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근현대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17

올드코난 2010. 7. 10.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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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김구선생 일대기

        

그 뒤에도 제 2, 3차로 관계있는 각 아문(관청)에 소장을 드려 보았으나 어디나

마찬가지로 이리 미루고 저리 미루고 결말을 보지 못하였다. 이 모양으로 김주경은

7,8개월 동안이나 나를 위하여 송사를 하는 통에 그 집 재산은 다 탕진되었고

아버지와 어머니도 번갈아서 인천에서 서울로 오르락내리락하셨으나 필경 아무 효과도

없이 김주경도 마침내 나를 석방하는 운동을 중지하고 말았다.

  김주경은 소송을 단념하고 집에 돌아와서 내게 편지를 하였는데, 보통으로

위문하는 말을 한 끝에 오언절구 한 수를 적었다.

 

  '(탈농진호조 발호기상린 구충필어효 청간의려인)

  새는 조롱을 벗어나야 좋은 상이며 고기가 통발을 벗어나니 어찌 예사스러우랴.

충신은 반드시 효 있는 집에서 찾고 효자는 평민의 집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내게 탈옥을 권하는 말이다. 나는 김주경이가 그간 나를 위하여

심력을 다한 것을 감사하고, 구차히 살길을 위하여 생명보다 중한 광경을 버릴 뜻이

없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답장하였다.

  김주경은 그 후 동지를 규합하여 관용선 청룡환, 현익호, 해룡환 세 척 중에서

하나를 탈취하여 해적이 될 준비를 하다가 강화 군수의 염탐한 바가 되어서 일이

틀어지고 도망하였는데, 중로에서 그 군수의 행차를 만나서 군수를 실컷 두들겨 주고

해삼위 방면으로 갔다고도 하고 근방 어느 곳에 숨어 있다고도 하였다.

  그 후에 아버지는 김주경이가 서울 각 아문에 드렸던 소송 문서 전부를 가지고

강화에 이건창을 찾아서 나를 구출할 방책을 물으셨으나 그도 역시 탄식만 할

뿐이었다고 한다.

  나는 그대로 옥중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다. 나는 신학문을 열심히 공부하였다. 나는

만사를 하늘의 뜻에 맡기고 성현으로 더불어 동행하자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으므로

탈옥 도주는 염두에도 두지 아니하고 있었다. 그러나 10년역 조덕근, 김백석, 3년수

양봉구, 이름은 잊었으나 종신수도 하나 있어서 그들은 조용할 때면 가끔 내게

탈옥하자는 뜻을 비추었다. 그들은 내가 하려고만 하면 한 손에 몇 명씩 쥐고

공중으로 날아서라도 그들을 건져낼 수 있는 것같이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두고두고

그들이 눈물을 흘려가며 살려 달라고 조르는 바람에 내 마음도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생각에는 나는 얼마 아니하여 위로부터 은명이 내려서 크게 귀하게 되겠지마는

나마저 나가면 자기들은 어떻게 살랴 하는 것이었다.

  나는 생각하였다. 상감께서 나를 죄인으로 알지 아니하심은 내 사형을 정지하라신

친칙으로 보아 분명하고, 동포들이 내가 살기를 원하는 것도 김주경을 비롯하여

인천항의 물상객주들이 돈을 모아서 내 목숨을 사려고 한 것으로 알 수 있지

아니하냐. 상하가 다 내가 살기를 원하나 나를 놓아 주지 못하는 것은 오직 왜놈

때문이다. 내가 옥중에서 죽어 버린다면 왜놈을 기쁘게 할 뿐인즉 내가 탈옥을

하더라도 의리에 어그러질 것이 없다고, 이리하여 나는 탈옥할 결심을 하였다. 내가

조덕근에게 내 결심을 말한즉 그는 벌써 살아난 듯이 기뻐하면서 무엇이나 내가 시키는

대로 할 것을 맹세하였다. 나는 그에게 집에 말하여 돈 2백냥을 들여 오라 하였더니

밥을 나르는 사람 편에 기별하여서 곧 가져왔다. 이것으로 탈옥의 한 가지 준비는 된

것이었다.

  둘째로 큰 문제가 있으니, 그것은 강화 사람 황순용이라는 사람을 손에 넣는

것이었다. 황가는 절도죄로 3년 징역을 거의 다 치르고 앞으로 나갈 날이 멀지

아니하므로 감옥의 규례대로 다른 죄수를 감독하는 직책을 맡아 가지고 있었다.

이놈을 손에 넣지 아니하고는 일이 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황가에게 한 약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그가 김백석을 남색으로 지극히 사랑하는 것이었다. 김백석은 아직

17, 8세의 미소년으로서 절도 3범으로 10년 징역의 판결을 받고 복역하는 지가 한 달쯤

된 사람이었다. 나는 김백석을 이용하여 황가를 손에 넣기로 계획을 정하였다.

  나는 조덕근으로 하여금 김백석을 충동하여, 김백석으로 하여금 황가를 졸라서,

황가로 하여금 내게 김백석을 탈옥시켜 주기를 빌게 하였다. 계교는 맞았다. 황가는

날더러 김백석을 놓아 달라고 졸랐다. 나는 그를 준절히 책망하고 다시는 그런 죄 될

말은 말라고 엄명하였다. 그러나 김백석에게 자꾸 졸리우는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눈물을 흘리면서 나를 졸랐다. 내가 뿌리치면 뿌리칠수록 그의 청은 간절하여서 한

번은,

  "제가 대신 징역을 져도 좋으니 백석이만 살려 줍시오."

하고 황가는 울었다. 비록 더러운 애정이라 하여도 애정의 힘은 과연 컸다. 그제야

내가 황가의 청을 듣는 것같이, 그러면 그러라고 허락하였다. 황은 백배 사례하고

기뻐하였다. 이리하여 둘째 준비도 끝이 났다.

  다음에 나는 아버지께 면회를 청하여 한 자 길이 되는 세모난 철장 하나를 들여

줍소사고 여쭈었다. 아버지께서는 얼른 알아차리고 그날 저녁에 새 옷 한 벌에 그

창을 싸서 들여 주셨다.

  이제는 마지막으로 탈옥할 날을 정하였으니 그것은, 무술년 3월 초 아흐렛날이었다.

  이날 나는 당번하는 옥사정 김가에게 돈 1 50냥을 주어, 오늘 밤에 내가

죄수들에게 한턱을 낼 터이니 쌀과 고기와 모주 한 통을 사 달라 하고 따로 돈 스물

닷 냥을 옥사정에게 주어 그것으로는 아편을 사 먹으라고 하였다. 옥사정이 아편장인

줄을 내가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죄수에게 턱을 낸 것은 전에도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옥사정도 예사로이 알았을 뿐더러 아편값 스물 닷 냥이 생긴 것이 무엇보다도

좋아서 두말 없이 모든 것을 내 말대로 하였다. 관속이나 죄수나 나는 조만간

은명으로 귀히 되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아무도 내가 탈옥 도주를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리가 없었다. 조덕근, 양봉구, 황순용, 김백석, 네 사람도 나는 그냥 옥에

머물러 있고 자기네만을 빼어 놓을 줄만 믿고 있었다.

  저녁밥을 들고 오신 어머니께, 자식은 오늘밤으로 옥에서 나가겠으니, 이 밤으로

배를 얻어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셔서 자식이 찾아갈 때를 기다리라고 여쭈었다.

  50명 징역수와 30명 미결수들은 주렸던 창자에 고깃국과 모주를 실컷 먹고 취흥이

도도하였다.

  옥사정 김가더러 이 방 저 방 돌아다니며 죄수들 소리나 시키며 놀자고 내가

청하였더니 김가는 좋아라고,

  "이놈들아, 김 서방님 들으시게 장기대로 소리들이나 해라."

하고 생색을 보이고 저는 소리보다 좋은 아편을 피우려고 제방에 들어가 버렸다.

  나는 적수 방에서 잡수 방으로, 잡수 방에서 적수 방으로 왔다갔다 하다가 슬쩍

마루 밑으로 들어가서 바닥에 깐 박석(정방형으로 구운 옛날 벽돌)을 창 끝으로 들쳐

내고 땅을 파서 옥밖에 나섰다. 그리고 옥담을 넘을 줄사다리를 매어 놓고 나니

문득 딴 생각이 났다. 다른 사람을 끌어내려다가 무슨 일이 날는지 모르니, 이 길로

나 혼자만 나가 버리자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좋은 사람도 아니니 기어코 건져낸들

무엇하랴. 그러나 얼른 돌려 생각하였다. 사람이 현인군자에게 죄를 지어도

부끄러웁거늘 하물며 저들과 같은 죄인에게 죄인이 되고서야 어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으랴. 종신토록 수치가 될 것이다.

  나는 내가 나온 구멍으로 다시 들어가서 천연덕스럽게 내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그들은 여전히 흥에 겨워서 놀고 있었다. 나는 눈짓으로 조덕근의 무리를 하나씩

불러서 나가는 길을 일러주어 다 내보내고 다섯째로 내가 나가 보니 먼저 나온 네

녀석들은 담을 넘을 생각도 아니하고 밑에 소복하니 모여 앉아서 벌벌 떨고

있었다. 나는 하나씩 하나씩 궁둥이를 떠받쳐서 담을 넘겨 보내고 마지막으로 내가

담을 넘으려 할 때 먼저 나간 녀석들이 용동 마루로 통하는 길에 면한 판장을

넘느라고 왈가닥거리고 소리를 내어서 경무청과 순검청에서 무슨 일이 난 줄 알고

비상소집의 호각소리가 나고 옥문밖에서는 벌써 퉁탕퉁탕하고 급히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직도 옥담 밑에 서 있었다. 이제는 내 방으로 돌아갈 수도 없은즉 재빨리

달아나는 것밖에 없건마는 남을 넘겨 주기는 쉬워도 길 반이나 넘는 담을 혼자 넘기가

어려웠다. 나 혼자는 줄사다리로 어름어름 넘어갈 새가 없었다. 옥문 열리는 소리,

죄수들이 떠들석하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나는 죄수들이 물통을 마주 메는 한 길이나

되는 몽둥이를 짚고 몸을 솟구쳐서 담 꼭대기에 손을 걸고 저편으로 뛰어 넘었다.

이렇게 된 이상에는 내 길을 막는 자가 있으면 사생의 결단을 하고 결투할 결심으로

판장을 넘지 아니하고 내 쇠창을 손에 들고 바로 삼문을 나갔다. 삼문을 지키던 파수

순검들은 비상소집에 들어간 모양이어서 거기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탄탄대로로

나왔다. 들어온 지 2년 만에 인천옥을 나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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