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근현대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하권) 1

올드코난 2010. 7. 10.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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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하권)

김구선생 일대기

 


머리말

 

  내 나이 이제 육십 칠, 중경 화평로 오사야항 1호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에서 다시

이 붓을 드니, 오십 삼세 때 상해 법조계 마랑로 보경리 4호 임시정부 청사에서

"백범일지" 상권을 쓰던 때에서 14년의 세월이 지난 후이다.

  나는 왜 "백범일지"를 썼던고?

  내가 젊어서 붓대를 던지고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제 힘도 재주도 헤아리지

아니하고 성패도 영욕도 돌아봄이 없이 분투하기 30 여 년, 그리고 명의만이라도

임시정부를 지키기 10 여 년에 이루어 놓은 일은 하나도 없이 내 나이는 60

바라보고 있었다. 이에 나는 침체된 국면을 타개하고 국민의 쓰러지려 하는 3.1

운동의 정신을 다시 떨치기 위하여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들에게 편지로

독립운동의 위기를 말하여 돈의 후원을 얻어 가지고 열혈남자를 물색하여 암살과

파괴의 테러 운동을 계획한 것이었다. 동경사건과 상해사건 등이 다행히 성공되는

날이면 냄새나는 내 가죽껍데기도 최후가 될 것을 예기하고 본국에 있는 두 아들이

장성하여 해외로 나오거든 그들에게 전하여 달라는 뜻으로 쓴 것이 이 "백범일지".

나는 이것을 등사하여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몇 분 동지에게 보내어 후일 내 아들에게

보여주기를 부탁하였었다.

  그러나 나는 죽을 땅을 얻지 못하고, 천한 목숨이 아직 남아서 "백범일지" 하권을

쓰게 되었다. 이때에는 내 두 아들도 이미 장성하였으니 그날을 위하여서 이런 것을

쓸 필요는 없어졌다. 내가 지금 이것을 쓰는 목적은 해외에 있는 동지들이 내 50

분투 사정을 보고 허다한 과오를 은감으로 삼아서 다시 복철을 밟지 말기를 원하는

노파심에 있는 것이다.

  지금 이 하권을 쓸 때의 정세는 상해에서 상권을 쓸 때의 것보다는 훨씬

호전되었다. 그때로 말하면 임시정부라고, 외국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한인으로도 국무위원과 십수 인의 의정원 의원 외에는 와 보는 자도 없었다. 그야말로

이름만 남고 실상은 없는 임시정부였었다. 그런데 하권을 쓰는 오늘날로 말하면 중국

본토에 있는 한인의 각당 각파가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옹호할 뿐더러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만여 명 동포가 이 정부를 추대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상납하고 있다. 또 외교로

보더라도 종래에는 중국, 소련, 미국의 정부 당국자가 비밀한 찬조는 한 일이 있으나

공식으로는 거래가 없었던 것이, 지금에는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 씨가,

  "한국은 장래에 완전한 자주독립국이 될 것이라."

고 방송하였고 중국에서도 입법원장 손과씨가 공공한 석상에서,

  "일본의 제국주의를 박멸하는 중국의 양책은 한국임시정부를 승인함에 있다."

부르짖었으며, 우리 자신도 워싱턴에 외교위원부를 두어 이승만 박사를 위원장으로

임명하여 외교와 선전에 힘을 쓰고 있고, 또 군정으로 보더라도 한국 광복군이

정식으로 조직되어 이청천으로 총사령을 삼아 서안에 사령부를 두고 군사의 모집과

훈련과 작전을 계획 중이며, 재정도 종래에는 독립운동의 침체, 인심의 퇴축, 적의 압박,

경제의 곤란 등으로 임시정부의 수입이 해가 갈수록 감하여 집세를 내기도 어려울

지경이던 것이 홍구 포탄 사건 이래로 내외국인의 임시정부에 대한 인식이 변하여서

점차로 정부의 수입도 늘어, 민국 23년도에는 수입이 53만원 이상에 달하였으니, 실로

임시정부 설립 이래의 첫기록이었다. 이 모양으로 임시정부의 상태는 이 책 상권을 쓸

때보다 나아졌지마는 나 자신으로 말하면 일부일 노병과 노쇠를 영접하기에

골몰했다. 상해시대를 죽자고나 하던 시대라 하면 중경시대는 죽어가는 시대라고 할

것이다. 만일 누가 어떤 모양으로 죽는 것이 네 소원이냐 한다면 나는 최대한 욕망은

독립이 다 된 날 본국에 들어가 영광의 입성식을 한 뒤에 죽는 것이지마는 적어도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들을 만나 보고 오는 길에 비행기 위에서 죽어서 내 시체를

던져 그것이 산에 떨어지면 날짐승 길짐승의 밥이 되고 물에 떨어지면 물고기의

뱃속에 영장하는 것이다.

  세상은 고해라더니 살기도 어렵거니와 죽기도 또한 어렵다. 나는 서대문 감옥에서와

인천 축항공사장에서 몇 번 자살할 생각을 가졌으나 되지 못하였고, 안매산, 명근 형도

모처럼 죽으려고 나흘이나 식음을 전폐한 것을 서대문 옥리들이 억지로 달걀을 입에

흘려 넣어 죽지 못하였으니, 죽는 것도 자유가 있는 자라야 할 일이어서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다.

  나의 칠십 평생을 회고하면 살려고 하여 산 것이 아니요, 살아져서 산 것이고

죽으려고 하여도 죽지 못한 이 몸이 필경은 죽어져서 죽게 되었다.

 

    .11. 3.1 운동의 상해

 

  기미년 3, 안동현에서 영국 사람 쏠지의 배를 타고 상해에 온 나는 김보연 군을

앞세우고 이동녕 선생을 찾았다. 서울 양기탁 사랑에서 서간도 무관학교 의논을 하고

헤어지고는 10여 년 만에 서로 만나는 것이었다. 그때에 광복사업을 준비할 전권의

임무를 맡았던 선생의 좋던 신수는 10여 년 고생에 약간 쇠하여 얼굴에 주름살이

보였다. 서로 악수하니 감개가 무량하였다.

  내가 상해에 갔을 때에는 먼저 와 있던 인사들이 신한 청년당을 조직하여 김규식을

파리 평화회의에 대한민족 대표로 파견한 지 벌써 두 달이나 후였다.

  3.1 운동이 일어난 뒤에 각지로부터 모여온 인사들이 임시정부와 임시

의정원을 조직하여 중외에 선포한 것이 4월 초순이었다. 이에 탄생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반은 국무총리 이승만 박사, 그 밑에 내무, 외무, 재무, 법무, 교통 등

부서가 있어 광복운동의 여러 선배 수령을 그 총장에 추대하였다. 총장들이 원지에

있어서 취임치 못하므로 청년들을 차장으로 임명하여 총장을 대리케 하였다. 내가

내무총장 안창호 선생에게 정부 문파수를 청원한 것이 이 때였다.

  나는 문 파수를 청원한 것이 경무국장으로 취임하게 되니 이후 5년간 심문관 판사.

검사의 직무와 사형 집행까지 혼자 겸하여서 하게 되었다. 왜 그런고 하면 그때에

범죄자의 처벌이 설유방송이 아니면 사형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김도순이라는

17세의 소년이 본국에 특파되었던 임시정부 특파원의 뒤를 따라 상해에 와서 왜의

영사관에 매수되어 그 특파원을 잡는 앞잡이가 되려고 돈 10원을 받은 죄로

미성년자임에도 불구하고 극형에 처한 것은 기성 국가에서는 보지 못할 일이었다.

  내가 맡은 경무국의 임무는 기성 국가에서 보통 경찰 행정이 아니요, 왜의 정탐의

활동을 방지하고 독립운동자가 왜에게 투항하는 것을 감시하며 왜의 마수가 어느

방면으로 들어오는가를 감시하는 데 있었다. 이 일을 하기 위하여 나는 정복과 사복의

경호원 20여 명을 썼다. 이로써 홍구의 왜 영사관과 대립하여 암투가 시작되었다.

  당시 프랑스 조제 당국은 우리의 국정을 잘 알므로 일본 영사관에서 우리 동포의

체포를 요구해 온 때에는 미리 우리에게 알려주어서 피하게 한 뒤에 일본 경관을

대동하고 빈 집을 수사할 뿐이었다.

  왜구 전중의일이 상해에 왔을 때에 황포마두에서 오성륜이 그에게 포탄을 던졌으나

폭발되지 아니하므로 권총을 쏜 것이 전중은 아니 맞고 미국인 여자 한 명이 맞아

죽은 사건이 났을 때에 일본, 영국, 법국 세 나라가 합작하여 법조계의 한인을 대거

수색한 일이 있었다. 우리 집에는 어머니가 본국으로부터 상해에 오신 때였다. 하루는

이른 새벽에 왜 경관 일곱 놈이 프랑스 경관 서대납을 앞세우고 내 침실로 들어섰다.

서대납은 나와 잘 아는 자라 나를 보더니 옷을 입고 따라오라 하며 왜 경관이 나를

결박하려는 것을 금하였다. 프랑스 경무청에 가니 원세훈 등 다섯 사람이 벌써 잡혀와

있었다. 프랑스 당국은 왜 경관이 우리를 심문하는 것도 허치 아니하고 왜 영사관으로

넘기라는 것도 아니 듣고, 나로 하여금 다섯 사람을 담보케 한 후에 나를 아울러 모두

석방해 버렸다. 우리 동포 관계의 일에는 내가 임시정부를 대표하여 언제나 배심관이

되어 프랑스 조계의 법정에 출석하였으므로 현행범이 아닌 이상 내가 담보하면

석방하는 것이었다. 왜 경찰이 나와 프랑스 당국과의 관계를 안 뒤로는 다시는 내

체포를 프랑스 당국에 요구하는 일이 없고 나를 법조계 밖으로 유인해 내려는 수단을

쓰므로 나는 한 걸음도 조계 밖에는 나가지 아니하였다.


 (다음페이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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