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근현대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하권) 3

올드코난 2010. 7. 10.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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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하권)

김구선생 일대기

 


내가 경무국장이던 때에 있던 일은 여기에서 끝내고 상해에 임시정부가 생긴 이후에

일어난 우리 운동 전체의 파란곡절을 회상해 보기로 하자.

  기미년, 즉 대한민국 원년에는 국내나 국외를 막론하고 정신이 일치하여 민족

독립운동으로만 진전되었으나 당시 세계사조의 영향을 따라서 우리 중에도 점차로

봉건이니, 무신혁명이니 하는 말을 하는 자가 생겨서 단순하던 우리 운동선에도

사상의 분열,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임시정부 직원 중에도 민족주의니, 공산주의니

하여 음으로 양으로 투쟁이 개시되었다. 심지어 국무총리 이동휘가 공산혁명을

부르짖고 이에 반하여 대통령 이승만은 데모크라시를 주장하여 국무회의 석상에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못하고 대립과 충돌을 보는 기괴한 현상이 중생첩출하였다. 예하면

국무회의에서는 러시아에 보내는 대표로 여운형, 안공근, 한형권 세 사람을

임명하였건마는, 정작 여비가 손에 들어오매 이동휘는 제 심복인 한형권 한 사람만을

몰래 떠나 보내고 한이 시베리아를 떠났을 때쯤 하여서 이것을 발표하였다. 이동휘는

본래 강화진 위대참령으로서 군대 해산 후에 해삼위(블라디보스톡의 우리 음)

건너가 이름을 대자유라고 행세한 일도 있다.

  하루는 이동휘가 내게 공원에 산보가기를 청하기로 따라 갔더니 조용한 말로 자기를

도와 달라 하기로 나는 좀 불쾌하여서 내가 경무국장으로 국무총리를 호위하는 데 내

직책에 무슨 불찰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씨는 손을 흔들며, "그런 것이 아니라, 대저

혁명이라는 것은 피를 흘리는 사업인데,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독립운동은 민주주의

혁명에 불과하니 이대로 독립을 하더라도 다시 공산주의 혁명을 하여야 하겠은즉 두

번 피를 흘림이 우리 민족의 대불행이 아닌가. 그러니 적은이(아우님이라는 뜻이니

이동휘가 수하 동지에게 즐겨 쓰는 말이다)도 나와 같이 공산혁명을 하는 것이

어떤가."

하고 내 의향을 묻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나는 이씨에게,

  "우리가 공산혁명을 하는 데는 제 3국제공산당의 지휘와 명령을 안 받고도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이씨는 고개를 흔들며,

  "안 되지요."

한다. 나는 강경한 어조로,

  "우리 독립운동은 우리 대한민족 독자의 운동이요, 어느 제 3자의 지도나 명령에

지배되는 것은 남에게 의존하는 것이니 우리 임시정부 헌장에 위반되오. 총리가 이런

말씀을 하심은 대불가니 나는 선생의 지도를 받을 수가 없고, 또 선생께 자중하시기를

권고하오."

하였더니 이동휘는 불만한 낯으로 돌아섰다.

  이 총리가 몰래 보낸 한형권이 러시아 국경 안에 들어서서 우리 정부의 대표로 온

사명을 국경 관리에게 말하였더니 이것이 모스크바 정부에 보고되어, 그 명령으로 각

철도 정거장에는 재류 한인 동포들이 태극기를 두르고 크게 환영하였다. 모스크바에

도착하여서는 소련 최고 수령 레닌이 친히 한형권을 만났다. 레닌이 독립운동 자금은

얼마나 필요하냐 하고 묻는 말에 한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2백만 루우블이라고

대답한즉 레닌이 웃으며,

  "일본을 대항하는데 2백만 루우블로 족하겠는가?"

하고 반문하므로 한은 너무 적게 부른 것을 후회하면서 본국과 미국에 있는 동포들이

자금을 마련하니 당장 그만큼이면 된다고 변명하였다. 례닌은,

  "제 민족의 일은 제가 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고 곧 외교부에 명하여 2백만 루우블을 한국 임시정부에 지불하게 하니 한형권은 그

중에서 제 1차 분으로 40만 루우블을 가지고 모스크바를 떠났다.

  이동휘는 한형권이 돈을 가지고 떠났다는 기별을 받자 국무원에는 알리지 아니하고

또 몰래 비서장이요, 자기의 심복인 김립을 시베리아로 마중 보내어 그 돈을

임시정부에 내놓지 않고 직접 자기 손에 받으려 하였으나, 김립은 또 제 속이 따로

있어서 그 돈으로 우선 자기 가족을 위하여 북간도에 토지를 매수하고 상해에

돌아와서도 비밀히 숨어서 광동 여자를 첩으로 들이고 호화롭게 향락생활을

시작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이동휘에게 그 죄를 물으니 그는 국무총리를 사임하고

러시아로 도망하여 버렸다.

  한형권은 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통일 운동의 자금이라 칭하고 20만 루우블을 더

얻어 가지고 몰래 상해에 들어와 공산당 무리들에게 돈을 뿌려서 소위

국민대표회의라는 것을 소집하였다. 그러나 공산당도 하나가 못 되고 세 파로

갈렸으니 하나는 이동휘를 수령으로 하는 상해파요, 다음은 안병찬, 여운형을 두목으로

하는 일쿠츠코파요, 그리고 셋째는 일본에 유학하는 학생으로 조직되어 일인

복본화부의 지도를 받는 김준연 등의 엠엘(ML)당파였다. 엠엘당은 상해에서는

미미하였으나 만주에서는 가장 맹렬히 활동하였다.

  있을 것은 다 있어서 공산당 외에 무정부당까지 생겼으니 이을규, 이정규 두 형제와

유자명 등은 상해, 천진 등지에서 활동하던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의 맹장들이었다.

  한형권의 붉은 돈 20만 원으로 상해에 개최된 국민대회라는 것은 참말로

잡동사니회라는 것이 옳을 것이었다. 일본, 조선, 중국, 아령 각처에서 무슨 단체 대표,

무슨 단체 대표하는 형형색색의 명칭으로 2백여 대표가 모여들었는데, 그 중에서

일쿠츠코파, 상해파 두 공산당이 민족주의자인 다른 대표들을 서로 경쟁적으로 끌고

쫓고 하여 일쿠츠코파는 창조론, 상해파는 개조론을 주장하였다. 창조론이란 것은 지금

있는 정부를 해소하고 새로 정부를 조직하자는 것이요, 개조론이란 것은 현재의

정부를 그냥 두고 개조만 하자는 것이었다. 이 두 파는 암만 싸워도 귀일이 못 되어서

소위 국민대표회는 필경 분열되고 말았고, 이에 창조파에서는 제 주장대로

'한국정부'라는 것을 '창조'하여 본래 정부의 외무총장인 김규식이 그 수반이 되어서 이

'한국정부'를 끌고 해삼위로 가서 러시아에 출품하였으나, 모스크바가 돌아보지도

아니하므로 계불입량하여 흐지부지 쓰러지고 말았다.

  이 공산당 두 파의 싸움 통에 순진한 독립운동자들까지도 창조니 개조니 하는

공산당 양파의 언어모략에 현혹하여 시국이 요란하므로 당시 내무총장이던 나는

국민대표회에 대하여 해산을 명하였다. 이것으로 붉은 돈이 일으킨 한 막의 희비극이

끝을 맺고 시국은 안정되었다.

  이와 전후하여 임시정부 공금 횡령법 김립은 오면직, 노종균 두 청년에게 총살을

당하니 인심이 쾌하다 하였다.


 (다음페이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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