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근현대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21

올드코난 2010. 7. 10.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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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김구선생 일대기

 


하루는 물을 길어오다가 물통 하나를 깨뜨린 죄로 스님한테 눈알이 빠지도록 야단을

맞았다. 어떻게 심하게 스님이 나를 나무라셨는지 보경당 노승님께서 한탄을 하셨다.

"전자에도 남들이 다 괜찮다는 상좌를 들여 주었건마는 저렇게 못 견디게 굴어서 다

내어 쫓더니 이제 또 저렇게 하니 원종인들 오래 붙어 있을 수가 있나. 잘 가르치면

제 앞쓸이는 할 만하건마는."하고 하은당을 책망하셨다. 이것을 보니 나는 적이 위로가

되었다.

  나는 낮에는 일을 하고 밤이면 다른 사미들과 같이 예불하는 법이며 "천수경",

"심경" 같은 것을 외고 또 수계사이신 용담 스님께 "보각서장"을 배웠다. 용담은 다시

마곡에서 불학만이 아니라 유가의 학문도 잘 아시기로 유명한 이었다. 학식만이

아니라, 위인이 대체를 아는 이어서 누구나 존경할 만한 높은 스승이었다.

  용담께 시중하는 상좌 혜명이라는 젊은 불자가 내게 동정이 깊었고 또 용담 스님도

하은당의 가풍이 괴상함을 가끔 걱정하시면서 나를 위로하셨다. '견월망지'라 달을

보면 그만이지 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야 아무러면 어떠냐 하는 말씀을 하시고,

칼날 같은 마음을 품어 성나는 마음을 끊으라 하여 ''자의 이치를 가르쳐 주셨다.

하은당이 심하게 나를 볶으시는 것이 모두 내 공부를 도우심으로 알라는 뜻이다.

  이 모양으로 살아가는 동안에 반 년의 세월이 흘러서 무술 년도 다 가고 기해년이

되었다. 나는 고생이 되지마는 다른 중들은 나를 부러워하였다. 보경당이나 하은당이

7, 80 노인이시니 그 분네만 작고하시면 그 많은 재산이 다 내 것이 된다는

것이었다. 추수기를 보면 백미로만 받는 것이 2백 석이나 되고, 돈과 물건으로 있는

것이 수십만 냥이나 되었다. 그러나 나는 청징적멸의 도법에 일생을 바칠 생각이

생기지 아니하였다. 인천옥에서 떠난 후에 소식을 모르는 부모님도 그 후에

어찌되셨는지 알고 싶고, 나를 구해 내려다가 집과 몸을 아울러 망쳐 버린 김주경의

간 곳도 찾고 싶고, 해주 비동에 고 후조 선생(후조는 고 선생의 당호다)도 뵙고 싶고,

그때에 천주학을 한다고 해서 대의의 반역으로 곡해하고 불평을 품고 떠난 청계동의

안 진사를 찾아 사과도 할 마음이 때때로 흉중에 오락가락하여 보경당의 재물에 탐을

낼 생각은 꿈에도 일어나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하루는 보경당께 뵈옵고,

  "소승이 기왕 중이 된 이상에는 중으로서 배울 것을 배워야 하겠사오니 금강산으로

가서 경공부를 하고 일생에 충실한 불자가 되겠나이다."

하고 아뢰었다.

  보경당은 내 말을 들으시고,

  "내 벌써 그럴 줄 알았다. 네 원이 그런데야 할 수 있느냐."

하시고 즉석에 하은당을 부르셔서 한참 동안 서로 다투시다가 마침내 나에게 세간을

내어주셨다. 나는 백미 열 말과 의발을 받아 가지고 하은당을 떠나 큰 방으로

옮아왔다. 그날부터 나는 자유였다. 나는 그 쌀 열 말을 팔아서 노자를 만들어 마곡을

떠나 서울로 향하였다.

  수일을 걸어 서울에 도착한 것은 기해년 봄이었다. 그때까지 서울성 안에는 승니를

들이지 않는 국금이 있었다. 나는 문 밖으로 이 절 저 절 돌아다니다가 서대문 밖

새절에 가서 하루 묵는 중에 사형 혜명을 만났다. 그는 장단 화장사에 은사를

찾아가는 길이라고 하고 나는 금강산에 공부가는 길이라고 하였다. 혜명과 작별하고

나는 풍기 혜정이라는 중을 만났다. 그가 평양 구경을 가는 길이라 하기로 나와

동행하자고 하였다. 임진강을 건너 송도를 구경하고 나는 해주 감영을 보고 평양으로

가자 하여 혜정을 이끌고 해주로 갔다.

  수양산 신광사 부근의 북암이라는 암자에 머물면서 나는 혜정에게 약간 내 사정을

통하고 그에게 텃골 집에 가서 내 부모와 비밀히 만나 그 안부를 알아오되, 내가 잘

있단 말만 사뢰고 어디 있단 것은 알리지 말라고 부탁하였다. 이렇게 부탁해 놓고

혜정의 회보만 기다리고 있었더니 바로 4 29일 석양에 혜정의 뒤를 따라 부모님

양주께서 오셨다. 혜정에게서 내 안부를 들으신 부모님은, 네가 내 아들이 있는 곳을

알 터이니 너만 따라가면 내 아들을 볼 것이다. 하고 혜정을 따라 나서신 것이었다.

  북암에서 하루를 묵어서 양친을 모시고 나는 중의 행색으로 혜정과 같이 평양 길을

떠났다. 길을 가면서 한마디씩 하시는 말씀을 종합하건대, 무술년 3월 초아흐렛날

부모님은 해주 본향에 돌아오셨으나 순검이 뒤따라와서 두 분을 다 잡아다가 3

13일에 인천옥에 가두었다. 어머니는 얼마 아니하여 놓으시고 아버지는 석 달 후에야

석방되셨다. 그로부터는 두 분이 꿈자리만 사나와도 종일 식음을 전폐하셨다. 그리하신

지 이태 만에 혜정이 찾아간 것이었다. 만나고 보니 내가 살아 있는 것은 다행하나

중이 된 것은 슬프다고 하셨다.

  5월 초나흗날 평양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여관에서 쉬고, 이튿날인 단오날에 모란봉

그네 뛰는 구경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내 앞길에 중대한 영향을 준 사람을

만났다.

  관동 골목을 지나노라니 어떤 집 사랑에, 머리에 지포관을 쓰고 몸에 심수의를 입고

두 무릎을 모으고 점잔하게 꿇어앉아 있는 사람을 보았다. 나는 문득 호기심을 내어

한 번 수작을 붙여 보리라 하고 계하에 이르러,

  "소승 문안 드리오."

하고 합장하고 허리를 굽혔다. 그 학자님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더니 들어오라고

하였다. 들어가 인사를 한즉 그는 간재 전우의 문인 최재학으로 호를 극암이라 하여

상당히 이름이 높은 이었다. 나는 공주 마곡사 중이란 말과 이번 오는 길에 천안

금곡에 전 간재 선생을 찾았으나 마침 출타하신 중이어서 못 만났다는 말과, 이제

우연히 고명하신 최 선생을 뵈오니 이만 다행이 없다는 말을 하고 몇 마디 도리의

문답을 하였더니 최 선생은 나를 옆에 앉은 어떤 수염이 좋고 위풍이 늠름한 노인에게

소개하였다. 그는 당시 평양 진위대에 참령으로 있는 전효순이었다. 소개가 끝난 뒤에

최극암은 전참령에게,

  "이 대사는 학식이 놀라우니 영천암 방주를 내이시면 영감 자제와 외손들의 공부에

유익하겠소. 영감 의향이 어떠시오?"

하고 나를 추천한다.

  전참령은,

  "거 좋은 말씀이요. 지금 곁에서 듣는 바에도 대사의 고명하심을 흠모하오. 대사

의향이 어떠시오? 내가 내 자식놈 하나와 외손자놈들을 최 선생께 맡겨서 영천암에서

공부를 시키고 있는데, 지금 있는 주지승이 성행이 불량하여 술만 먹고 도무지 음식

제절을 잘 돌아보지를 아니하여서 곤란 막심하던 중이요."

하고 내 허락을 청하였다. 나는 웃으며,

  "소승의 방랑이 본래 있던 중보다 더할지 어찌 아시오?"

하고 한번 사양했으나 속으로 다행히 여겼다. 부모님을 모시고 구걸하기도 황송하던

터이라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고 싶었던 까닭이다.

  전참령은 평양서윤 홍순욱을 찾아가더니 얼마 아니하여 '승 원종으로 영천사

방주를 차정함'하는 첩지를 가지고 와서 즉일로 부임하라고 나를 재촉하였다. 이리하여

나는 영천암 주지가 되었다.


 (다음페이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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