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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궁궐 창덕궁, 원형이 잘보존된 세계문화유산 사적 제122호 창덕궁 둘러 보기

올드코난 2016. 3. 27.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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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昌德宮)은 경복궁의 동쪽에 있어 조선 시대에는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東闕)이라 불렀다. 창덕궁은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중요한 고궁이며, 창덕궁 후원은 한국의 유일한 궁궐후원이라는 점과 한국의 정원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1997년에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창덕궁에 대해 정리해 본다.

조선의 궁궐 창덕궁, 원형이 잘보존된 세계문화유산 사적 제122호 창덕궁 설명


1.개요

창덕궁은 고려 시대 궁궐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개성의 송악산의 만월대처럼 자연 지형에 맞추어 산자락에 지어졌다. 창덕궁은 정궁인 경복궁보다 오히려 더 많이 쓰인 궁궐인데 경복궁이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다시 지어졌고, 1868년 경복궁이 다시 지어질 때까지 경복궁의 역할을 대체하여 임금이 거처하며 나라를 다스리는 정궁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많은 부분이 의도적으로 훼손되었지만 조선 후기에 그린 《동궐도》와 1900년에 그려진 《동궐도형》을 참조해 복원이 진행중이다.


2. 역사

태종 5년(1405년) 경복궁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궁궐로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조선 건국후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후 정종 시가 다시 개경으로 옮겼다가 정종에게서 양위받은 태종이 재위 5년(1405년)에 다시 한양으로 환도하면서, 정궁인 경복궁을 비워두고 경복궁 동쪽 향고동에 궁궐을 새로 지었는데 이 궁이 '창덕궁'이다.그리고 1408년 태조는 이 궁에서 죽었다. 태종 11년(1411년)에 진선문과 금천교, 이듬해에 돈화문에 이어 여러 전각이 차례로 들어서면서 창덕궁은 점차 궁궐의 모습을 갖추어갔다. 태조와 태종을 비롯해 여러 임금이 경복궁을 기피헤 창덕궁이 그 자리를 대신할 때가 많았고 특히, 1592년 임진왜란 발발후 경복궁이 불타 버리고, 창덕궁을 보수해 이후 임금들이 이곳 창덕궁에서 정무를 보게 되면서 창덕궁은 조선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임금이 거처한 궁궐이었다.

인조반정후 인조가 여러 정자와 연못을 조성하고 숙종 30년(1704년) 12월에 대보단이 조성되었고 정조는 인정전에 품계석을 세우고 후원에 부용지를 중심으로 부용정, 주합루, 서향각을 세우고, 국내외 서적을 보관하기 위해 열고관, 개유와, 서고를 지었으며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는 의두합과 연경당을 지어 오늘날의 후원 모습을 완성했다. 헌종시기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를 건설했고, 조선 말기 서구의 문물을 도입하면서 창덕궁에서도 서양식의 전등이나 차고가 설치되기도 했다. 대한제국 시기인 1907년에는 순종이 즉위 후 이곳으로 옮겨 황궁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 돈화문 앞에 도로가 생겨 창덕궁과 종묘가 갈라졌고 주요 전각 외의 여러 건물이 대부분 헐리는 등 일제에 의해 궁궐이 크게 훼손되었다.

해방 이후에 창덕궁은 한동안 그대로 방치되었고 주변에는 민가와 학교, 대형 건물이 들어섰다. 그러다 1990년대 이후 복원 작업이 진행되어 1997년에는 조형미와 주변환경과의 조화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3. 구조

창덕궁은 크게 인정전과 선정전을 중심으로 한 치조(治朝) 영역, 희정당과 대조전을 중심으로 한 침전 영역, 동쪽의 낙선재 영역, 그리고 북쪽 언덕 너머 후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창덕궁은 북쪽으로 산을 등지고 14만 5천여 평의 산자락에 자리 잡았으며, 북쪽 응봉의 지형에 따라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과 정전인 인정전, 편전인 선정전 등 각 건물이 일정한 체계 없이 자유롭게 배치되어 있어 평지에 세운 경복궁과 대비된다. 풍수 사상에 따라 뒤에는 북악산 매봉이 있고 앞으로는 금천이 흘러 배산임수를 이루고 있다. 또 궁궐의 앞쪽에는 공적인 공간을 두고 뒤쪽에는 사적인 공간을 두는 전조후침(前朝後寢)의 원칙에 따라 궁궐 앞에는 공적인 공간으로 궁궐의 으뜸 건물인 인정전, 임금의 집무실인 선정전, 임금을 보좌하는 여러 관청인 궐내각사(闕內各司)가 자리 잡고 있고, 뒷부분에는 임금과 왕실의 사적인 공간인 임금과 왕비의 처소가 있다.

선정전, 희정당, 낙선재 등 임금의 거처는 외부에서 침입하기 어렵도록 여러 겹의 건물과 마당으로 사방을 에워싼 소위 '구중궁궐'(九重宮闕)의 모습이다. 또 중희당, 연영합 등 세자의 거처는 '동궁(東宮)', 수강재와 같은 대비의 거처는 '동조'(東朝)라 하여 옛 법도에 따라 이들의 처소는 궁궐 동쪽에 두었다.


4. 부속 건물

(1) 돈화문(敦化門)

창덕궁의 정문으로 조선 태종 12년(1412년)에 처음 세워졌고 지금의 돈화문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선조 40년(1607년)에 재건하여 원년에 완공한 것이다. 이때의 모습이 현재까지 남아있어, 돈화문은 현존하는 궁궐 정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문으로 유일하게 정면이 5칸 규모로 되어 있다. 1963년에 대한민국의 보물 제383호로 지정되었다.

(2) 금천교

창덕궁의 금천(錦川)은 궁궐을 드나드는 관리들이 맑고 바른 마음으로 나랏일을 살피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금천교(禁川橋)는 태종 11년(1411년)에 세워진 것으로 조선 궁궐에 남아있는 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돌다리이다. 2012년 3월 2일 보물 제1762호로 지정되었다.

(3) 낙선재

낙선재(樂善齋)는 헌종 13년(1847년)에 중건된 창덕궁의 건물로, 이 일대에는 숙종, 정조, 헌종 때에 지어진 소박한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낙선재는 창덕궁의 동남쪽과 창경궁이 연결되는 부근에 자리 잡고 있는데, 궁궐지(宮闕志)에는 창경궁에 속한 건물로 기록되어 있다. 승정원일기와 낙선재 상량문(上樑文)에는 헌종 13년(1847년)에 낙선당 옛터에 건물을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낙선재는 헌종이 후궁이었던 경빈 김씨를 위해 지은 것으로 헌종은 낙선재에서 경빈김씨는 석복헌에 머물렀다고 지내진다. 여기서 낙선재의 의미는 선한일을 즐겨한다는 의미이고 석복헌은 복을 준다는 뜻으로 후사를 기원하는 의미라고 한다. 1926년 순종이 승하하자, 계후인 순정효황후(윤황후)가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고, 이방자도 이곳에서 살다가 1989년에 죽었다.

(4) 인정문(仁政門)과 인정전(仁政殿)

인정문(仁政門)을 통해 인정전 마당으로 들어서면 세 단의 월대 위에 서 있는 인정전(仁政殿)이 보인다. 인정전은 태종 5년(1405년)에 창덕궁이 창건되면서 세워졌으나 몇 차례 화재가 일어나 다시 지어졌다.[29] 지금 있는 건물은 순조 3년(1803년)에 불탄 것을 이듬해에 다시 지은 것이다.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仁政殿)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 팔작지붕 건물로, 밖에서 보면 2층이지만 내부는 천장이 높아 통칸으로 트인 1층 건물이다. 인정전은 궁궐에서 으뜸되는 건물로 궁궐의 권위를 나타내는 동시에 의식을 치르는 공간이었으므로, 외관이 주는 상징성에 초점이 맞추어 크고 높고 화려하게 지었다. 내부에는 임금의 자리인 어좌(御座)가 있고, 그 뒤로는 임금이 다스리는 삼라만상을 상징하는 병풍인 일월오봉도가 둘러쳐 있다. 어좌 위에는 보개(寶蓋)라 하여 별도의 천장을 설치하여 어좌의 공간적 차별성을 극대화하였다. 또 인정전의 천장 한가운데는 봉황을 조각하여 이곳이 임금의 공간임을 나타내고 있다. 1908년 무렵에 내부에 서양식 가구와 실내 장식이 도입되어 전돌 바닥 대신 서양식 마루를 깔았고 전등이 설치되었다. 또한 각 창과 문에는 커튼이 달려 있다. 1405년 처음 지어졌다가 1418년 다시 지어졌다. 이 후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10년 중건하였으나, 1803년 다시 소실되어 이듬해에 재건하였다. 1985년 1월 8일 국보 제225호로 지정되었다.

(5) 그 외 선정전, 희정당, 대조전, 등 창덕궁 내부는 볼거리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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