을 추격하는 것으로 전략을 변경한다.

1598년 7월 경략(經略) 형개(邢驚)가 한성으로 당도하고 명군은 조선군과 함께 울산왜성에 주둔한 가토 기요마사 군을 공격목표로 한 동로군과, 사천왜성의 시마즈 요시히로 군을 공격목표로 한 중로군, 왜교성의 고니시 유키나가 군을 공격목표로 한 서로군을 편성 동시에 남진한다.

그리고 진린의 명나라 수군과 이순신의 조선 수군을 하나로 묶어서 수로군을 따로 편성한 다음 순천왜교성을 함께 공격하도록 하는 작전계획을 수립한다.

육상의 삼로군과 수로군을 동시에 병진하게 하여 일본군을 공격한다는 사로병진작전(四路竝進作戰)을 세운 것이다.


3. 왜군이 강력한 저항

조명연합군은 9월부터 왜군의 상호간의 구원전략을 근본적으로 차단하면서 남해안 일대의 왜군에 대해 일제히 공격을 개시한다. 명의 장수 마귀가 지휘하는 동로군은 가토 기요마사의 울산왜성의 저항에 사실상 패하고, 이여매가 지휘하는 사천왜성 또한 명의 장수 동일원(董一元)의 조급한 작전으로 패퇴해 결국 사로병진작전은 사실상 실패로 돌아간다.


4. 서로군 순천왜성 전선 구축

이때 서로군의 제독 유정은 8월에 들어와 한양을 출발 수원을 경유, 전주로 내려온 후 순천 왜교성을 치기로 한다. 9월 19일 도원수 권율과 전라병사 이병악 등이 이끄는 1만여명의 조선군을 포함, 3만 6,000의 병력으로 왜교성 공격을 준비한다.

그리고, 1598년 7월 16일 고금도에서 명나라의 진린이 이끄는 수군과 합세한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이 합세한 수로군은 7월 24일 조명연합 함대를 편성 흥양의 절이도 해전(折爾島海戰)에서 승리 후, 9월 하순에 마침내 조-명연합육상군과 연합 전선을 구축하게된다.



5. 장도해전 직전 상황

이때 명나라 육군 총사령관은 유정이고, 해군 제독은 진린이었다. 조선 수군은 이순신 장군이 지휘를 하고 있었다. 조선의 육군은 권율이 지휘하지만, 실재 모든 군사는 유정이 지휘를 할 권한을 갖고 있었다.

문제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뇌물에 매수된 유정은 최선을 다해 싸우려 하지 않게된다.

결국 육군의 도움없이 이순신과 진린의 수군만이 단독으로 왜교성을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6.장도해전 진행 과정

1598년 10월 14일 조명 연합 수로군은 고금도 덕동 진지에서 출발 10월 19일 순천 예교성 바로 앞에 도착해 공격을 개시한다. 장도에는 왜군의 군량미 창고가 있었다. 이순신은 장도에 상륙해 군량미를 배에 실을 수 있는 만큼 싣고 나머지는 태워 버렸다. 그리고 21일까지 왜의 수군에 공격을 계속하고 왜의 수군은 차마 바다로 나오지 못하고, 성안에서 방어만 한다.

이 지역은 수심이 얕은 지역이라 조선의 함대가 기동하기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10월31일 수로군은 왜성 가까이로 다다가 총 공세를 시작한다.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졌는데, 조선의 사도첨사 황세득, 군관 이청일외 29명이 전사를 하고 명군도 약간의 피해를 입는다.

11월 1일 야간부터 다음날 11월2일까지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데, 매수된 유정의 명군이 합동작전을 제대로 하지 않았고, 명의 제독 진린은 지휘를 제대로 못해 명나라 수군이 큰 피해를 입게 된다. 11월 4일 유정의 서로군은 순천으로 후퇴를 하고, 수로군은 11월 6일 고금도 수군 진지로 복귀한다.


7.장도해전 결과

이 전투에서 30여 척의 왜선을 격침시키고, 11척을 나포했다. 왜군 3,000명을 무찔렀다. 하지만 조명 연합 수로군의 피해도 컸다. 명나라 전선 30척이 격침당하고, 명 수군 2,000명이 전사했다. 조선수군의 피해 상황은 왜군에게 포위된 명군을 구하러 가던 사도 첨사 황세득과 군관 이청일, 휘하의 조선군 130명도 전사했다. 전투 규모에 비해 조선 수군의 피해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8.장도해전의 의미

장도해전은 사실상 이순신장군의 마지막 승리였다.

조명 연합군 전체로 보면 승리라고 하기에는 명의 수군의 피해가 컸었지만 조선 수군 입장에서는 분명 승리라고 말할 상황이었다.

이후 노량해전이 있지만, 노량해전은 철수하는 왜군을 상대로 벌어진 조선과 왜의 최후의 전투였고, 이순신 장군이 전사를 하고 조선 수군의 피해도 컸다. 왜군의 상당수가 피해를 보기는 했지만, 철수를 했기에, 노량해전은 승리했다고 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 그래서 장도해전이 사실상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승리였다고 보는 것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