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근현대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하권) 4

올드코난 2010. 7. 10. 15:42
반응형

백범일지 (하권)

김구선생 일대기

 


임시정부에서는 한형권의 러시아에 대한 대표권을 파면하고 안공근을 대신

보내었으나 별효과가 없어서 임시정부와 러시아와의 외교관계는 이내 끊어지고

말았다.

  상해에 남아 있는 공산당원들은 국민대표회가 실패한 뒤에도 좌우 통일이라는

미명으로 민족운동자들을 달래어 지금까지 하여 오던 민족적 독립운동을 공산주의

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자고 떠들었다. 재중국 청년동맹, 주중국 청년동맹이라는 두 파

공산당의 별동대로 상해에 있는 우리 청년들은 쟁탈하면서 같은 소리를 하였다.

민족주의자가 통일하여서 공산혁명운동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또 한 희극이 생겼다. '식민지에서는 사회운동보다 민족독립운동을 먼저

하여라.'하는 레닌의 새로운 지령이었다. 이에 어제까지 민족독립운동을 비난하고

조소하던 공산당원들은 경각간에 민족독립운동을 비난하고 조소하던 공산당원들은

경각간에 민족독립운동자로 졸변하여 민족독립이 공산당의 당시라고 부르짖었다.

공산당이 이렇게 되면 민족주의자도 그들을 배척할 이유가 없어졌으므로 유일독립당

촉성회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입으로 하는 말만 고쳤을 뿐이요, 속은 그대로 있어서

민족운동이란 미명하에 민족주의자들을 끌어 넣고는 그들의 소위 헤게모니(주도권)

옭아 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민족주의자들도 그들의 모략이나 전술을 다

알아서 그들의 손에 쥐어지지 아니하므로 자기네가 설도 하여 만들어 놓은 유일독립

촉성회를 자기네 음모로 깨뜨려 버리고 말았다.

  그러고 생긴 것이 한국독립당이니 이것은 순전한 민족주의자의 단체여서 이동녕.

안창호, 조완구, 이유필, 차이석, 김붕준, 송병조 및 내가 수뇌가 되어 조직한

것이었다. 이로부터 민족운동자와 공산주의자가 딴 조직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민족주의자가 단결하게 되매 공산주의자들은 상해에서 할 일을 잃고 남북 만주로

달아났다. 거기는 아직 동포들의 민족주의적 단결이 분산, 박약하고 또 공산주의의

정체에 대한 인식이 없었으므로, 그들은 상해에서보다 더 맹렬하게 날뛸 수가 있었다.

예하면 이상룡의 자손은 공산주의에 충실한 나머지 살부회(아비 죽이는 회)까지

조직하였다. 그러나 제 아비를 제 손으로 죽이지 않고 회원끼리 서로 아비를 바꾸어

죽이는 것이라 하니 아직도 사람의 마음이 조금은 남은 것이었다. 이 붉은 무리는

만주의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 남군정서, 북군정서 등에 스며들어가

능란한 모략으로 내부로부터 분해시키고 상극을 시켜 이 모든 기관을 혹은 붕괴하게

하고 혹은 서로 싸워서 여지없이 파괴하여 버리고 동포끼리 많은 피를 흘리게 하니,

백광운, 김좌진, 김규식(나중에 박사라고 된 김규식은 아니다)등 우리 운동에 없지

못할 큰 일꾼들이 이통에 아까운 희생이 되고 말았다.

  국제 정세의 우리에게 대한 냉담, 일본의 압박 등으로 민족의 독립 사상이 날로

감쇄하던 중에 공산주의자의 교란으로 민족전선은 분열에서 혼란으로, 혼란에서

궤멸로 굴러떨어져 갈 뿐이었는데, 엎친데 덮치기로 만주의 주인이라 할 장작림이

일본의 꾀에 넘어가서 그의 치하에 있는 독립운동자를 닥치는 대로 잡아 일본에

넘기고, 심지어는 중국 백성들이 한인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가서 왜 영사관에서 한

개에 많으면 10, 적으면 3,4원의 상금을 받게 되고, 나중에는 우리 동포 중에도

독립군의 소재를 밀고하는 일까지 생겼으니, 여기는 독립운동자들이 통일이 없이 셋,

다섯으로 갈라져서 재물, 기타로 동포에게 귀찮음을 준 책임도 없지 아니하다.

이러하던 끝에 왜가 만주를 점령하여, 소위 만주국이란 것을 만드니 우리 운동의 최대

근거지라 할 만주에 있어서의 우리 운동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다.

  애초에 만주에 있던 독립운동 단체는 다 임시정부를 추대하였으나 차차로

군웅할거의 폐풍이 생겨, 정의부와 신민부가 우선 임시정부의 절제를 안 받게 되었다.

그러나 참의부만은 끝까지 임시정부에 대한 의리를 지키더니 이 셋이 합하여 새로

정의부가 된 뒤에는 아주 임시정부와는 관계를 끊고 자기들끼리도 사분오열하여 서로

제 살을 깎고 있다가 마침내 공산당으로 하여 서로 제 목숨을 끊는 비극을 연출하고

막을 내리고 말았으니 진실로 슬픈 일이다.

  상해의 정세도 소위 양패구상으로 둘이 싸워 둘이 다 망한 셈이 되었고 한국독립당

하나로 겨우 민족진영의 껍데기를 유지할 뿐이었다.

  임시정부에는 사람도 돈도 들어오지 아니하여 대통령 이승만이 물러나고 박은식이

대신 대통령이 되었으나 대통령제를 국무령제로 고쳐 놓았을 뿐으로 나가고, 1

국무령으로 뽑힌 이상룡은 서간도로부터 상해로 취임하러 왔으나 각원을 고르다가

지원자가 없어 도로 서간도로 물러가고, 다음에 홍면희(나중에 홍진)가 선거되어

진강으로부터 상해에 와서 취임하였으나 역시 내각조직에 실패하였다. 이리하여

임시정부는 한참 동안 무정부 상태에 빠져서 의정원에서 큰 문제가 되었다.

  하루는 의정원 의장 이동녕 선생이 나를 찾아와서 내가 국무령이 되기를 권하였으나

나는 두 가지 이유로 사양하였다. 첫째 이유는 나는 해주 서촌의 일개 김존위(경기도

지방의 영좌에 상당한 것)의 아들이니 우리 정부가 아무리 아직 초창 시대의 추형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나같이 미천한 사람이 일국의 원수가 된다는 것은 국가와 민족의

위신에 큰 관계가 있다는 것이요, 둘째로 말하면 이상룡, 홍면희 두 사람도 사람을 못

얻어서 내각조직에 실패하였거늘 나 같은 자에게 더욱 응할 인물이 없을 것이란

것이었다. 그런즉 이씨 말이 첫째는 이유가 안 되는 것이니 말할 것도 없고 둘째로

말하면 나만 나서면 따라 나설 사람이 있다고 강권하므로 나는 승낙하였다. 이에

의정원의 정식 절차를 밟아서 내가 국무령으로 취임하였다.

  나는 윤기섭, 오영선, 김갑, 김철, 이규홍 등으로 내각을 조직하고 현재의 제도로는

내각을 조직하기가 번번이 곤한할 것을 통절히 깨달았으므로 한 사람에게 책임을

지우는 국무령제를 폐지하고 국무위원제로 개정하여 의정원의 동의를 얻었다. 그래서

나는 국무위원의 주석이 되었으나 제도로 말하면 주석은 다만 회의의 주석이 될

뿐이요, 모든 국무위원은 권리에나 책임에나 평등이었다. 그리고 주석은 위원들이 번

차례로 할 수 있는 것이므로 매우 편리하여 종래의 모든 분리를 일소할 수가 있었다.

  이렇게 하여 정부는 자리가 잡혔으나 경제 곤란으로 정부의 이름을 유지할 길이

망연하였다. 정부의 집세가 30, 심부름꾼 월급이 20원 미만이었으나, 이것도 낼 힘이

없어서 집주인에게 여러 번 송사를 겪었다.

  다른 위원들은 거의 다 가권이 있었으나 나는 아이들 둘도 다 본국 어머니께로

돌려보낸 뒤라 홀몸이었다. 그래서 나는 임시정부 정청에서 자고 밥은 돈벌이 직업을

가진 동포의 집으로 이집 저집 돌아다니면서 얻어 먹었다. 동포의 직업이라 하여 전차

회사의 차표 검사원인 인스펙터가 제일 많은 직업이어서 70명 가량 되었다. 나는

이들의 집으로 다니며 아침 저녁을 빌어먹는 것이니, 거지 중에는 상거지였다. 다들 내

처지를 잘 알므로 누구나 내게 미운밥은 아니 주었다고 믿는다. 특히 조봉길, 이춘태,

나우, 진희창, 김의한 같은 이들은 절친한 동지들이니 더 말할 것 없고 다른 동포들도

내게 진정으로 동정하였다.


 (다음페이지 계속)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