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근현대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5

올드코난 2010. 7. 10.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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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김구선생 일대기

        


이번 과거에 나는 크게 실망하였다. 아무리 글 공부를 한댔자 그것으로 발천하여

양반이 되기는 그른 세상인 줄을 깨달았다. 모처럼 글을 잘해서 세도 있는 자제들의

대서인이나 되는 것이 상지상일 것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와서 과거에 실망한 뜻을 아뢰었더니 아버지도 내가 바로 깨달았다고

옳게 여기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 그러면 풍수 공부나 관상 공부를 하여 보아라. 풍수를 잘 배우면 명당을 얻어서

조상님네 산소를 잘 써서 자손이 복록을 누릴 것이요, 관상에 능하면 사람을 잘 알아

보아서 성인 군자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말씀을 매우 유리하게 여겨서 아버지께 청하여 "마의상서"를 빌어다가

독방에서 석달 동안 꼼짝 아니하고 공부하였다. 그 방법은 면경을 앞에 놓고 내

얼굴을 보면서 일변 얼굴의 여러 부분의 이름을 배우고 일변 내상의 길흉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내 얼굴을 관찰해 보아도 귀격이나 부격과 같은 좋은 상은 없고

천겨, 빈격, 흉격 뿐이었다. 전자에 과장에서 실망하였던 것을 상서에서나 회복하려

하였더니, 제 상을 보니 그보다도 더욱 낙심이 되었다. 짐승 모양으로 그저 살기

위해서 살다가 죽을까. 세상에 살아 있을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이렇게 절망에 빠진 나에게 오직 한 가지 희망을 주는 것은 "마의상서"중에 있는 이

구절이었다--

 

  (상호불여신호 신호불여심호)

  얼굴 좋음이 몸 좋음만 못하고, 몸 좋음이 마음 좋음만 못하다.)

 

  이것을 보고 나는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그러나 마음이 좋지

못하던 사람으로 마음이 좋은 사람이 되는 법이 무엇인가. 여기 대하여서는

"마의상서"는 아무 대답도 주지 못하였다. 이래서 상서는 덮어 버리고 지가서를 좀

보았으나 거기도 취미를 얻지 못하고, 이번에는 병서를 읽기 시작하였다. "손무자",

"오기자", "삼략", "육도" 등을 읽어 보았다. 알지 못할 것도 많으나, 장수의 재목을

말한 곳에,

 

  태산이 무너지더라도 마음을 동치 말고,

  사졸로 더불어 달고 씀을 같이 하며,

  나아가고 물러감을 범과 같이 하며,

  남을 알고 저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지지 아니하리라.

  (태산복어전 심불망동 여사졸동감고)

  (진퇴여호 지피지기 백전불패)

 

  이 구절이 내 마음을 끌었다. 이때에 내 나이가 열 일곱 살, 나는 일가 아이들을

모아서 훈장질을 하면서 잘 알지도 못하는 병서를 읽고 일년의 세월을 보냈다.

  이때에 사방에는 여러 가지 괴질이 돌았다. 어디서는 진인이 나타나서 바다에

달리는 화륜선을 못 가게 딱 잡아 놓고 세금을 받고야 놓아 주었다는 등, 머지

아니하여 계룡산에 정 도령이 도읍을 할 터이니 바른 목에 가 있어야 새 나라에

양반이 된다 하여 세간을 팔아 가지고 아무개는 계룡산으로 이사를 하였다는 등, 이러한

소리였다.

  그런데 우리 동네에서 남쪽으로 20리쯤 가서 갯골이란 곳에 사는 오응선과 그 이웃

동네에 사는 최유현이라는 사람이 충청도 최도명이라는 동학 선생에게서 도를 받아

가지고 공부를 하고 있는데, 방에 들고 나기에 문을 열지 아니하며, 문득 있다가 문득

없어지며, 능히 공중으로 걸어다니므로 충청도 그 선생 최도명한테 밤 동안

다녀온다고 하였다. 나는 이 동학이라는 것에 호기심이 생겨서 이 사람들을

찾아보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남에게 들은 말대로 누린 것, 비린 것을 끊고 목욕하고 새 옷을 입고 나섰다.

이렇게 하여야 받아준다는 것이었다. 내 행색으로 말하면 머리는 빗어서 땋아 늘이고

옥색 도포에 끈목띠를 띠었다. 때는 내가 열 여덟 살 되던 정초였다.

  갯골 오씨 집 문전에 다다르니 안에서 무슨 글을 읽는 소리가 나오는데, 그것은

보통 경전이나 시를 외우는 소리와는 달라서 마치 노래를 합창하는 것과 같았다.

공문에 나아가 주인을 찾았더니 통천관을 쓴 말쑥한 젊은 선비 한 사람이 나와서 나를

맞는다. 내가 공손히 절을 한즉 그도 공손히 맞절을 하기로, 나는 황공하여서 내

성명과 문벌을 말하고 내가 비록 성관을 하였더라도 양반댁 서방님인 주인의 맞절을

받을 수 없거늘, 하물며 편발 아이에게 이런 대우가 과도한 것을 말하였다. 그랬더니

선비는 감동하는 빛을 보이면서, 그는 동학도인이라 선생의 훈계를 지켜 빈부귀천에

차별이 없고 누구나 평등으로 대접하는 것이니 미안해 할 것 없다고 말하고 내가

찾아온 뜻을 물었다. 나는 이 말을 들으매 별세계에 온 것 같았다. 내가 도를 들으러

온 뜻을 고하니 그는 쾌히 동학의 내력과 도리의 요령을 설명하였다. 이 도는 용담

최수운 선생께서 천명하신 것이나, 그 어른은 이미 순교하셨고 지금은 그 조카님

최해월 선생이 대도주가 되셔서 포교를 하신다는 것이며, 이 도의 종지로 말하면

말세의 간사한 인류로 하여금 개과천선하여서 새 백성이 되어 가지고 장래에

진주(참진 임금주:참 임금)를 뫼시어 계룡산에 새 나라를 세우는 것이라 하는 것 등을

말하였다. 나는 한 번 들으매 심히 환희심이 발하였다. 내 상호가 나쁜 것을 깨닫고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맹세한 나에게는 하느님을 몸에 모시고 하늘도를 행하는

것이 가장 요긴한 일일 뿐더러 상놈된 한이 골수에 사무친 나로서는 동학의 평등주의가

더할 수 없이 고마웠고, 또 이씨의 운수가 다하였으니 새 나라를 세운다는 말도

해주의 과거에서 본 바와 같이 정치의 부패함에 실망한 나에게는 적절하게 들리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나는 입도할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서 입도절차를 물은 즉 쌀 한

, 백지 세 권, 황초 한 쌍을 가지고 오면 입도식을 행하여 준다고 하였다.

"동경대전", "팔편가사", "궁을가" 등 동학의 서적을 열람하고 집에 돌아왔다. 아버지께

오씨에게서 들은 말을 여쭙고 입도할 의사를 품하였더니 아버지께서는 곧 허락하시고

입도식에 쓸 예물을 준비하여 주셨다. 이렇게 하여서 내가 동학에 입도한 것이었다.

  동학에 입도한 나는 열심히 공부를 하는 동시에 포덕(전도)에 힘을 썼다.

아버지께서도 입도하셨다. 이때의 형편으로 말하면 양반은 동학에 오는 이가 적고

나와 같은 상놈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내가 입도한 지 불과 몇 개월만에

연비(포덕하여 얻은 신자라는 뜻)가 수백 명에 달하였다. 이렇게 하여 내 이름이 널리

소문이 나서 도를 물으러 찾아오는 이도 있고 내게 대한 무근지설을 전파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대가 동학을 하여 보니 무슨 조화가 나던가?"

  하는 것이 가장 흔히 내게 와서 묻는 말이었다. 사람들은 도를 구하지 아니하고

요술과 같은 조화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에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악을 짓지 말고 선을 행하는 것이 이 도의 조화이니라."

  이것이 나의 솔직하고 정당한 대답이건마는 듣는 이는 내가 조화를 감추고

자기네에게 아니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김창수(창암이라던

아이명을 이때부터 이 이름을 썼다)는 한 길이나 떠서 걸어 다니는 것을 보았노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 모양으로 있는 소리, 없는 소리 섞어 전하여서 내 명성이

황해도 일대 뿐만 아니라 멀리 평안남도에까지 퍼져서 당년에 내 밑에 연비가 무려

수천에 달하였다. 당시 황평 양서 동학당 중에서 내가 나이가 어린 사람으로서 많은

연비를 가졌다 하여 나를 아기 접주라고 별명 지었다. 접주라는 것은 한 접의 수령이란

말로서 위에서 내리는 직함이다.

  이듬해인 계사년 가을에 해월(최시형) 대도주로부터 오응선, 최유현 등에게 각기

연비의 성명 단자(명부)를 보고하라는 경통(공함이라는 뜻)이 왔으므로 황해도 내에서

직접 대도주를 찾아갈 인망 높은 도유 열 다섯 명을 뽑을 때에 나도 뽑혔다. 편발로는

불편하다 하여 성관하고 떠나게 되었다. 연비들이 내 노자를 모아 내고 또 도주님께

올릴 예물로는 해주 향목도 특제로 맞추어 가지고 육로, 수로를 거쳐서 충청도 보은군

장안이라는 해월선생 계신 데 다다랐다. 동네에 쑥 들어서니 이 집에서도 저 집에서도

 

  "지기금지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

 

  하는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리고 또 일변으로는 해월 대도주를 찾아서 오는 무리,

일변으로는 뵈옵고 가는 무리가 연락부절하고 집이란 집은 어디나 가득 찼었다.

우리는 접대인에게 우리 일행 15명의 명단을 부탁하여 대도주께 우리가 온 것을

통하였더니, 한 시간이나 지나서 황해도에서 온 도인을 부르신다는 통지가 왔다. 우리

일행 열 다섯은 인도자를 따라서 해월 선생의 처소에 이르러 선생 앞에 한꺼번에 절을

드리니 선생은 앉으신 채로 상체를 굽히고 두 손을 방바닥에 짚어 답배를 하시고 먼

길에 오느라고 수고가 많았다며 간단히 위로하는 말씀을 하셨다. 우리는 가지고 온

예물과 도인의 명단을 드리니, 선생은 맡은 소임을 부르셔서 처리하라고 명하셨다.

우리가 불원천리하고 온 뜻은 선생의 선풍도골도 뵈오려니와, 선생께 무슨 신통한

조화 줌치나 받을까 함이었으나 그런 것은 없었다. 선생은 연기가 육십은 되어

보이는데 구레나룻이 보기 좋게 났으며 약간 검게 보이고 얼굴은 여위었으나 맑은

맵시다. 크고 검은 갓을 쓰시고 동저고리 바람으로 일을 보고 계셨다. 방문 앞에 놓인

수철 화로에서 약탕관이 김이 나며 끓고 있었는데 독삼탕 냄새가 났다. 선생이

잡수시는 것이라고 했다. 방 내외에는 여러 제자들이 옹위하고 있었다. 그 중에도 가장

친근하게 모시는 이는 손응구, 김연구, 박인호 같은 이들인데, 손응구는 장차 해월

선생의 후계자로 대도주가 될 의암 손병희로서 깨끗한 청년이었고, 김은 연기가

사십은 되어 보이는데 순실한 농부와 같았다. 이 두 사람은 다 해월 선생의 사위라고

들었다. 손씨는 유식해 보이고 '천을천수'라고 쓴 부적을 보건대 글씨 재주도 있는

모양이었다.

(다음페이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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