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근현대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2

올드코난 2010. 7. 10.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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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김구선생 일대기

        


머리말 - , 신 두 어린 아들에게

 

  아비는 이제 너희가 있는 고향에서 수륙 오천리나 떨어진 먼 나라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어린 너희를 앞에 놓고 말하여 들려 줄 수 없으매 그동안 나의 지난 일을

대략 기록하여서 몇몇 동지에게 남겨 장래 너희가 자라서 아비의 경력을 알고 싶어할

때가 되거든 너희에게 보여 주라고 부탁하였거니와, 너희가 아직 나이 어리기 때문에

직접 말하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지만 어디 세상사가 뜻과 같이 되느냐.

  내 나이는 벌써 쉰 셋이언마는 너희는 이제 열 살과 일곱 살밖에 안 되었으니

너희의 나이와 지식이 자라질 때에는 내 정신과 기력은 벌써 쇠할 뿐 아니라, 이 몸은

이미 원수 왜에게 선전포고를 내리고 지금 사선에 서 있으니 내 목숨을 어찌 믿어

너희가 자라서 면대하여 말할 수 있을 날을 기다리겠느냐. 이러하기 때문에 지금 이

글을 써 두려는 것이다.

  내가 내 경력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기는 것은 결코 너희에게 나를 본받으라는

뜻은 아니다.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바는 너희도 대한민국의 한 국민이니 동서와

고금의 허다한 위인 중에서 가장 숭배할 만한 이를 택하여 스승으로 섬기라는 것이다.

너희가 자라더라도 아비의 경력이 알 길이 없겠기로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이다.

  다만 유감되는 것은 이 책에 적는 것이 모두 오랜 일이므로 잊어버린 것이 많은

것은 사실이나, 하나도 보태거나 지어 넣은 것이 없는 것도 사실이니 믿어 주기를

바란다.

                                 - 대한민국 11 5 3일, 중국 상해에서 아비

 

 1. 우리 집과 내 어릴 적

 

  우리는 안동 김씨 경순왕의 자손이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이 어떻게 고려

왕 건 태조의 따님 낙랑공주의 부마가 되셔서 우리들의 조상이 되셨는지는

"삼국사기"나 안동 김씨 족보를 보면 알 것이다.

  경순왕의 팔세 손이 충렬공, 충렬공의 현손이 익원공인데, 이 어른이 우리 파의

시조요, 나는 익원공의 21대 손이다. 충렬공, 익원공은 다 고려조의 공신이거니와

이조에 들어와서도 우리 조상은 대대로 서울에 살아서 글과 벼슬로 가업을 삼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리 방조 김자점이 역적으로 몰려서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매 내게

11대조 되시는 어른이 처자를 끌고 서울을 도망하여 일시 고향에 망명하시더니,

그곳도 서울에서 가까워 안전하지 못하므로 해주 부중에서 서쪽으로 80리 백운방 텃골

팔봉산 양가봉 밑에 숨을 자리를 구하시게 되었다. 그곳 뒷개에 있는 선영에는 11

조부모의 산소를 비롯하여 역대 선산이 계시고 조모님도 이 선영에 모셨다.

  그때에 우리 집이 멸문지화를 피하는 길은 오직 하나 뿐이었으니, 그것은 양반의

행색을 감추고 상놈 행색으로 묵은장이를 일구어 농사를 짓다가 군역전이라는 땅을

짓게 되면서부터 아주 상놈의 패를 차게 되었다. 이 땅을 부치는 사람은 나라에서

부를 때에는 언제나 군사로 나서는 법이니, 그때에는 나라에서 문을 높이고 무를

낮추어 군사라면 천역 즉 천한 일이었다. 이것이 우리 나라를 쇠약하게 한 큰 원인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리하여 우리는 판에 박힌 상놈으로, 텃골 근동에서 양반

행세하는 진주 강씨, 덕수 이씨들에게 대대로 천대와 제압을 받아왔다. 우리 문중의

딸들이 저들에게 시집가는 일은 있어도 우리가 저들의 딸에게 장가든 일은 없었다.

  그러나 중년에는 우리 가문이 꽤 창성하였던 모양이어서 텃골 우리터에는 기와집이

즐비하였고 또 선산에는 석물도 크고 많았으며 내가 여남은 살 적까지도 우리 문중에

혼상대사가 있을 때에는 이정길이란 사람이 언제나 와서 일을 보았는데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집의 종으로서 속량받은 사람이라 생각하니, 그는 우리 같은 상놈의 집에

종으로 태어났던 것이라, 참으로 흉악한 팔자라고 아니할 수 없다.

  우리가 해주에 와서 산 뒤로 역대를 상고하여 보면 글하는 이도 없지 아니하였으나

이름난 이는 없었고 매양 불평객이 많았다. 내 증조부는 가어사질을 하다가 해주

영문에 갇혔지만 서울 어느 양반의 청편지를 얻어다 대고 겨우 형벌을 면하셨다는

말을 집안 어른들께 들었다. 암행어사라는 것은 임금이 시골 사정을 알기 위하여

신임하는 젊은 관원에게 무서운 권세를 주어서 순회시키는 벼슬인데, 허름한 과객의

행색을 차리고 다니는 것이 상례이다.

  증조항렬 네 분 중에 한 분은 내가 대여섯 살 때까지 생존하셨고 조부 형제는

구존하셨고 아버지 4형제도 다 살아 계시다가 백부 백영은 얼마 아니하여 돌아가셔서

나는 다섯 살 적에 종형들과 함께 곡하던 것이 기억된다.

  아버지 휘 순영은 4형제 중에 둘째 분으로서, 집이 가난하여 장가를 못 가고

노총각으로 계시다가 24세 때에 삼각혼인이라는 기괴한 방법으로 장연에 사는 현풍

곽씨의 딸, 열네 살 된 이와 성혼하여 종조부 댁에 붙어 살다가 2, 3년 후에 독립한

살림을 하시게 된 때에 내가 태어났다. 그때 어머님의 나이는 열 일곱이요, 푸른

밤송이 속에서 붉은 밤 한 개를 얻어서 감추어 둔 것이 태몽이라고 어머니는 늘

말씀하셨다.

  병자년 7 11(이 날은 조모님 기일이었다) 자시에 텃골에 있는 웅덩이 큰

댁이라고 해서 조부와 백부가 사시는 집에서 태어난 것이 나다. 내 일생이 기구할

예조였는지, 그것은 유례가 없는 난산이었다. 진통이 일어난 지 6, 7일이 되어도 순산은

아니되고, 어머님의 생명이 위태하게 되어 혹은 약으로, 혹은 예방으로 온갖 시험을

다해도 효험이 없어서, 어른들의 강제로 아버지가 소의 길마를 머리에 쓰고 지붕에

올라가서 소의 소리를 내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나왔다고 한다. 겨우 열 일곱 살

되시는 어머님은 내가 귀찮아서 어서 죽었으면 좋겠다고 짜증을 내셨다는데, 젖이

말라서 암죽을 먹이고 아버지가 나를 품속에 품고 다니시며 동네 아기 있는 어머니

젖을 얻어 먹이셨다. 먼 촌 족대모 핏개댁이 밤중이라도 싫은 빛 없이 내게 젖을

물리셨단 말을 듣고 내가 열 살 갓 넘어 그 어른이 작고하신 뒤에는 나는 그 산소

앞을 지날 때마다 경의를 표하였다. 내가 마마를 치른 것이 세 살 아니면 네 살

적인데 몸에 돋은 것을 어머니가 예사 부스럼 다루듯 죽침으로 따서 고름을

빼었으므로 내 얼굴에 굵은 벼슬 자국이 생긴 것이다.

  내가 다섯 살 적에 부모님은 나를 데리고 강령 삼거리로 이사하셨다. 거기는 뒤는

산이요, 앞은 바다였다. 종조, 재종조, 삼종조, 여러 댁이 그리로 떠나가시기 때문에

우리 집도 따라간 것이었다. 여기서 이태를 살았는데 우리 집이 어떻게나 호젓한지

호랑이가 사람을 물고 우리 문전으로 지나갔다. 산 어귀 호랑이 길목에 우리 집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밤이면 한 걸음도 문 밖에는 나가지 못하였다. 낮이면

부모님은 농사하러 나가시거나 혹은 바다에 무엇을 잡으러 가시고, 나는 거기서 그 중

가까운 신풍 이생원 집에 가서 그 집 아이들과 놀다가 오는 것이 일과였다. 그 집

아이들 중에는 나와 동갑 되는 아이도 있었으나 두세 살 위 되는 아이들도 있었다.

애들이 '이놈 해줏놈 때려 주자'고 공모하여, 나는 무지하게 한 차례 매를 맞았다. 나는

분해서 집으로 돌아와 부엌에서 큰 식칼을 가지고 다시 이생원 집으로 가서 기습으로

그놈들을 다 찔러 죽일 생각으로 울타리를 뜯고 있는 것을 열 여덟 살 된 그 집 딸이

보고 소리소리 질러 오라비들을 불렀기 때문에 나는 목적을 달치 못하고 또 그

놈들에게 붙들려 실컷 얻어 맞고 칼만 빼앗기고 집으로 돌아왔다. 식칼을 잃은 죄로

부모님께 매를 맞을 것이 두려워서 어머니께서 식칼이 없다고 찾으실 때에도 나는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또 하루는 집에 혼자 있노라니까 엿장수가 문전으로 지나가면서,

  "헌 유기나 부러진 수저로 엿들 사시오." 하고 외쳤다.

  나는 엿을 먹고 싶으나 엿장수가 아이들의 자지를 잘라 간다는 말을 어른들께 들은

일이 있으므로 방문을 꽉 닫아 걸고 엿장수를 부른 뒤에 아버지의 성한 숟가락을 발로

디디고 분질러서 반은 두고 반만 창구멍으로 내밀었다. 헌 숟가락이라야 엿을 주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엿장수는 내가 내어미는 반 동강 숟가락을 받고 엿을 한 주먹

뭉쳐서 창구멍으로 들이 밀었다. 내가 반 동강 숟가락을 옆에 놓고 한창 맛있게 엿을

먹고 있을 즈음에 아버지께서 돌아오셨다. 나는 사실대로 아뢰었더니, 다시 그런 일을

하면 경을 치겠다고 꾸중만 하시고 때리지는 아니하였다.

(다음페이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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