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근현대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하권) 10

올드코난 2010. 7. 10.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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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하권)

김구선생 일대기

 


가흥 성내에 있는 진명사는 유명한 도주공의 집터라 한다. 그 속에는 축오자(암소

다섯 마리를 기른다)하고 또 양어하던 못이 있고 절문 밖에는 도주공유지라는 돌비가

있다.

  하루는 길로 돌아다니다가 큰 길가 마당에서 군사가 조련하는 것을 사람들이 보고

있기로 나도 그 틈에 끼었더니 군관 하나가 나를 유심히 보며 내 앞으로 와서 누구냐

하기로 나는 언제나 하는 대로 광동인이라고 대답하였다. 이 군관이 정작 광동인인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나는 곧 보안대 본부로 붙들려 갔다. 저씨 댁과 진씨 댁에

조사한 결과로 무사하게는 되었으나 저 봉장 군은 내가 피신할 줄을 모른다고 책하고

그의 친우요, 중학교 교원인 과부가 하나 있으니 그와 혼인하여 살면서 행색을

감추라고 권하였다. 나는, 그런 유식한 여자와 같이 살면 더욱 내 본색이 탄로되기

쉬우니 차라리 무식한 뱃사공 주애보에게 몸을 의탁하리라 하여 아주 배 속에서

살기로 하였다. 오늘은 남문 밖 호수가에서 자고 내일을 북문 밖 운하 옆에서 자고

낮에는 육지에 나와 다녔다.

  이러는 동안에도 박남파, 엄일파, 안신암 세 사람은 줄곧 외교 정보와 수집에

종사하였다. 중국인 친구의 동정과 미주 동포의 후원으로 활동하는 비용에는 곤란이

없었다.

  박남파가 중국 국민당 당원이던 관계로 당의 조직부장이요, 강소성 주석인 진과부와

면식이 있어, 그의 소개로 장개석 장군이 내게 면회를 청한다는 통지를 받고 나는

안공근, 엄항섭 두 사람을 대동하고 남경으로 갔다. 공패성, 소쟁 등 요인들이 진 과부

씨를 대표하여 나를 나와 맞아 중앙반점에 숙소를 정하였다.

  이튿날 밤에 중앙군관학교 구내에 있는 장개석 장군의 자택으로 진 과부 씨의

자동차를 타고 박남파 군을 통역으로 데리고 갔다. 중국 옷을 입은 장씨는 온화한

낯빛으로 나를 접하여 주었다. 인사가 끝난 뒤에 장 주석은 간명한 어조로,

  "동방 각 민족은 손중산 선생의 삼민주의(중국의 손문이 제창한 민족. 민권. 민생)

부합하는 민주정치를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고 하기로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일본의 대륙 침략의 마수가 각일각으로 중국에 침입하니 벽좌우를 하시면 필담으로

몇 마디를 하겠소."

하였더니 장씨는,

  "하도하오(좋소)."

하므로 진 과부와 박남파는 밖으로 나갔다. 나는 붓을 들어,

  "선생이 백만 금을 허하시면 이태 안에 일본, 조선, 만주 세 방면에 폭풍을 일으켜

일본의 대륙침략의 다리를 끊을 터이니 어떻게 생각하오."

하고 써서 보였다.

  그것을 보더니 이번에는 장씨가 붓을 들어,

 

  "청이계획서상시"

  청하건대, 계획서로 상세히 보이시오.

 

  라고 써서 내게 보이기로 나는 물러나왔다.

  이튿날 간단한 계획서를 만들어 장 주석에게 드렸더니 진 과부 씨가 자기의 별장에

나를 초대하여 연석을 베풀고 장 주석의 뜻을 대신 내게 전한다. 특무공작으로는

천황을 죽이면 천황이 또 있고 대장을 죽이면 대장이 또 있으니 장래의 독립전쟁을

위하여 무관을 양성함이 어떠한가 하기로 나는 이야말로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라

하였다. 이리하여 하남성 낙양의 군관학교 분교를 우리 동포의 무관양성소로 삼기로

작정되어 제 1차로 북평, 천진, 상해, 남경 등지에서 백여 명의 청년을 모집하여

학적에 올리고, 만주로부터 이청천과 이범석을 청하여 교관과 영관이 되게 하였다.

(그러나 이 군관학교는 겨우 제 1기생의 필업을 하고는 일본 영사 수마의 항의로

남경정부에서 폐쇄령이 내렸다)

  이때에 대일전선 통일동맹이란 것이 발동하여 또 통일론이 일어났다. 김원봉이 내게

특별히 만나기를 청하기로 어느 날 진회에서 만났더니 그는 자기도 통일운동에

참가하겠은 즉 나더러도 참가하라는 것이었다. 그가 이 운동에 참가하는 동기는

통일이 목적인 것보다도 중국인에게 김원봉은 공산당이라는 혐의를 면하기 위함이라

하기로 나는 통일은 좋으나 그런 한 이불 속에서 딴 꿈을 꾸려는 통일운동에는 참가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얼마 후에 소위 5당 통일회의라는 것이 개최되어 의열단,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미주대한인독립단이 통일하여 조선민족혁명당이 되어 나왔다. 이 통일에

주동자가 된 김원봉, 김두봉 등 의열단은 임시정부를 눈에 든 가시와 같이 싫어하는

패라 임시정부의 해소를 극렬히 주장하였고 당시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이던 김규식,

조소앙, 최동오, 송병조, 차이석, 양기탁, 유동열 일곱 사람 중에 차이석, 송병조 두

사람을 내어놓고 그외 다섯 사람이 통일이란 말에 취하여 임시정부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니 김두봉은 좋다고 하고 임시정부 소재지인 항주로 가서 차이석, 송병조

양씨에게 5당이 통일된 이 날에 이름만 남은 임시정부는 취소해 버리자고 강경하게

주장하였으나, 송병조, 차이석 양씨는 굳이 반대하고 임시정부의 문패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일곱 사람에서 다섯이 빠졌으니 국무회의를 열 수도 없어서 사실상

무정부 상태였다.

  조완구 형이 편지로 내게 이런 사정을 전하였으므로 나는 분개하여 즉시 항주로

달려갔다. 이때에 김철은 벌써 작고하여 없고 5당 통일에 참가하였던 조소앙은 벌써

거기서 탈퇴하고 없었다.

  나는 이시영, 조완구, 김붕준, 양소벽, 송병조, 차이석 제씨와 임시정부 유지 문제를

협의한 결과 의견이 일치하기로, 일동이 가흥으로 가서 거기 있던 이동녕, 안공근,

안경근, 엄항섭 등을 가하여 남호의 놀잇배 한 척을 얻어 타고 호상에 떠서 선 중에서

의회를 열고 국무위원 세 사람을 더 뽑으니 이동녕, 조완구와 김구였다. 이에 송병조.

차이석을 합하여 국무위원이 다섯 사람이 되었으니 이제는 국무회의를 진행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5당 통일론이 났을 때에도 여러 동지들은 한 단체를 조직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나는

차마 또 한 단체를 만들어 파쟁을 늘이기를 원치 아니한다는 이유로 줄곧 반대하여

왔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를 유지하려면 그 배경이 될 단체가 필요하였고 또 조소앙이

벌써 한국 독립당을 재건한다 하니 내가 새 단체를 재건하더라도 통일을 파괴하는

책임은 지지 아니하리라 하여 동지들의 찬동을 얻어 대한국민당을 조직하였다.


 (다음페이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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