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근현대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하권) 16

올드코난 2010. 7. 10.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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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하권)

김구선생 일대기

 


이 모양으로 연이어 오는 폭격에 중경에는 인명과 가옥의 손해가 막대하였으며 동포

중에 죽은 이는 신익희씨 조카와 김영린의 아내, 두 사람이 있었다.

  이 두 동포가 죽던 폭격이 가장 심한 것이어서 한 방공호에서 4백명이니 8백명이니

하는 질식자를 낸 것도 이때였다. 그 시체를 운반하는 광경을 내가 목도하였는데

화물자동차에 짐을 싣듯 시체를 싣고 달리면 시체가 흔들려 굴러 떨어지는 일이 있고

그것을 다시 싣기가 귀찮아서 모가지를 매어 자동차 뒤에 달면 그 시체가 땅바닥으로

엎치락 뒤치락 끌려가는 것이었다. 시체는 남녀를 물론하고 옷이 다 찢겨서 살이

나왔는데 이것은 서로 앞을 다투어 발악한 형적이었다.

  가족을 이 모양으로 잃어 한 편에 통곡하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편에는 방공호에서

시체를 끌어내는 인부들이 시체가 지녔던 금. . 보화를 뒤져서 대번에 부자가 된

사람도 있었다. 이렇게 질식의 참사가 일어난 것이 밀매음녀 많기로 유명한

교장구이기 때문에 죽은 자의 대다수가 밀매음녀였다.

  중경은 옛날 이름으로는 파인데, 지금은 성도라고 부르는 촉과 아울러 파촉이라고

하던 곳이다. 시가의 왼편으로 가릉강이 흘러와서 바른편에서 오는 양자강과 합하는

곳으로, 천톤급의 기선이 정박하는 중요한 항구다. 지명을 파라고 하는 것은 옛날

파장군이란 사람이 도읍하였던 때문이어서, 연화지에는 파장군의 분묘가 있다.

  중경의 기후는 심히 건강에 좋지 못하여 호흡기병이 많다. 7년간에 우리 동포도

폐병으로 죽은 자가 80명이나 된다. 9월 초생부터 이듬해 4월까지는 운무가 많아 볕을

보기가 드물고, 기압이 낮은 우묵한 땅이라 지변의 악취가 흩어지지를 아니하여

공기가 심히 불결하다. 내 맏아들 인도 이 기후의 희생이 되어서 중경에 묻혔다.

  11 5일에 우리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기타 직원은 비행기 두 대에 갈라 타고

중경을 떠나 다섯 시간 걸려 떠난 지 13년 만에 상해의 땅을 밟았다. 우리 비행기가

착륙한 비행장이 곧 홍구 신공원이라 하는데 우리를 환영하는 남녀 동포가 장내에

넘쳤다. 나는 14년을 상해에 살았건마는 홍구 공원에 발을 들여 놓은 일이 일찍

없었었다. 신공원에서 나와서 시내로 들어가려 한즉 아침 여섯 시부터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6천 명 동포가 열을 지어서 고대하고 있었다. 나는 거기 있는

(사람의 키의 한 길)이 넘는 단 위에 올라서 동포들에게 인사말을 하였다. 나중에

알고 본즉 그 단이야말로 13년전 윤봉길 의사가 왜적 백천대장 등을 폭격한 자리에

왜적들이 그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단을 모으고 군대를 지휘하던 곳이라고 한다.

세상에 우연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양자반점에 묵었다. 13년은 사람의 일생에는 긴 세월이었다.

  내가 상해를 떠날 적에 아직 어리던 이들은 벌써 장정이 되었고 장정이던 사람들은

노쇠하였다. 이 오랜 동안에 까딱도 하지 아니하고 깨끗이 고절을 지킨 옛 동지

선우혁, 장덕로, 서병호, 한진교, 조봉길, 이용환, 하상린, 한백원, 원우관 제씨와 서병호

댁에서 만찬을 같이하고 기념촬영을 하였다. 한편으로는 상해에 재류하는 동포들 중에

부정한 직업을 하는 이가 적지 않다는 말이 나를 슬프게 하였다. 나는 우리 동포가

가는 곳마다 정당한 직업에 정직하게 종사하여서 우리 민족의 신용과 위신을 높이는

애국심을 가지기를 바란다.

  나는 법조계 공동묘지로 아내의 무덤을 찾고 상해에서 10여 일을 묵어서 미국

비행기로 본국을 향하여서 상해를 떠났다. 이동녕 선생, 현익철 동지 같은 이들이

이역에 묻혀서 함께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었다.

  나는 기쁨과 슬픔이 한데 엉클어진 가슴으로 27년 만에 조국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그리운 흙을 밟으니 김포 비행장이요, 상해를 떠난 지 세 시간 후였다.

  나는 조국의 땅에 들어오는 길로 한 가지 기쁨과 한 가지 슬픔을 느꼈다. 책보를

메고 가는 학생들의 모양이 심히 활발하고 명랑한 것이 한 기쁨이요, 그와는 반대로

동포들이 사는 집들이 납작하게 땅에 붙어서 퍽 가난해 보이는 것이 한 슬픔이었다.

동포들이 여러 날을 우리를 환영하려고 모였더라는데 비행기 도착 시일이 분명히

알려지지 못하여 이날에는 우리를 맞아 주는 동포가 많지 못하였다. 늙은 몸을

자동차에 의지하고 서울에 들어오니 의구한 산천이 반갑게 나를 맞아 주었다.

  내 숙소는 새문 밖 최창학씨의 집이요, 국무원 일행은 한미호텔에 머물도록 우리를

환영하는 유지들이 미리 준비하여 주었었다.

  나는 곧 신문을 통하여 윤봉길, 이봉창 두 의사와 강화 김주경 선생의 유가족을

만나고 싶다는 뜻을 말하였더니 윤 의사의 아드님이 덕산으로부터 찾아오고 이 의사의

조카따님이 서울에서 찾아오고 김주경 선생의 아드님 윤태 군은 38 이북에 있어서

못보고 그 따님과 친척들이 혹은 강화에서 혹은 김포에서 와서 만나니 반갑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조의 분묘가 계시고 친척과 고구가 사는 그리운 내 고향은

소위 38선의 장벽 때문에 가보지 못하고 재중형제들과 종매들의 가족이 상경하여서

반갑게 만날 수가 있었다.

  군정청에 소속한 각 기관과 정당, 사회단체, 교육계, 공장 등 각계가 빠짐없이

연합환영회를 조직하여서 우리는 개인의 자격으로 들어왔건마는 '임시정부환영'이라고

크게 쓴 시위행진을 하고, 그 끝에 덕수궁에 식탁이 4백여 개로 환영연을 배설하고

하지 중장 이하 미국 군정 간부들도 출석하여 덕수궁 뜰이 좁을 지경이었으니 참으로

찬란하고 성대한 환영회이었다. 나는 이러한 환영을 받을 공로가 없음이 부끄럽고도

미안하였으나 동포들이 해외에서 오래 신고한 우리를 위로하는 것이라고 강잉하여

고맙게 받았다.

  어느덧 해가 바뀌었다. 나는 38이남 만이라도 돌아보라리 하고 첫 번째 길로 인천에

갔다. 인천은 내 일생에 뜻깊은 곳이다. 스물 두 살에 인천감옥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스물 세 살에 탈옥 도주하였고, 마흔 한 살 적에 17년 징역수로 다시 이

감옥에 이수되었었다. 저 축항에는 내 피땀이 배어 있는 것이다. 옥중에 있는 이

불효를 위하여 부모님이 걸으셨을 길에는 그 눈물 흔적이 남아 있는 듯하여 마흔 아홉

해전 기억이 어제런 듯 새롭다. 인천서도 시민의 큰 환영을 받았다.

  두 번째 길로 나는 공주 마곡사를 찾았다. 공주에 도착하니 충청남북도 열 한 개

군에서 10여 만 동포가 모여서 나를 환영하는 회를 열어 주었다.

  공주를 떠나 마곡사로 가는 길에 김복한, 최익현 두 선생의 영정 모신 데를 찾아서

배례하고 그 유가족을 위로하고 동민의 환영하는 정성을 고맙게 받았다. 정당,

사회단체의 대표로 마곡사까지 나를 따르는 이가 3 50여 명이었고 마곡사 승려의

대표는 공주까지 마중을 왔으며 마곡사 동구에는 남녀 승려가 도열하여 지성으로 나를

환영하니, 옛날에 이 절에 있던 한 중이 일국의 주석이 되어서 온다고 생각함이었다.

48년 전에 머리에 굴갓을 쓰고 목에 염주를 걸고 출입하던 길이었다. 산천도 예와

같거니와 대웅전에 걸린 주련(기둥에 써 붙이는 글)도 옛날 그대로였다.

 

  '갈래관세간 유여몽중사

  한 걸음 물러나 세상을 보니 꿈 속의 일만 같구나.'

 

  그때에는 무심히 보았던 이 글구를 오늘에 자세히 보니 나를 두고 이른 말인 것

같았다. 용담 스님께 보각서장을 배우던 염화실에서 뜻깊은 하룻밤을 지냈다. 승려들은

나를 위하여 이날 밤에 불공을 드렸다. 그러나 승려들 중에는 내가 알던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튿날 아침에 나는 기념으로 무궁화 한 포기와 향나무 한 그루를

심고 마곡사를 떠났다.


(다음페이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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