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근현대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하권) 12

올드코난 2010. 7. 10.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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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하권)

김구선생 일대기

 


어머니는 대로하여서,

  "내 아들을 찾는 데는 내가 경관들보다 나을 터이고, 또 가라고 허가를 하여서

가장집물을 다 팔게 해놓고 이제 또 못 간다는 것이 무슨 법이냐. 너희놈들이 남의

나라를 빼앗아 먹고 이렇게 정치를 하고도 오래 갈 줄 아느냐."

하면서 기절하셨다. 이에 경찰은 어머니를 김씨네에게 맡기고 가 버렸다.

  그 후에 경찰이 물으면 어머니는,

  "그렇게 말썽 많은 길은 안 떠난다."

하시고는 목수를 불러 다시 집을 수리하고 집물을 마련하시는 등 오래 사실 모양을

보이셨다.

  이러하신 지 수삭 후에 어머니는 송화 동생을 보러 가신다 칭하고 신아를 데리시고

신천으로, 재령으로, 사리원으로 도막도막 몸을 옮겨서 평양에 도착하여 숭실중학교에

재학 중인 인아를 데리고 안동현으로 가는 직행차를 타셨다. 대련서 왜 경찰의 취조를

받았으나 거기서 인아가 늙은 조모를 모시고 위해위 친척의 집에 간다고 대답하여서

무사히 통과하셨다. 어머니가 상해 안공근 집을 거쳐 가흥 엄항섭 집에 오셨다는

기별을 남경에서 듣고 나는 곧 가흥으로 달려가서 9년 만에 다시 모자가 서로 만났다.

  나를 보시자마자 어머님은 이러한 의외의 말씀을 하셨다--

  "나는 이제부터 ''라고 아니하고 '자네'라고 하겠네. 또 말로는 책하더라도 초달로

자네를 때리지는 않겠네. 들으니 자네가 군관학교를 설립하고 청년들을 교육한다니

남의 사표가 된 모양이니 그 체면을 보아주자는 것일세."

  나는 어머니의 이 분부에 황송하였고, 또 이것을 큰 은전으로 알았다.

  나는 어머니를 남경에서 따로 집을 잡고 계시게 하다가 1년이 못 되어 장사로 가게

된 것이었다.

  어머니가 남경에 계실 때 일이다. 청년단과 늙은 동지들이 어머니의 생신 축하연을

베풀려 함을 눈치 채시고 어머니는 그들에게, 그 돈을 돈으로 달라, 그러면 당신이

자시고 싶은 음식을 만들겠다 하시므로 발기하던 사람들은 어머니의 청구대로 그 돈을

드렸더니 어머니는 그것으로 단총 두 자루를 사서 그것을 독립운동에 쓰라 하고 내어

놓으셨다.

  장사로 옮아온 우리 백여 명 대가족은 중국 중앙정부의 보조와 미국에 있는

동포들의 후원으로 생활에 곤란은 없어서 피난민으로는 고등 피난민이라 할 만하게

살았다. 더욱이 장사는 곡식이 흔하고 물가가 지천하였고 호남성 부주석으로 새로

도임한 장치중 장군은 나와는 숙친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더욱이 우리에게 많은 편의를

주었다.

  나는 상해, 항주, 남경에서는 특별한 경우를 제하고는 변성명을 하였으나 장사에서는

언제나 버젓이 김구로 행세하였다.

  오는 노중에서부터 발론이 되었던 3당 합동문제가 장사에 들어와서는 더욱 활발하게

진전되었다. 합동하려는 3당의 진용은 이러하였다.

  첫째는 조선혁명당이니, 이청천, 유동열, 최동오, 김학규, 황학수, 이복원, 안일청,

현익철 등이 중심이요.

  둘째는 한국독립당이니, 조소앙, 홍진, 조시원 등이 그 간부며,

  다음으로 셋째는 내가 한국 국민당이니,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차이석, 송병조,

김봉준, 엄항섭, 안공근, 양묵, 민병길, 손일민, 조성환 등이 그 중의 주요 인물이었다.

  이상 3당이 통합문제를 토의하려고 조선혁명당 본부인 남목청에 모였는데 나도 거기

출석하여 있었다.

 

  내가 의식을 회복하여 보니 병원인 듯하였다. 웬일이냐 한즉, 내가 술에 취하여

졸도하여서 입원한 것이라고 하였다. 의사가 회진할 때에 내 가슴에 웬 상처가 있는

것을 알고 이것은 웬것이냐 한즉 그것은 내가 졸도할 때에 상머리에 부딪친 것이라

하므로 그런 줄만 알고 병석에 누워 있었다. 한 달이나 지나서야 엄항섭 군이 내게

비로소 진상을 설명하여 주었다. 그것은 이러하였다.

  그날 밤, 조선혁명당원으로서 내가 남경 있을 때에 상해로 특수공작을 간다고

하여서 내게 금전의 도움을 받은 일이 있는 이운한이 회장에 돌입하여 권총을

난사하여 첫방에 내가 맞고, 둘째로 현익철, 셋째로 유동열이 다 중상하고 넷째 방에

이청천이 경상하였는데 현익철은 입원하자 절명하고 유동열은 치료 경과가 양호하다는

것이었다.

  범인 이운한은 장사 교외의 작은 정거장에서 곧 체포되고 연루자로 강창제, 박창세

등도 잡혔었으나 강, 박 양인은 석방되고 이운한은 탈옥하여 도망하였다.

  성주석 장치중 장군은 친히 내가 입원한 상아의원에 나를 위문하고 병원 당국에

대하여서는 치료비는 얼마가 들든지 성 정부에서 담당할 것을 말하였다고 한다. 당시

한구에 있던 장개석 장군은 하루에도 두세 번 전보로 내 병상을 묻고 내가 퇴원한

기별을 듣고는 나하천을 대표로 내게 보내어 돈 3천원을 요양비로 쓰라고 주었다.

  퇴원하여 어머니를 찾아뵈니 어머니는,

  "자네 생명은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줄 아네-- 사불범정이지."

  이렇게 말씀하시고 또,

  "한인의 총에 맞고 살아 있는 것이 왜놈의 총에 맞아 죽은 것만 못해."

하시기도 하였다.

  애초에 내 상처는 중상이어서 병원에서 의사가 보고 입원 수속도 할 필요가 없다

하여 문간방에 두고 절명하기만 기다렸던 것이 네 시간이 되어도 살아 있었기 때문에

병실로 옮기고 치료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내가 이런 상태이므로 향항에 있던

인아에게는 내가 총을 맞아 죽었다는 전보를 놓아서 안공근은 인아와 함께 내 장례에

참여할 생각으로 달려왔었다.

  전쟁의 위험이 장사에도 파급되어서 성 정부에서도 끝까지 이 사건을 법적으로

규명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내 추측으로는 이운한이 강창제, 박창세 두 사람의

악선전에 혹하여 그런 일을 한 것인 듯하다.

  내가 퇴원하여 심항섭 군 집에서 정양을 하고 있는데, 하루는 갑자기 신기가

불편하고 구역이 나며 오른편 다리가 마비되어서 다시 상아의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다. 엑스광선으로 본 결과, 서양인 외과 주임이 말하기를 내 심장 옆에 박혀 있던

탄환이 혈관을 통하여 오른편 갈빗대 옆에 옮아가 있으니 불편하면 수술하기도 어렵지

아니하나 그대로 두어도 생명에는 관계가 없다 하고, 또 말하기를 오른편 다리가

마비되는 것은 탄환이 대혈관을 압박하는 때문이거니와 작은 혈관들이 확대되어서

압박된 혈관의 기능을 대신하게 되면 다리가 마비되던 것도 차차 나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장사가 또 위험하게 되매 우리 3당의 백여 명 가족은 또 광주로

이전하였으니 호남의 장치중 주석이 광동성 주석 오철성씨에게 소개하여 준 것이었다.


 (다음페이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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