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근현대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33

올드코난 2010. 7. 10.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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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김구선생 일대기

 


어떻게 하여서라도 이 자리를 모면하여 해외에서 활동하고 싶던 김홍량도 자기가

안명근의 부탁으로 신천 이원식에게 권고하였다는 것을 자백하였으니 도저히 빠지기

어려울 것이다. 심혈을 다 바치던 교육사업도 수포로 돌아가고 믿고 사랑하던 동지도

이제는 살아 나갈 길이 망연하니 분하기 그지 없었다. 어머니는 안악에 있던

가장집물을 다 팔아 가지고 내 옥바라지를 하시려고 서울로 올라오셨다. 내 처와 딸

화경이는 평산 처형네 집에 들렸다가 공판날이 되어서 온다는 어머니의 말씀이셨다.

  어머니가 손수 담으신 밥그릇을 열어 밥을 떠 먹으며 생각하니 이 밥에 어머니

눈물이 점점이 떨어졌을 것이었다. 18년 전 해주에서의 옥바라지와 인천 옥바라지를

하실 때에는 내외분이 고생을 나누기나 하셨건마는 이제는 어머니 혼자셨다. 어머님께

도움이 되기는커녕 위로를 드릴 능력이 있는 자가 그 누군가.

  이렁저렁 공판날이 되었다. 죄수를 태우는 마차를 타고 경성 지방 재판소 문전에

다다르니 어머니가 화경이를 업으시고 아내를 데리고 거기 서 계셨다.

  우리는 2호 법정이라는 데로 끌려 들어갔다. 법정 피고석 걸상에 앉은 차례는

수석에 안명근, 다음에 김홍량, 세째로는 나 그리고는 이승길, 배경진, 한순직, 도인권,

양성진, 최익형, 김용제, 최명식, 장윤근, 고봉수, 한정교, 박형병 등 모두 열 다섯 명이

늘어앉고 방청석을 돌아 보니 피고인의 친척, 친지와 남녀 학생들이 와 있었다.

변호사, 신문기자석에도 다 사람이 있었다. 한필호 선생이 경무총감부에서 매맞아

별세하고 신석충 진사는 사리원으로 호송되는 도중에 재령강 철교에서 투신 자살을

하였단 말을 여기서 들었다.

  소위 판결이라는 것은 안명근이 징역 종신이요, 김홍량, 김구, 이승길, 배경진,

한순직, 원행섭, 박만준 등 일곱 명은 징역15(원행섭, 박만준은 궐석이었다), 도인권,

양성진이 10, 최익형, 김용제, 장윤근, 고봉수, 한정교, 박형병은 각각 7, 또는

5년이니 이것은 강도사건 관계요, 보안법사건으로는 양기탁을 주범으로 하여 안태국,

김구, 김홍량, 주진수, 옥관빈, 김도희, 김용규, 고정화, 정달하, 감익룡과 이름은

잊었으나 김용규의 족질 한 사람이 있었는데 판결되기는 양기탁, 안태국, 김구, 김홍량,

주진수, 옥관빈은 징역 2년이요, 나머지는 1년으로부터 6개월이었다. 그리고 재판을

통하지 아니하고 소위 행정처분으로 이동휘, 이승훈, 박도병, 최종호, 정문원, 김영옥

19인은 무의도, 제주도, 고금도, 울릉도로 일년간 거주 제한이라는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김홍량이나 나는 강도로 15, 보안법으로 2, 모두 17

징역살이를 하게 된 것이었다.

  판결이 확정되어 우리는 종로 구치감을 떠나서 서대문 감옥으로 넘어갔다. 지금까지

미결수였으나 이제부터는 변통없는 전중이었다. 동지들의 얼굴을 날마다 서로 대하게

되고 이따금 말로 통정도 할 수 있는 것이 큰 위로였다.

  7, 5년 징역까지는 세상에 나갈 희망이 있지마는 10, 15년으로는 살아서 나갈

희망은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몸은 왜에 포로가 되어 징역을 지면서도 정신으로는

왜놈을 짐승과 같이 여기고 쾌활한 마음으로 낙천 생활을 하리라고 작정하였다. 다른

동지들도 다 나와 뜻이 같았다.

  옥중에 있는 동지들은 대개 아들이 있었으나 나는 딸이 하나가 있을 뿐이요, 아들이

없었다. 김용제 군은 아들이 4형제나 되므로 그 세째 아들 문량으로 하여금 내 뒤를

잇게 한다고 허락하였다. 나도 동지의 호의를 고맙게 받았다.

  또 한 가지 나로 하여금 비관을 품지 않게 하는 일이 있으니, 그것은 일본이 내가

잡혀오기 전에 생각하던 것과 같이 크고 무서운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본 것이었다.

밑으로는 형사, 순사로부터 꼭지로는 경무총감까지 만나 보는 동안에 모두 좀것들이요,

대국민다운 인물은 하나도 없었다. 가슴에 엑스광선을 대어서 내 속과 내력을 다

뚫어본다면서도 내가 17년 전의 김창수인 줄도 몰라보고 깝죽대는 도변이야말로

일본을 대표한 자인 것 같다.

  '일본은 한국을 오래 제 것을 만들지는 못한다. 일본의 운수는 길지 못하다.'

  나는 이렇게 단정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장래에 대하여서 비관하지 아니하게

되었다.

  허위 이강년 같은 큰 애국지사의 부하로 의병을 다니다가 들어왔다는 사람들이

인물로나 식견으로나 보잘 것 없음을 볼 때에는 낙심도 되지마는 이재명, 안중근 같은

의사의 동지로 잡혀 들어온 사람들의 애국심이 불같고 정신이 씩씩한 것을 보면,

교육만 하면 우리 민족은 좋은 국민이 될 것을 아니 믿을 수 없었다. 저 무지한

의병들도 일본에 복종하는 백성이 되지 아니하고 10, 15년의 벌을 받는 사람이 된

것만 해도 고맙고 존경할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나도 고후조 선생 같은 어른의

가르침이 없었던들 어찌 대의를 아는 사람이 되었으랴.

  옥에 있는 동안에 나는 내 심리가 차차 변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지난 10

년간에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서 무엇에나 저를 책망할지언정 남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남의 허물은 어디까지나 용서하는 그러한 부드러운 태도가 변하여서 일본에 대한

것이면 무엇이나 미워하고 반항하고 파괴하려는 결심이 생긴 것이었다.

  나는 아침 저녁으로 다른 죄수들과 같이 왜 간수에게 절을 하는 것이 무척 괴롭고

부끄러웠다. 다른 죄수들은 대의를 몰라서 그러하거니와 너는 고 선생의 제자가

아니냐 하고 양심을 때리는 것이 있었다.

  나는 내 손으로 밭갈고 길쌈함이 없이 오늘까지 먹고 입고 살아왔다. 그 먹은 밥과

입은 옷이 뉘게서 나왔느냐, 우리 대한 나라의 것이 아니냐. 나라가 나를 오늘날까지

먹이고 입힌 것이 왜놈에게 순종하여 붉은 요에 콩밥이나 얻어먹으라고 한 것이

아니었다.

 

  '(식인지식의인 소지평생막유위)

  사람의 밥을 먹고 사람의 옷을 입었으니, 품은 뜻은 평생토록 어김이 없어야 한다.'

 

  내가 대한 나라의 밥을 먹고 옷을 입고 살아 왔으니 이 수치를 참고 살아나서

앞으로 17년 후에 이 은혜를 갚을 공을 세울 수가 있느냐.

  내가 이 모양으로 고민할 때에 안명근 군이 굶어 죽기를 결심하였노라고 내게

말하기로 나는 서슴지 않고,

  "할 수 있거든 단행하시오."

하였다. 그날부터 안명근은 배가 아프다고 칭하고 제게 들어오는 밥은 다른 죄수에게

나눠주고 4,5일을 연해 굶어서 기운이 탈진하였다. 감옥에서는 의사를 시켜 진찰케

하였으나 아무 병이 없으므로 안명근을 결박하고 강제로 입을 벌리고 계란 등속을

흘려 넣어서 죽으려는 목숨을 억지로 붙들었다. 죽을 자유조차 없는 이 자리였다.

  "나는 또 밥을 먹소,"하고 안명근은 내게 기별하였다.

  우리가 서대문 감옥으로 넘어온 후에 얼마 아니하여서 또 중대사건이 생겼으니,

그것은 소위 사내 총독 암살음모라는 맹랑한 사건으로 전국에서 무려 7백여 명

애국자가 검거되어 경무총감부에서 우리가 당한 악형을 다 겪은 뒤에는 105인이

공판으로 회부된 사건이다. 105인 사건이라고도 하고 신민회 사건이라고도 한다. 2

형의 진행 중에 있던 양기탁, 안태국, 옥관빈과 제주도로 정배갔던 이승훈도 붙들려

올라왔다. 왜놈들은 새로 산 밭에 뭉우리돌을 다 골라 버리고야 말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대한이 제것으로 될까?


 (다음페이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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