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근현대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하권) 8

올드코난 2010. 7. 10. 15:45
반응형

백범일지 (하권)

김구선생 일대기

 


식장을 향하여 떠나는 길에 윤군은 자동차에 앉아서 그가 가졌던 돈을 꺼내어 내게

준다.

  "왜 돈은 좀 가지면 어떻소?"

하고 묻는 내 말에, 윤군은,

  "자동차값 주고도 5, 6원은 남아요."

할 즈음에 자동차가 움직였다. 나는 목이 메인 소리로,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하였더니 윤군은 차창으로 고개를 내밀어 나를 향하여 숙였다. 자동차는 크게 소리를

지르며 천하 영웅 윤봉길을 싣고 홍구 공원을 향하여 달렸다.

  그 길로 나는 조상섭의 상점에 들려 편지 한 장을 써서 점원 김영린을 주어 급히

안창호 선생에게 전하라 하였다. 그 내용은 '오전 10시경부터 댁에 계시지 마시오.

무슨 대사건이 있을 듯합니다.'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석오 선생께로 가서

지금까지 진행한 일을 보고하고 점심을 먹고 무슨 소식이 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1시쯤 해서야 중국 사람들의 입으로 홍구 공원에서 누가 폭탄을 던져서 일인이

많이 죽었다고 술렁술렁하기 시작하였다. 혹은 중국인이 던진 것이라 하고, 혹은

고려인의 소위라고 하였다. 우리 동포 중에도 어제까지 소채바구니를 지고 다니던

윤봉길이 오늘에 경천위지할 이 일을 했으리라고 아는 사람은 김구 이외에는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같은 몇 사람이나 짐작하였을 것이다.

  이 날 일은 순전히 내가 혼자 한 일이므로, 이동녕 선생에게도 이 날은 처음 자세한

보고를 하고 자세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3시에 비로소 신문 호외로,

  '홍구 공원 일인의 천장절 경축 대상에 대량의 폭탄이 폭발하여 민단장 하단은

즉사하고 백천 대장, 중광 대사, 야촌 중장 등 문무대관이 다수 중상.'이라는 것이

보도되었다.

  그 날 일인의 신문에는 폭탄을 던진 것은 중국인의 소위라고 하더니 이튿날

신문에야 일치하게 윤봉길의 이름을 크게 박고 법조계에 대수색이 일어났다.

  나는 안공근과 엄항섭을 비밀히 불러 이로부터 나를 따라 일을 같이할 것을 명하고

미국인 피취(비오생이라고 중국식으로 번역한다)씨에게 잠시 숨겨 주기를

교섭하였더니 피취 씨는 쾌락하고 그 집 2층을 전부 내게 제공하므로 나와 김철,

안공근, 엄항섭 넷이 그 집에 있게 되었다. 피취 씨는 고 피취 목사의 아들이요, 피취

목사는 우리 상해 독립운동의 숨은 은인이었다. 피취 부인은 손수 우리의 식절을

보살폈다.

  우리는 피취 댁 전화를 이용하여 누가 잡힌 것 등을 알고 또 잡혀간 동지외 가족의

구제며 피난할 동지의 여비 지급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내가 전인하여 편지까지

하였건마는 불행히 안창호 선생이 이유필의 집에 갔다가 잡히고, 그 밖에 장헌근,

김덕근과 몇몇 젊은 학생들이 잡혔을 뿐이요, 독립운동 동지들은 대개 무사함을 알고

다행히 생각하였다. 그러나 수색의 손이 날마다 움직이니 재류동포가 안거할 수가

없고 또 애매한 동포들이 잡힐 우려가 있으므로 나는 동경사건과 이번 홍구

폭탄사건의 책임자는 나 김구라는 성명서를 즉시로 발표하려 하였으나, 안공근의

반대로 유예하다가 마침내 엄항섭으로 하여금 이 성명서를 기초케 하고 피취 부인에게

번역을 부탁하여 통신사에 발표하였다. 이리하여 일본 천황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

사건이나, 상해에 백천 대장 이하를 살상한 윤봉길 사건이나 그 주모자는 김구라는

것이 전세계에 알려진 것이었다.

  이 일이 생기자 은주부, 주경란 같은 중국 명사가 내게 특별 면회를 청하고 남경에

있던 남파 박찬익 형의 활동도 있어 물질로도 원조가 답지하였다. 만주사변, 만보산

사건 등으로 악화하였던 중국인의 우리 한인에게 대한 감정은 윤봉길 의사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극도로 호전하였다.

  왜는 제 1차로 내 몸에 20만원 현상을 하더니 제 2차로 일본 외무성, 조선총독부,

상해 주둔군 사령부의 3부 합작으로 60만원 현상으로 나를 잡으려 하였다. 그러나

전에는 법조계에서 한 발자국도 아니 나가던 나는 자동차로 영조계, 법조계 할 것

없이 막 돌아다녔다. 하루는 전차공사 인스펙터로 다니는 별명 박 대장 집에 혼인

국수를 먹으러 가는 것이 10여 명의 왜 경관대에게 발견되어 박 대장 집 아궁까지

수색되었으나, 나는 부엌에서 선 채로 국수를 얻어 먹고 벌써 나온 뒤여서

아슬아슬하게 면하였다.

  남경 정부에서는 내가 신변이 위험하다면 비행기를 보내마고까지 말하여 왔다.

그러나 그들이 나를 데려가려 함은 반드시 무슨 요구가 있을 것인데, 내게는 그들을

만족시킬 아무 도리도 없음을 생각하고 헛되이 남의 나라의 신세를 질 것이 없다 하여

모두 사절하여 버렸다.

  이러하는 동안에 20여 일이 지났다. 하루는 피취 부인이 나를 보고 내가 피취 댁에

있는 것을 정탐이 알고 그들이 넌지시 집을 포위하고 지키고 있다 하므로, 나는 피취

댁에 더 있을 수 없음을 깨닫고 피취 댁 자동차에 피취 부인과 나는 내외인 것처럼

동승하고 피취 씨가 운전수가 되어 대문을 나서 보니 과연 중국인, 러시아인, 프랑스인

정탐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 사이로 피취 씨가 차를 빨리 법조계를 지나 중국 땅에

있는 정거장으로 가서 기차로 가흥 수륜사창에 피신하였다. 이는 박남파가 은주부,

저보성 제씨에게 주선하여 얻어 놓은 곳으로, 이동녕 선생을 비롯하여 엄항섭, 김의한

양군의 가족은 수일 전에 벌써 반이해 와 있었다.

  나중에 들은즉 우리가 피취 댁에 숨은 것이 발각된 것은 우리가 그 집 전화를

남용한 데서 단서가 나온 것이라 하였다.

 

    .12. 기적장강만리풍

 

  나는 이로부터 일시 가흥에 몸을 붙이게 되었다. 성은 조모님을 따라 장이라 하고

이름은 진구, 또는 진이라고 행세하였다.

  가흥은 내가 의탁하여 있는 저보성씨의 고향인데, 저씨는 일찍 강소성장을 지낸

이로 덕망이 높은 신사요, 그 맏아들 봉장을 미국 유학생으로 그곳 동문 밖

민풍지창이라는 종이 공장의 기사장이었다. 저씨의 집은 가흥 남문 밖에 있는데 구식

집으로 그리 굉장하지는 아니하나 대부의 저택으로 보였다. 저씨는 그의 수양자인

진동손 군의 정자를 내 숙소로 지정하였는데 이것은 호숫가에 반양제로 지은 말쑥한

집이었다. 수륜사창이 바라보이고 경치가 좋았다. 저씨 댁에 내 본색을 아는 이는 저씨

내외와 그 아들 내외와 진동손 내외뿐인데 가장 곤란한 것은 내가 중국 말을 통치

못함이었다. 비록 광동인이라고 행세는 하지마는 이렇게도 말을 모르는 광동인이 어디

있으랴. 가흥에는 산은 없으나 호수와 운하가 낙지발같이 사통팔달하여서 7, 8세 되는

아이들도 배 저을 줄을 알았다. 토지는 극히 비옥하여 물산이 풍부하고 인심은

상해와는 딴판으로 순후하여 상점에 에누리가 없고 고객이 물건을 잊고 가면 잘

두었다가 주었다.


 (다음페이지 계속)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