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근현대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38

올드코난 2010. 7. 10.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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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김구선생 일대기

 


또 어머니와 아내가 서울서 내려와서 종산 우종서 목사에게 의탁하여 있을 때에는

준영 삼촌이 소바리에 양식을 실어다 주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이렇게 준영 삼촌의 일을 고맙게 말씀하시고 나서,

  "네 삼촌님이 네게 대한 정분이 전과 달라 매우 애절하시다. 네가 나온 줄만 알면

보러 오실 것이다. 편지나 하여라."

하셨다.

  어머니는 또 내 장모도 전 같지 않아서 나를 소중하게 아니, 거기도 출옥하였다는

기별을 하라고 하셨다. 내가 서대문 감옥에 있을 때에 장모가 여러 번 면회를 와

주셨다.

  나는 곧이라도 준영 숙부를 찾아가 뵈옵고 싶었으나 아직 가출옥중이라 어디를

가려면 일일이 헌병대의 허가를 얻어야 하는데 왜놈에게 고개 숙이고 청하기가 싫어서

만기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는 정초에 세배 겸 준영 숙부를 찾을 작정이었다.

  그 후 내 거주 제한이 해제되어서 김용진군의 부탁으로 수일 타작간검을 다녀왔더니

준영 숙부가 다녀가셨다. 점잖은 조카를 보러오는 길이라 하여 남의 말을 빌어 타고

오셨는데 이틀이 지나도 내가 아니 돌아오기 때문에 섭섭하게 돌아가셨다는 어머니의

말씀이었다.

  정초가 되었다. 나는 찾을 어른들을 찾고, 어머니를 찾아 세배 오는 손님들 접대도

끝이 나서 초닷샛날은 해주로 가서 준영 숙부님을 뵈옵고 오래간만에 성묘도 하리라고

벼르고 있던 차에 바로 초나흗날 저녁때에 제종제 태운이가 준영 숙부께서

별세하셨다는 기별을 가지고 왔다. 참으로 경악하였다. 다시는 준영 숙부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게 되었다. 아버지 4형제 중에 아들이라고는 나 하나뿐, 준영 숙부는 딸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오직 하나인 조카 나를 못 보고 떠나시는 숙부의 심정이

어떠하셨을까. 백영 백부는 관수, 태수 두 아들이 있었으나 다 조졸하여 없고 딸 둘도

시집간 지 얼마 아니하여 죽어서 자손이 없고 필영, 준영 두 숙부는 각각 딸 하나씩이

있을 뿐이었다.

  날이 새는 대로 나는 태운과 함께 해주로 달려가서 준영 숙부의 장례를 주장하여

텃골 고개 동녘 기슭에 산소를 모셨다. 그리고는 돌아가신 준영 숙부의 가사 처리를

대강하고 선친 묘소에 손수 심은 잣나무를 점검하고 거기를 떠난 뒤로는 이내 다시

본향을 찾지 못하였다. 당숙모와 재종조가 생존하시다 하나 뵈올 길이 망연하다.

  나는 아내가 보고 있는 안신학교 일을 좀 거들어 주었으나 소위 전과자인 나로서,

그뿐 아니라 시국이 변하여서 나같은 사람이 전과같이 당당하게 교육 사업에 종사할

수도, 더구나 신민회와 같은 정치 운동을 다시 계속할 수도 없었다. 지금까지

애국자이던 사람들은 해외로 망명하거나 문을 닫고 숨을 길밖에 없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왜놈은 우리 민족의 청소년을 우리 지도자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백방으로

막아 놓고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어서 농촌 사업이나 해보려고 마음을 먹고

김홍량 일문의 농장 중에 소작인의 풍기가 괴악한 동산평 농장의 농감이 되기를

자청하였다. 동산평이란 데는 수백년 궁장으로, 감관들이 협잡을 하고 농민을

타락시켜서 집집이 도박이요, 사람사람이 모두 속임질과 음해로 일을 삼아서 할 수

없이 가난하고 괴악하게 된 부락이었다. 게다가 이곳은 수토가 좋지 못하여 토질

구덩이로 소문이 났었다.

  김씨네는 내가 이런 데로 가는 것을 원치 아니하여 경치도 수토도 좋은 다른

농장으로 가라고 권하였다. 그들은 내가 한문 야학으로 벗을 삼아 은거하는 생활을

하려는 것으로 아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고집하여 동산평으로 왔다.

  나는 도박하는 자, 학령 아동이 있고도 학교에 안 보내는 자의 소작을 불허하고 그

대신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자에게 상등답 이 두락을 주는 법을 내었다. 이리하여

학부형이 아니고는 땅을 얻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오랫 동안 이 농장 마름으로 있으면서 소작인을 착취하고 도박을 시키던

노형극군 형제의 과분한 소작지를 회수하여서 근면하고도 땅이 부족한 사람에게

분배하였다. 이 때문에 나는 노형극에게 팔을 물리고 집에 불을 놓는다는 위협을

받았으나 조금도 굴치 아니하고 마침내 이들 형제에게 항복 받아서 다시는

성군작당하여 남을 음해하는 일을 아니하기로 맹세를 시켰다.

  이곳은 본래 학교가 없던 데라 나는 곧 학교를 세우고 교원을 연빙하였다. 처음에는

20명 가량의 아동으로 시작하였으나 이 농장 작인의 자녀가 다 입학하게 되니 제법

학교가 커져서 교원 한 사람으로는 부족하여 나 자신도 시간을 내어서 도왔다.

장덕준은 재령에서, 지일청은 나와 같은 지방에서 나와 비슷한 농촌 개발 운동을 하고

있었다.

  내 운동은 상당한 효과를 거두어서 동산평에는 도박이 없어지고 이듬해 추수 때에는

작인의 집에 볏섬이 들어가 쌓였다고 작인의 아내들이 기뻐하였다. 지금까지는

노름빚과 술값으로 타작 마당에서 일년 소출을 몽땅 빚장이에게 빼앗기고 농민은 키만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나는 농촌 중에도 가장 괴악한 동산평을 이

모양으로 그만하면 쓰겠다 할 정도의 농촌을 만들어 보려 하였다. 그러나 기미년

3월에 일어난 만세 소리에 나는 이 사업에서 손을 떼고 고국을 떠나게 되었다. 떠날

날을 하루 앞두고 나는 작인들을 동원하여 만세 부르는 운동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듯이 가래질을 하고 있었다. 내 동정을 살피러 왔던 왜 헌병도 이것을 보고는

안심하고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그 이튿날 나는 사리원으로 가서 경의선 열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 신의주에서

재목상이라 하여 무사히 통과하고 안동현에서는 좁쌀 사러 왔다고 칭하였다.

  안동현에서 이레를 묵고 영국 국적인 이륭양행 배를 타고 동지 15명이 나흘 만에

무사히 상해 포동 마두에 도착하였다. 안동현을 떠날 때에는 아직도 얼음덩어리가

첩첩이 쌓인 것을 보았는데 황포강가에 벌써 녹음이 우거졌다. 공승서리 15호에서

첫날밤을 잤다.

  이때에 상해에 모인 인물 중에 내가 전부터 잘 아는 이는 이동녕, 이광수, 김홍서,

서병호 네 사람이었고 그 밖에 일본, 아령, 구미 등지에서 이번 일로 모인 인사와

본래부터 와 있는 이가 5백여 명이나 된다고 하였다.

  이튿날 나는 벌써부터 가족을 데리고 상해에 와 있는 김보연 집을 찾아서 거기서

숙식을 하게 되었다. 김군은 내가 장연에서 교육사업을 총감하는 일을 할 때에 나를

성심으로 사랑하던 청년이다. 김 군의 지도로 이동녕, 이광수, 김홍서, 서병호 등

옛동지를 만났다.


 (다음페이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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