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근현대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하권) 9

올드코난 2010. 7. 10. 15:46
반응형

백범일지 (하권)

김구선생 일대기

 


나는 진씨 내외와 동반하여 남호 연우루와 서문 밖 삼탑 등을 구경하였다. 여기는

명나라 때에 왜구가 침입하여 횡포하던 유적이 있었다. 동문 밖으로 10리 쯤 나아가면

한나라 적 주매신의 무덤이 있고 북문 밖 낙범정은 주매신이 글을 읽다가 나락 멍석을

떠내려 보내고 아내 최씨에게 소박을 받은 유적이라고 한다. 나중에 주매신이

회계태수가 되어 올 때에 최씨는 엎지른 동이의 물을 주워담지 못하여 낙범정 밑에서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가흥에 우접한 지 얼마 아니하여 상해 일본 영사관에 있는 일인 관리 중에 우리의

손에 매수된 자로부터, 호항선(상해, 항주 철도)을 수색하러 일본 경관이 가니

조심하라는 기별이 왔다. 가흥 정거장에 사람을 보내어 알아 보았더니 과연 변장한 왜

경관이 내려서 여기저기 둘러보고 갔다고 하므로 저 봉장의 처가인 주씨 댁 산정으로

가기로 하였다. 주씨는 저 봉장 씨의 재취로 첫아기를 낳은 지 얼마 아니되는 젊고

아름다운 부인이었다. 저씨는 이러한 그 부인을 단독으로 내 동행을 삼아서 기선으로

하룻길 되는 해염현성 주씨 댁으로 나를 보내었다.

  주씨 댁은 성내에서 제일 큰 집이라 하는데 과연 굉장하였다. 내 숙소인 양옥은 그

집 후원에 있는데, 대문 밖은 돌을 깔아 놓은 길이요, 길 건너는 대소 선박이 내왕하는

호수다. 그리고 대문 안은 정원이요, 한 협문을 들어가면 사무실이 있는데 여기는 주씨

댁 총경리가 매일 이집 살림살이를 맡아 보는 곳이다. 예전에는 4백여 명 식구가 한

식당에 모여서 식사를 했으나 지금은 사농공상의 직업을 따라서 대부분이 각처로

분산하고 남아 있는 식구들도 소가족으로 자취를 원하므로 사무실에서는 물자만

배급한다고 한다.

  집의 생김은 벌의 집과 같아서 세 채나 네 채가 한 가족 차지가 되었는데 앞에는 큰

객청이 있고 뒤에는 양옥과 화원이 있고 또 그 뒤에는 운동장이 있다.

  해염에 대화원 셋이 있는데 전가 화원이 첫째요, 주가 화원이 둘째라 하기로 전가

화원도 구경하였다. 과연 전씨 댁이 화원으로는 주씨 것보다 컸으나 집과 설비로는

주씨 것이 전씨 것보다 나았다.

  해염 주씨 댁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이튿날 다시 주씨 부인과 함께 기차로

노리언까지 가서 거기서부터는 서남으로 산길 5,6리를 걸어 올라갔다. 저 부인이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연방 손수건으로 땀을 씻으며 7, 8월 염천에 고개를 걸어 넘는

광경을 영화로 찍어 만대 후손에게 전할 마음이 간절하였다. 부인의 친정 시비 하나가

내가 먹을 것과 기타 일용품을 들고 우리를 따랐다. 국가가 독립이 된다면 저 부인의

정성과 친절을 내 자손이나 우리 동포가 누구든 감사하지 아니하랴. 영화로는 못

찍어도 글로라도 전하려고 이것을 쓰는 바이다.

  고개턱에 오르니 주씨가 지은 한 정자가 있다. 거기서 잠시 쉬고 다시 걸어 수백

보를 내려가니 산 중턱에 소쇄한 양옥 한 채가 있다. 집을 수호하는 비복들이 나와서

공손하게 저 부인을 맞는다.

  부인은 시비에게 들려 가지고 온 고기며 과일을 꺼내어 비복들에게 주며 내 식성과

어떻게 요리할 것을 설명하고, 또 나를 안내하여 어디를 가거든 얼마, 어디 어딘

얼마를 받으라고 안내 요금까지 자상하게 분별하여 놓고 당일로 해염 친가로

돌아갔다.

  나는 이로부터 매일 산에 오르기로 일을 삼았다. 나는 상해에 온 지 14년이 되어

남들이 다 보고 말하는 소주니 항주니 남경이니 하는데를 구경하기는 고사하고 상해

테두리 밖에 한 걸음을 내어 놓은 일도 없었다. 그러다가 마음대로 산과 물을 즐길

기회를 얻으니 유쾌하기 짝이 없었다.

  이 집은 본래 저 부인의 친정 숙부의 여름 별장이러니, 그가 별세하매 이 집 가까이

매장한 뒤로는 이 집은 그 묘소의 묘막과 제각을 겸한 것이라고 한다. 명가가 산장을

지을 만한 곳이라 풍경이 자못 아름다웠다. 산에 오르면 앞으로는 바다요, 좌우는 푸른

, 붉은 가을 잎이었다.

  하루는 응과정에를 올랐다. 거기는 일좌 승방이 있어, 한 늙은 여승이 나와 맞았다.

그는 말끝마다 나무아미타불을 불렀다.

  "원로 잘 오셔 계시오. 아미타불, 내 불당으로 들어오시오. 아미타불!"

이 모양이었다. 그를 따라 암자로 들어가니 방방이 얼굴 희고 입술 붉은 젊은 여승이

승복을 맵시있게 입고 목에는 긴 염주, 손에는 단주를 들고 저두추파로 인사를 하였다.

  암자 뒤에 바위 하나가 있는데 그 위에 지남침을 놓으면 거꾸로 북을 가리킨다

하기로 내 시계에 달린 윤도를 놓아 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아마 자철광 관계인가

하였다.

  하루는 해변 어느 진에 장구경을 갔다가 경찰의 눈에 걸려서 마침내 정체가 이 지방

경찰에 알려지게 되었으므로 안전치 못하다 하여 도로 가흥으로 돌아왔다.

  가흥에 와서는 거진 매일 배를 타고 호수에 뜨거나 운하로 오르내리고 혹은

엄가빈이라는 농촌의 농가에 몸을 붙여 있기도 하였다.

  이렇게 강남의 농촌을 보니 누에를 쳐서 길쌈을 하는 법이나 벼농사를 짓는 법이나

다 우리 나라보다는 발달된 것이 부러웠다. 구미 문명이 들어와서 그런 것 외에

고래의 것도 그러하였다. 나는 생각하였다. 우리 선인들은 한, , , , , 청 시대에

끊임이 없이 사절이 내왕하면서 왜 이 나라의 좋은 것은 못 배워 오고 궂은 것만

들여왔는고. 의관 문물 실준중화라는 것이 이조 오백 년의 당책이라 하건마는 머리

아픈 망건과 기타 망하기 좋은 것 뿐이요, 이용후생에 관한 것은 없었다. 그리고

민족의 머리에 들어박힌 것은 원수의 사대사상뿐이 아니냐. 주자학을 주자 이상으로

발달시킨 결과는 공수위좌하여 손가락 하나 안 놀리고 주둥이만 까게 하여서 민족의

원기를 소진하여 버리니 남는 것은 편협한 당파싸움과 의뢰심 뿐이다.

  오늘날로 보아서 요새 일부 청년들이 제정신을 잃고 러시아로 조국을 삼고 레닌을

국부로 삼아서 어제까지의 민족혁명은 두 번 피흘릴 운동이니, 대번에 사회주의

혁명을 한다고 떠들던 자들이 레닌의 말 한마디에 돌연히 민족혁명이야말로 그들의

전면목인 것처럼 들고 나오지 않는가. 주자님의 방구까지 향기롭게 여기던 부유들

모양으로 레닌의 똥까지 달다고 하는 청년들을 보게 되니 한심한 일이다. 나는 반드시

주자를 옳다고도 아니하고 마르크스를 그르다고도 아니한다. 내가 청년 제군에게

바라는 것은 자기를 잃지 말란 말이다. 우리의 역사적 이상, 우리의 민족성, 우리의

환경에 맞는 나라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밤낮 저를 잃고 남만 높여서 남의 발뒤꿈치를

따르는 것으로 장한 체를 말라는 것이다. 제 뇌로, 제정신으로 생각하란 말이다.

  나는 엄가빈에서 다시 사회교 엄항섭 군 집으로, 오룡료 진동생의 집으로

옮아 다니며 숙식하고 낮에는 주애보라는 여자가 사공이 되어 부리는 배를 타고 이

운하 저 운하로 농촌 구경을 돌아 다니는 것이 나의 일과였다.


 (다음페이지 계속)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