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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국사 65

韓國史(한국사) 연대표 기원후 AD 500년부터 799년까지

韓國史(한국사) 연대표 (기원후 AD 500년부터 799년까지 한국의 역사 연대표 정리) 500년 신라, 소지마립간 죽고(?~), 지증왕(智證王) 즉위(~514).501년 위사좌평(衛士佐平) 백가가 동성왕 살해(?~), 무령왕(武寧王) 즉위(~523).503년 신라, 국호를 신라(新羅), 존호를 왕(王)이라 함.512년 신라, 이사부(異斯夫)가 우산국(于山國)을 침.514년 신라, 아시촌(阿尸村)에 소경(小京) 설치.519년 고구려, 문자명왕 죽고(?~), 안장왕(安藏王) 즉위(~531).520년 신라, 율령(律令) 반포.521년 가야, 겸지왕 죽고(?~), 구형왕(仇衡王) 즉위(~532).523년 백제, 무령왕 죽고(462~), 성왕(聖王) 즉위(~554).527년 신라, 이차돈(異次頓) 순교.531년..

역사/국사 2017.04.16

한국사 (韓國史) 연대표 기원 후 AD 0 ~ 499년까지

韓國史(한국사) 연대표 (AD 0 ~ 499년까지까지 한국의 역사 연대표 정리)[기원 후 AD]3년 고구려, 졸본(卒本)에서 국내성으로 천도.4년 신라, 혁거세거서간 죽고(BC 69~),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즉위.8년 백제, 마한(馬韓)을 멸하고 병합.14년 고구려, 양맥(梁貊)을 멸하고, 한(漢)의 고구려현을 공격. 신라, 병선 100여 척으로 왜구 격퇴.15년 백제, 봄~여름에 대기근 발생.18년 백제, 탕정성(湯井城)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을 축조. 고구려, 유리왕 죽고(?~), 대무신왕(大武神王) 즉위.22년 고구려, 부여를 공격하여 대소왕(帶素王)을 죽임. 부여, 대소왕의 동생을 옹립하여 갈사국(曷思國)을 건국.24년 신라, 남해차차웅 죽고(?~), 유리이사금(瑠璃尼師今) 즉위.26년 고구려..

역사/국사 2017.04.16

한국사 연대표 (기원전 BC)

韓國史(한국사) 연대표 선사 시대부터 기원전 BC 1년까지 한국의 역사 연대표 정리[기원전 BC]10000년 중석기문화 형성. 공주 석장리유적의 단구(段丘) 제1문화층과 단구 제3문화층. 욕지도(欲知島)유적지 등의 세석기 제작6000년 전기 신석기문화 형성. 빗살무늬토기Ⅰ류 제작사용. 부산 동삼동유적 하층 형성.5000년 서울 암사동유적 형성.4000년 웅기 굴포리˙서포항 유적 하층의 제1기 및 제2기 문화층, 온천 궁산리유적 하층 문화 등 형성.3500년 중기 신석기문화 형성. 빗살무늬토기Ⅱ류. 웅기 굴포리˙서포항 유적 제3˙4˙5기 문화층, 평양 금탄리유적 제1˙2문화층 등 형성. 부산 동삼동유적 4층 두도기 형성.3000년 웅기 굴포리˙서포항 유적 제6문화층, 평양 금탄리유적 제3문화층, 회령 오동..

역사/국사 2017.04.16

고려 왕규의 난, 왕식렴과 정종(왕요)의 음모가 아닐까

승자의 왜곡된 역사의 기록. 고려 왕규의 난, 왕식렴과 정종(왕요)의 음모가 아닐까 -우선 역사에 기록된 내용을 정리해 본다. 1.왕규의 음모왕규는 고려 초기 광주(廣州)의 대호족으로, 양근 함씨였으나 개국공신으로 왕씨 성을 하사 받게 된다. 고려 태조 당시 벼슬이 대광(大匡)에 이르렀다. 태조는 왕규의 두 딸을 맞아들여 제15비(妃)와 제16비를 삼았다. 제16비가 아들을 낳았는데 광주원군(廣州院君)이었다. 서기 945년 혜종 2년 왕규는 2대 임금 혜종(惠宗)에게 동생 요(窯)와 소(昭)가 딴 마음을 품고 있다 무고한다. 혜종은 거짓말임을 알고 더욱 동생들을 사랑하였다고 전한다.점복(占卜)에 밝은 최지몽(崔知夢)이 하늘의 별을 보고 나라에 역적이 일어나겠다 하니 임금은 왕규가 자기 동생들을 해치려는 ..

역사/국사 2015.03.12

고려사) 2. 궁예의 몰락과 왕건의 고려 건국

2. 궁예의 몰락과 왕건의 고려 건국 시간이 흐르면서 후삼국 구도는 완전히 굳혀지는 듯하였다. 하지만 태봉에서 내분이 일어나 이들간의 관계는 다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왕건의 활약으로 태봉은 후삼국 구도를 주도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왕건의 지위도 점차 격상되어 913년에는 파진찬 겸 시중으로 임명되었다. 왕건의 지위가 시중에 이르자 주변에는 그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생겨났다. 궁예는 변덕이 심한 편이었고 성격도 포악했다. 왕건은 궁예의 그런 성격이 언젠가는 자신에게 칼을 겨누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위기감을 느낀 왕건은 궁예에게 변방으로 보내줄 것을 청하였다. 변방에 나가 있는 것이 중앙에 있는 것보다는 안전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변방을 다니며 세력을 형성한 장군이었기 때문에 적..

역사/국사 2010.07.22

고려사) 1.왕건의 출생과 성장

1.왕건의 출생과 성장 아버지가 (송9오개성)의 호족이며 궁예가 세운 태봉(奉封)국 신하였다는 사실 이외에 왕건의 조상들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려진 이야기는 거의 없다. 다만 조선 문종대에 정인지 등이 139권으로 편찬한 '고려사'에 고려 '태조실록' 에서 발췌한 3대 조상들의 추존 묘호가 전해지고 있는 정도다. 고려를 세운 후 왕건은 증조부를 원덕대왕,증조모를 정화왕후,조부를 의조 경강대왕,조모를 원창왕후,부친을 세조 위무대왕,모친을 위숙왕후로 추존했다는 내용이 그들에 대한 모든 기록이다. 다만 고려 의종 때 인물인 김관의의 [편년통록 編고舊]에 실린 그들에 얽힌 민담들이 함께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는 왕전의 탄생설화도 실려 있는데, 이 이야기에는 신라말 도참사상 으로 유명했던 승려 도선(舊料)이..

역사/국사 2010.07.22

한국사) 高麗史 고려사 연표 (한문)

高麗史 고려사 연표 (한문) #高麗史86卷-表 表卷第一. 高麗史八十六. 正憲大夫工曹判書集賢殿大提學知 經筵春秋館事兼成均大司成臣鄭麟趾奉 敎修. #高麗史86卷-表1-年表 年表一. #高麗史86卷-表1-年表 高麗太祖降羅滅濟盡有三韓之地子孫傳守世通上國傳世凡三十二王歷年幷僞辛共四百七十五歲其始終有可考焉作年表. #高麗史86卷-表1-年表 ------------------------------------------------------------------------------- 西曆 干支 上 國 高 麗 ------------------------------------------------------------------------------- 918 戊寅 後梁末帝貞明四年 太祖 契丹太祖神冊三年 天授元年 -------------..

역사/국사 2010.07.09

한국사) 단군 신화에 대한 자교 글들, 단군의 어원

단군 신화 환인(하느님)의 아들 환웅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농경 생활에 밀접한 관계가 있는 바람, 비, 구름을 각각 주관하는 부하 3천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에 내려와 신시 를 열고, 곡식, 생명, 형벌 등 인간에게 필요한 360여가지를 주관하며 사람들을 다스렸다. 그 러던 중, 그곳에 살던 곰이 사람이 되기를 원하므로, 곰을 여자로 변하게 하고 그와 혼인하 여 아들을 낳았으니, 이가 곧 단군 왕검이다. 단군 왕검은 기원전 2333년에 아사달에 도읍 을 정하고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삼국유사 中에서 古代國家의 출현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 실린 단군 신화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천제인 환인의 아들 환웅이 인간 세상에 뜻을 두거늘, 환인이 내려다보니 삼위산과 태백산 이 사상..

역사/국사 2010.07.08

삼국사기(三國史記) 원본 – 제 50편 끝

三國史記 卷 第五十 完 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守太保門下侍中判尙書事兼吏禮部事賢殿太學士監修國史上柱國致仕臣金富軾奉 宣撰 列傳 第十 (弓裔 甄萱) 弓裔 新羅人 姓金氏 考第四十七憲安王誼靖 母憲安王嬪御 失其姓名 或云 四十八景文王膺廉之子 以五月五日生於外家 其時屋上有素光 若長虹 上屬天 日官奏曰 此兒以重午日生 生而有齒 且光焰異常 恐將來不利於國家 宜勿養之 王勅中使 抵其家殺之 使者取於襁褓中 投之樓下 乳婢竊捧之 誤以手觸 其一目 抱而逃竄 勞養育 年十餘歲 遊戱不止 其婢告之曰 子之生也 見棄於國 予不忍 竊養以至今日 而子之狂如此 必爲人所知 則予與子俱不免 爲之奈何 弓裔泣曰 若然則吾逝矣 無爲母憂 便去世達寺 今之興敎寺是也 祝髮爲僧 自號善宗 及壯不拘檢僧律 軒 有膽氣 嘗赴齋 行次有烏鳥銜物 落所持鉢中 視之 牙籤書王字 則秘而不言..

역사/국사 2010.06.30

삼국사기(三國史記) 원본 – 제 49편

三國史記 卷 第四十九 列傳 第九 (倉助利 蓋蘇文) 倉助利 高句麗人也 烽上王時爲國相 時慕容 爲邊患 王謂 臣曰 慕容氏兵强 屢犯我疆 爲之奈何 倉助利對曰 北部大兄高奴子賢且勇 大王若欲禦寇安民 非高奴7子無可用者 王以爲新城太守 慕容 不復來 九年秋八月 王發國內丁男年十五已上 修理宮室 民乏於食 困於役 因之以流亡 倉助利諫曰 天災 至 年穀不登 黎民失所 壯者流離四方 老幼轉乎溝壑 此誠畏天憂民 恐懼修省之時也 大王曾是不思 驅飢餓之人 困木石之役 甚乖爲民父母之意 而況比 有强梗之敵 若乘吾弊以來 其如社稷生民何 願大王熟計之 王 曰 君者百姓之所瞻望也 宮室不壯麗 無以示威重 今相國蓋欲謗寡人 以干百姓之譽也 助利曰 君不恤民 非仁也 臣不諫君 非忠也 臣旣承乏國相 不敢不言 豈敢干譽乎 王笑曰 國相欲爲百姓死耶 冀無後言〔後 恐作復〕 助利知王之不悛 退與 臣謀廢之..

역사/국사 2010.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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