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세계사

베트남전 지상전 확대와 남베트남 정국의 혼란

올드코난 2015. 2. 17.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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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파병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프랑스의 파병과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호찌민은 미국이 “20년동안 전쟁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20년 동안 전쟁을 할 것이다. 미국이 평화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초대하여 함께 차를 마시며 평화를 이룩할 것이다”고 경고하였다. 북베트남의 외교부 제1 대의원 쩐꾸앙꼬는 전쟁의 최우선 목표는 베트남의 통일, 그리고 통일된 베트남의 독립과 안전확보라고 기록하였다.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이러한 목표는 당시 동남아시아의 여러 신생독립국들이 바란 것과 그리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펜타곤 보고서는 “베트남의 팽창주의는 손쉽게 인접한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집어 삼킬 것이고,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심지어 인도네시아가 다음 목표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베트남 전쟁 이야기 13회: 지상전 확대와 남베트남 정국의 계속되는 혼란


미국 공군이 주둔한 비행장이 몇 차례 공격을 받게 되자, 미국은 무능한 남베트남군 대신 직접 공군 기지를 방어한다는 이유로 지상 전투 부대를 파병한다. 1965년 3월 8일 3,500 명의 미국 해병대가 파병되었고, 당시 미국 여론은 압도적으로 파병을 지지하였다. 이 전쟁이 장기화될 것으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3,500 명으로 시작된 미국 해병대의 파병은 그해 12월 200,000 명으로 늘었다. 애초에 천명한 파병의 목표는 방어 임무였지만, 미군의 군사는 오랫동안 공격적인 전쟁에 익숙해 있었고, 미군 사령부 역시 정치적 지침에 따라 방어 임무에 치중하는 것은 익숙하지 않았다. 12월, 빈지어 전투에서 남베트남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게릴라들이 치고 빠지기 작전을 유효하게 사용하여 강력한 남베트남군을 패퇴시킨 것이다. 6월 동써아이 전투 이후 남베트남군은 연이어 큰 전투에서 패배하게 된다.



작전 지역을 포기하는 비율이 늘고 사기가 바닥에 떨어지자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미국 태평양군 사령관인 U. S. 그런트 샤프 주니어 제독에게 상황이 매우 다급하다고 보고하자 샤프 주니어 제독은 “나는 미군의 에너지, 이동력, 그리고 화력이라면 충분히 민족해방전선을 제압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고 답했다.

이 답변을 회신 받은 웨스트모어랜드는 기존의 주베트남 미군 전략을 남베트남군 지원과 방어에서 직접 공격과 독자적인 작전 수행으로 전환하였다.


웨스트모어랜드는 전쟁 승리를 위한 세 단계 계획을 수립하였다.:

1 단계: 1965년 말까지 미국과 여타 “자유 세계” 군대가 위수 지역에서 영토를 잃는 경향을 멈출 필요가 있음.

2 단계: 미국과 동맹국의 군대가 게릴라와 적군을 포위 섬멸하는 대규모 공세를 시작. 이 단계는 적군이 지역 방어를 포기하고 패퇴할 때까지 계속하여 대부분의 지역을 회복할 때까지 계속.

3 단계: 2단계 작전 수행 후 12 개월 내지 18개월이 지났을 때 적군이 계속하여 저항할 경우, 남아있는 적군의 이동 기지 지역을 최종적으로 섬멸.


존슨 정부가 승인한 이 계획은 남베트남 정부가 게릴라를 억제할 책임이 있다고 하였던 케네디 정부의 구상과는 배치되는 것이었다.

웨스트모어랜드는 1967년 말까지는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 예측하였다. 존슨은 이러한 전략 변경을 언론에 알리지는 않았지만, 전쟁이 계속될 것이라고 말힌디.


미국의 이러한 정책 변환은 북베트남 및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과 보다 격렬한 무장 충돌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 계획은 미국이 직접 전투 수행에 나섬으로써 남베트남 정부가 보류하였던 다른 당면 과제들을 처리할 수 있도록 하자는 의도도 포함하고 있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미군의 의무 복무 기간은 1년이었다. 한 병사는 “우리가 베트남에 10년 동안 있지는 않게지만, 1년씩 열 번을 있을 것”이라고 자조하였다한다.


남베트남에는 온갖 물자가 넘쳐나게 되었는데, 스탠리 카노우는 “사이공의 PX(Post Exchange, 영내 매점) 규모는 뉴욕의 백화점 블루밍데일즈에 맞먹을 정도”였다고 기록하였다. 미국의 이러한 변화는 남베트남 사회의 경제에도 영향을 주었다. 남베트남에서는 부정부패가 만연하였다.


미국은 동남아시아조약기구(Southeast Asia Treaty Organization, SEATO)에 파병을 요청했다. 호주, 뉴질랜드, 대한민국, 태국, 그리고 필리핀이 베트남 전쟁에 파병하였다. 그러나, 북대서양 조약 기구의 회원국이었던 캐나다와 영국은 파병을 거부하고 미군은 파병된 동맹국 군대와 연합작전을 펼친다.


이 기간 동안에도 남베트남의 정치 상황은 매우 불안정하여 쿠데타 시도가 빈발하는데 공군 총사령관이었던 응우엔 까오 끼와 국무장관이었던 응우엔 번 티에우 등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1967년 티에우는 키와 연합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탈취하였다. 티에우 정부는 표면상으로는 민간 정부를 표방하였으나, 티에우가 군부를 장악한 상태에서 실권을 차지한 사실상 군사 정권이었다.


존슨 정부는 미디어 대응 정책으로 이른바 “최소한의 진실 정책”을 도입하였다. 언론통제이며 왜곡 보도가 시작된 것이다. 전쟁에 대한 뉴스와 이야기들은 정부의 통제하에 미디어에게 제공되었다. 이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대중들은 전쟁에 대한 정부의 공식발표를 믿지 않게 되었다. 이는 미국민들에게는 더 큰 불안과 반전 여론을 조장하게 만든 측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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