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근현대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4

올드코난 2010. 7. 10.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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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김구선생 일대기

        


이 선생이 오신다는 날, 나는 머리를 빗고 새 옷을 갈아입고 아버지를 따라서 마중을

나갔다. 저리로서 쉰 남짓 되어 보이는 키가 후리후리한 노인 한 분이 오시는데

아버지께서 먼저 인사를 하시고 나서 날더러,

  "창암아, 선생님께 절하여라."하셨다. 나는 공손하게 너붓이 절을 하고 나서 그 선생을

우러러보니 신인이라 할지 하느님이라 할지 어떻게나 거룩해 보이는지 몰랐다.

  우선 우리 사랑을 글방으로 정하고 우리 집에서 선생의 식사를 받들기로 하였다.

그때에 내 나이가 열 두 살이었다.

  개학하기 전날 나는 '마상봉한식' 다섯 자를 배웠는데 뜻은 알든 모르든 기쁜 맛에

자꾸 읽었다. 밤에도 어머니께서 밀매가리하시는 것을 도와드리면서 자꾸 외웠다.

새벽에는 일찍 일어나 선생님 방에 나가서 누구보다도 먼저 배워서 밥그릇 망태를

메고 먼 데서 오는 동무들을 가르쳐 주었다.

  이 모양으로 우리 집에서 석 달을 지내고는 산골 신 존위 집 사랑으로 글방을

옮기게 되어서 나는 밥그릇 망태를 메고 고개를 넘어서 다녔다. 집에서 서당에

가기까지 서당에서 집에 오기까지 내 입에서는 글 소리가 끊어지는 일이 없었다.

동무들 중에는 나보다 정도가 높은 아이도 있었으나 배운 것을 강을 하는 데는 언제나

내가 최우등이었다. 이러한지 반 년 만에 선생과 신 존위 사이에 반목이 생겨서 필경

이 선생을 내보내게 되었는데 신 존위가 말하는 이유는 이 선생이 밥을 너무 많이

자신다는 것이거니와 사실은 그 아들이 둔재여서 공부를 잘 못하는데 내 공부가

일취월장하는 것을 시기함이었다. 한 번은 월강(한 달에 한 번 하는 시험) 때에 선생에

내게 조용히 부탁하신 일이 있었다. 내가 늘 우등을 하였으니 이번에는 일부러

잘못하고 선생이 뜻을 물어도 일부러 모른 체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러하오리다

하고 약속하고 그대로 하였다. 이리하여 이날은 신 존위의 아들이 처음으로 장원을

하였다. 신 존위는 대단히 기뻐서 이날 닭을 잡고 한턱을 잘 내었다. 그러나 번번이

신 존위의 아들을 장원시키지 못한 죄로 이 선생을 물러나게 하였으니 참으로 상놈의

행사라고 아니할 수 없다. 하루는 내가 아침밥을 먹기 전에 선생님이 우리 집에

오셔서 나를 불러 작별 인사를 하실 때에, 나는 정신이 아득하여서 선생님의 품에

매달려 소리를 내어 울었다. 선생님도 눈물이 비오듯 하였다.나는 며칠 동안은 밥도 잘

아니 먹고 울기만 하였다.

  그 후에도 어떤 돌림 선생 한 분을 모셔다가 공부를 계속하게 되었으나 이번에는

아버지께서 갑자기 전신불수가 되셔서 자리에 누우셨기 때문에 나는 공부를 전폐하고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되게 되었다. 근본 빈한한 살림에 의원이야

약이야 하고 가산을 탕진한 끝에 겨우 아버지는 반신불수로 변하여서 한쪽 팔과

다리를 쓰시게 된 것만도 천행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반신불수로서는 살 수가 없으니 어떻게 하여서라도 병은 고쳐야

하겠다 하여 어머니는 병신 아버지를 모시고 무전여행을 나서시게 되었다. 문전걸식을

하면서 고명 의원을 찾아 남편의 병을 고치자는 것이었다. 집도 가마솥도 다 팔아

없어지고, 나는 백모님 댁에 맡긴 몸이 되어서 종형들과 소 고삐를 끌고 산과 들로

다니며 세월을 보내었다.

  부모님은 안악, 신천, 장연 등지로 유리하시는 동안에 아버지 병환이 신기하게도

차도가 있어 못 쓰던 팔다리를 잘은 못해도 쓰셨다. 일가들이 얼마씩 추렴을 내어서

의리를 장만하고, 나는 또 서당에를 다니게 되었다.

  책은 남의 것을 빌어서 읽는다 하더라도 지필묵 값이 나올 데가 없었다. 어머니가

김품과 길쌈품을 팔아서 지필묵을 사주실 때에는 어찌나 고마운지 이루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었다.

  내 나이가 열 네 살이 되매 선생이라는 이가 모두 고루해서 내 마음에 차지

아니하였다. 벼 열 섬 짜리, 닷 섬 짜리 하고 훈료가 많고 적은 것으로 선생의 학력을

평가하였다. 그들은 다만 글만 부족할 뿐 아니라 그 마음씨나 일하는 것에 남의

스승이 될 자격이 보이지 아니하였다.

  그때에 아버지는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밥 빌어먹기는 장타령이 제일이라고 큰

글 하려고 애쓰지 말고 행문이나 배우라는 것이었다. '우명문표사단'하는 땅문서 쓰기,

'우근진소지단'하는 소장 쓰기, '유세차감소고우'하는 축문 쓰기,

'복지제기자미유항려'라는 혼서지 쓰기, '복미심차시'하는 편지 쓰기를 배우라 하시므로,

나는 틈틈이 이 공부를 하여서 무식촌 중에 문장이 되어서 문중에서는 내가 장차 존위

하나는 하리라고 촉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내 글은 이제 겨우 속문 정도에 지나지

못하지마는 뜻은 한 동네의 존위에 있지 아니하였다. "통감", "사략"을 읽을 때에

'왕후장영유종호(제왕, 제후, 장수, 재상의 씨(혈통)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하는 진승의 말이나 칼을 빼어서 뱀을 베었다는 유방의 일이나 빨래하는

아낙네에게 밥을 빌어먹은 한신의 사적을 볼 때에는 저도 모르게 어깨에서 바람이

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가세로는 고명한 스승을 찾아갈 수가 없어서 아버지께서도 무척 걱정을

하시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마침 공부할 길이 하나 뚫렸다. 우리 동네에서 동북으로

10리쯤 되는 학골이라는 곳에 정문재라는 이가 글을 가르치고 계셨다. 이 이의 문벌은

우리 집과 마찬가지로 상놈이었으나 과문(과거하는 글)으로는 당시에 굴지되는 큰

선비여서 그 문하에는 사처에서 선비들이 모여들었다. 이 정선생이 내 백모와

재종간이므로 아버지께서 그에게 간청하여 훈료(수업료)없이 통학하며 배우는 허락을

얻으셨다. 이에 나는 날마다 밥망태를 메고 험한 산길을 10리나 걸어서 기숙하는

학생들이 일어나기도 전에 가는 일이 많았다.

  제작으로는 과문의 초보인 대고풍 십팔구요, 학과로는 한당시와 대학통감 등이요,

습자에서는 분판만을 썼다.

  이때에 임진경과를 해주에서 보인다는 공포가 났으니 이것이 우리 나라의 마지막

과거였다. 어떤 날 정선생은 아버지께 이런 말씀을 하시고 나도 과거를 보기 위하여

명지(과거에 글지어 바치는 종이)를 쓰는 연습으로 장지를 좀 쓸 필요가 있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천신만고로 장지 다섯 장을 구해 오셔서 나는 그 다섯 장 종이가

까맣게 되도록 글씨를 익혔다.

  과거날이 가까워오매 우리 부자는 돈이 없으므로 과거중에 먹을 좁쌀을 지고

정선생을 쫓아 해주로 갔다. 여관에 들 형편이 못되므로 전에 아버지께서 친해 두셨던

계방에 사처를 정하였다.

  과거날이 왔다. 선화당 옆에 있는 관풍각 주위에는 새끼줄을 둘러 늘였다. 정각에

부문을 한다는데 선비들이 접(글방)을 제 접 이름을 쓴 백포기를 장대 끝에 높이 들고

모여들었다. 산동접, 석담접 이 모양이었다. 선비들은 검은 베로 만든 유건을 머리에

쓰고, 도포를 입고 접기를 따라 꾸역꾸역 밀려들어 좋은 자리를 먼저 잡으려고 앞장선

용사패들이 아우성을 하는 것도 볼만하였다. 원래 과장에는 노소도 없고 귀천도 없이

무질서한 것이 유풍이라 한다. 또 가관인 것은 늙은 선비들의 걸과(과거에 급제를

시켜 달라고 비는 것)라는 것이다. 둘러 늘인 새끼 그물 구멍으로 목을 쑥 들이 밀고

이런 소리를 외치는 것이다.

  "소생의 성명은 아무이옵는데, 먼 시골에 거행하면서 과거마다 참예하였사옵는데

금년이 일흔 몇 살이올시다. 요 다음은 다시 참가 못하겠사오니 이번에 초시라도

합격이 되오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이 모양으로 혹은 큰소리로 부르짖고, 혹은 방성대곡도 하니 한편 비루도 하거니와

또 한편 가련도 하였다.

  내 글은 짓기는 정선생이 하시고 쓰기만 내가 하기로 하였으나 내가 과거를 내

이름으로 아니 보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명지를 드린다는 말에 감복하여서 접장 한

분이 내 명지를 써 주기로 하였다. 나보다는 글씨가 낫기 때문이었다. 제 글과 제

글씨로 못하는 것이 유감이었으나 차작으로라도 아버지가 급제를 하셨으면 좋을 것

같았다.

  차작으로 말하면 누구나 차작 아닌 것이 없었다. 세력 있고 재산있는 사람들은 다들

글 잘하는 사람에게 글을 빌고 글씨 잘 쓰는 사람에게 글씨를 빌어서 과거를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좋은 편이었다. 어찌 되었던지 서울 권문세가의 청편지 한 장이나

시관의 수청기생에게 주는 명주 한 필이 진사 급제가 되기에는 글 잘하는 큰 선비의

글보다도 빨랐다. 물론 우리 글 따위는 통인의 집 식지감이나 되었을 것이요, 시관의

눈에도 띄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진사 급제는 미리 정해 놓고 과거는 나중 보는

것이었다.
(다음페이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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