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근현대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34

올드코난 2010. 7. 10.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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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김구선생 일대기

 


내가 복역한 지 칠팔 삭 만에 어머니께서 서대문 감옥으로 나를 면회하러 오셨다.

  딸깍하고 주먹 하나 드나들 만한 구멍이 열리기로 내다본즉 어머니가 서 계시고 그

곁에는 왜간수 한놈이 지키고 있다. 어머니는 태연한 안색으로,

  "나는 네가 경기 감사나 한 것보담 더 기쁘게 생각한다. 면회는 한 사람밖에

못한다고 해서 네 처와 화경이는 저 밖에 와 있다. 우리 세 식구는 잘 있으니 염려

말아라. 옥중에서 네 몸이나 잘 보중하여라. 밥이 부족하거든 하루 두 번씩 사식 들여

주랴?"

하시고 어성 하나도 떨리심이 없었다. 저렇게 씩씩하신 어머니께서 자식을 왜놈에게

빼앗기시고 면회를 하겠다고 왜놈에게 고개를 숙이고 청원을 하셨을 것을 생각하니

황송하고도 분하였다.

  우리 어머니는 참말 갸륵하셨다! 17년 징역을 받은 아들을 대할 때에 어쩌면 저렇게

태연하실 수가 있었으랴. 그러나 면회를 마치고 돌아가실 때에는 눈물이 앞을 가려서

발부리가 아니 보이셨을 것이다.

  어머니께서 하루 두 번 들여 주시는 사식을 한 번은 내가 먹고 한 번은 다른

죄수들에게 번갈아 나눠 주었다. 그들은 받아 먹을 때에는 평생에 그 은혜를 아니

잊을 듯이 굽신거리지마는 다음 번에 저를 아니 주고 다른 사람을 줄 때에는 "그게 네

의붓아비냐, 효자정문 내릴라." 이러한 소리를 하면서 내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면

그때에 내게 얻어 먹는 편이 들고 나서 나를 역성하므로 마침내 툭탁거리고 싸움이

벌어져서 둘이 다 간수에게 흠씬 얻어 맞는 일도 있었다. 나는 선을 한다는 것이

도리어 악이 되는 것이었다.

  나도 처음 서대문 감옥에 들어갔을 때에는 먼저 들어온 패들이 나를 멸시하였으나

소위 국사 강도범이란 것이 알려지면서부터는 대접이 변하였다. 더구나 이재명 의사의

동지들이 모두 학식이 있고 일어에 능통하여서 죄수와 간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을

때에는 통역을 하기 때문에 죄수들간에 세력이 있었는데, 그들이 나를 우대하는 것을

보고 다른 죄수들도 나를 어려워하게 되었다.

 나는 처음에는 한 백여 일 동안 수갑을 채인 대로 있었다. 더구나 첫날 수갑을

채우는 놈이 너무 단단하게 졸라서 살이 패이고 손목이 통통 부었으므로 이튿날

문제가 되어서,

  "왜 아프다고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고 하기로 나는,

  "무엇이나 시키는 대로 복종하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였다. 그랬더니,

  "이 다음에는 불편한 일이 있거든 말하라."

고 하였다.

  손목은 아프고 방은 좁아서 몹시 괴로웠으나 나는 꾹 참았다.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는 것이어서, 이러한 생활에도 차차 익으면 심상하게 되었다. 수갑도 끄르게 되어서

몸이 좀 편하게 되니 불현듯 최명식 군이 보고 싶었다. 수갑 끄른 자리에 허물은

지금도 완연히 남아 있다. 최군은 옴이 올라서 옴방에 있다 하니 나도 옴이 생기면

최군과 같이 있게 되리라 하여 인공적으로 옴을 만들었다. 의사의 순회가 있기 30

전쯤하여 철사 끝으로 손가락 사이를 꼭꼭 찔러 놓으면 그 자리가 볼록볼록 부르트고

말간 진물이 나와서 천연 옴으로 보였다. 이것은 내가 감옥살이에서 배운 부끄러운

재주였다.

  이 속임수가 성공하여 나는 옴장이 방으로 옮겨져서 최명식과 반가이 만날 수가

있었다. 반가운 김에 밤이 늦도록 둘이 이야기를 하다가 좌동이라 하는 간수놈에게

들켜서 누가 먼저 말을 하였느냐 하기로 내가 먼저 하였노라 하였더니 나를 창살

밑으로 나오라 하여 내어 세워 놓고 곤봉으로 난타하였다. 나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아니하고 맞았으나 그때에 맞은 것으로 내 왼편 귀 위의 연골이 상하여 봉충이가

되어서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러나 다행히 최군은 용서한다 하고 다시 왜말로,

  "하나시 헷소도 다다꾸도(이야기하면 때려줄 테야.)"

하고 좌등은 물러갔다.

  감옥에서 죄수에게 이렇게 가혹한 대우를 하기 때문에 죄수들은 더욱 반항심과

자포자기심이 생겼다. 그래서 사기나 횡령으로 들어온 자는 절도나 강도질을 하였다.

그리고 만기로 출옥하였던 자들도 다시 들어오는 자를 가끔 보았다. 민족적 반감이

충만한 우리를 왜놈의 그 좁은 소갈머리로는 도저히 감화할 수 없겠지마는 내

민족끼리의 나라에서 감옥을 다스린다 하면 단지 남의 나라를 모방만 하지 말고

우리의 독특한 제도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즉 감옥의 간수부터 대학교수의 자격이

있는 자를 쓰고 죄인을 죄인으로 보는 것보다는 국민의 불행한 일원으로 보아서

선으로 지도하기에만 힘을 쓸 것이요, 일반 사회에서도 입감자를 멸시하는 감정을

버리고 대학생의 자격으로 대우한다면 반드시 좋은 효과가 있으리라고 믿는다.

  왜의 감옥제도로는 사람을 작은 죄인으로부터 큰 죄인을 만들 뿐더러 사람의

자존심과 도덕심마저도 마비시켰다. 예하면 죄수들은 어디서 무엇을 도둑질하던

이야기, 누구를 어떻게 죽이던 이야기를 부끄러워함도 없이 도리어 자랑삼아서 하고

있었다. 그도 친한 친구에게면 몰라도 초면인 사람에게도 꺼림이 없고, 또 세상에

드러난 죄도 아니고 저 혼자만 아는 죄를 뻔뻔스럽게 말하는 것을 보아도 그들이

감옥에 들어와서 부끄러워하는 감정을 잃어버린 표다. 사람이 부끄러움을 잃을진대

무슨 짓은 못하랴. 짐승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감옥이란 이런 곳에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최명식과 함께 소제부의 일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죄수들이 부러워하는

'벼슬'이다. 우리는 공장에서 죄수들에게 일감을 돌려주고 뜰이나 쓸고 나면 할 일이

없어서 남들이 일하는 구경이나 돌아다녔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최 군과 나와는 죄수

중에서 뛰어난 인물을 고르기로 하였다. 내가 돌아보다가 눈에 띄는 죄수의 번호를

기억하고 명식 군도 기억하여 나중에 맞추어 보아서 둘의 본 바가 일치하는 자가

있으면 그의 내력과 인물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이 방법으로 우리는 한 사람을 골랐다. 그는 다른 죄수와 같이 차리고 같은 일을

하지마는 그 눈에 정기가 있고 동작에도 남다른 데가 있었다. 나이는 40내외였다.

인사를 청한즉 그는 충청북도 광산 사람이요, 5년 징역을 받아 이태를 치르고 앞으로

3년을 남긴 강도범으로 통칭 김진사라는 사람이었다. 나는 누구며 무슨 죄로 왔느냐고

묻기로, 나는 황해도 안악 사람이요, 강도로 15년을 받았다고 하였더니 김진사는,

  ", 짐이 좀 무겁소 그려."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그가 나에게 '초범이시오?' 하기로 그렇다고 대답할 때에 왜

간수가 와서 더 말을 못하고 헤어졌다.

  내가 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을 본 어떤 죄수가 나에게 그 사람을 아느냐 하기로

초면이라 하였더니, 그 죄수의 말이,

  "남도 도적 치고 그 사람 모르는 도적은 없습니다. 그가 유명한 삼남 불한당 괴수

김진사요. 그 패거리가 많이 잡혀 들어왔는데 더러는 병나 죽고 사형도 당하고 놓여

나간 자도 많지요."

하였다.


 (다음페이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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