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세계사

남베트남의 극심한 혼란

올드코난 2015. 2. 17.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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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이야기 8회: 베트남 공화국의 수립과 남북 분단, 남베트남의 극심한 혼란 


1954년 5월 미국은 남베트남에 대한 경제 원조 계획을 발표하고 12월 23일 미국, 프랑스, 남베트남 간의 상호 방위 조약을 추진한다. 당시 미국은 냉전에 의한 소련과의 대립 속에서 베트남 문제를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미국의 군사 보호는 베트남 남북 모두의 군사 동맹 가입을 제한한 제네바 협약을 어긴 것이고 제국주의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려는 베트남인들의 의사에도 반하는 것이었다.

당시 바오 다이 지배하의의 베트남국은 국정 운영능력을 상실해 민심 이반이 극에 달해 있었다.


1955년 1월 미국은 군사고문단을 파견하면서 새로운 정권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응오딘지엠을 지지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바오 다이는 왕위를 내줄 생각이 없었고 미국과 갈등을 빚기 시작하였다.


1955년 6월 6일 북베트남의 호찌민 정부는 제네바 협정의 규정에 따라 베트남 통일 정부 구성을 위한 선거를 실시하기 위한 협의를 촉구했지만 6월 28일 미국의 국무장관 덜레스는 적당한 전제 조건 없이는 투표를 할 수 없다고 거부하였다. 결국 미국은 1955년 10월 23일 남베트남 지역의 국민 투표를 실시하였다. 바오 다이의 베트남국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남베트남 사람들은 왕국의 폐지와 공화국의 수립을 묻는 국민 투표를 환영하였다. 남베트남에서 45만 명의 유권자가 참가하였고 사이공에서는 98.2%의 높은 투표율로 60만 5025명(표)이 투표를 했다. 선거 이후 10월 26일 바오 다이가 폐위되고 응오딘지엠을 대통령으로 하는 베트남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남베트남인들은 새로운 정부를 지지하고 기대하였으나, 1년 후 지엠 정권의 부패와 실정에 실망하였고 반정부 시위가 잇따르게 되었다. 이로써 베트남의 남북 분단은 고착화 된다.


베트남인들은 응오딘지엠 정권을 미국의 괴뢰 정권으로 인식하였고, 원조에 의존하는 남베트남의 경제는 정부의 부패로 인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정은 농민들이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지지하는 요인이 되어 남베트남에서는 크고 작은 시위와 무장 봉기가 그치지 않았다. 한편, 호찌민이 이끄는 베트남 민주공화국(북베트남)의 공산주의 정치에 불안을 느낀 북부 지역의 로마 가톨릭 신자들 약 80만~100만 명이 남부로 이주하여 왔고 이들에 대해 편향적인 종교 정책을 취한 응오딘지엠 정권은 불교와 극심한 갈등을 겪게 되었다.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제네바 협정에 따른 총선거가 열리면 인구의 80 퍼센트 가량이 공산주의자 호찌민에게 투표하였을 것이라고 내다 봤다. 지엠 정권은 더욱 반대 세력을 탄압하였고 그 때문에 더욱 지지를 잃고 있었다.


지엠 정권은 1954년부터 1960년 사이 체포한 5만여 명의 사람들을 정치범 수용소에 구금하였다. 1959년 영국의 학자 PJ 허니는 정치범 수용소를 방문하여 구금된 사람들과 인터뷰를 한 뒤 “(정부의) 탄압을 받고 있는 이들의 주장 대부분은 공산주의나 용공 세력의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다”고 기록을 남겼다.


《펜타곤 페이퍼》는 수인들이 “정부가 반대세력을 격리시키기 위한 수용소”에서 공산주의자건 아니건 고문을 받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지엠 정권은 지방의회 선거에서 비엣민이 승리하자 투표 결과 공표를 거부한 채 정부가 직접 지방 정부를 통치하기도 하였다.


지엠 정권은 1954년부터 1957년 사이에 광범위하게 일어났던 각지의 저항을 진압하고 1957년 초 남베트남에 처음으로 평화가 찾아왔다고 공표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발표와는 달리 1957년 중반부터 1959년 사이에도 반정부 무장 투쟁은 증가 일로에 있었다. 

1959년 초까지만 해도 지엠 정권은 이를 “베트남 정부를 부정하는 무질서일 뿐 조직적 활동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표명하였으나, 태도를 바꾸어 10/59 법안을 선포하여 반정부 투쟁 가담자를 사형시키고 재산을 몰수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점에서도 옛 비엣민의 목표는 제네바 협정에 따라 총선거를 이행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옛 비엣민 활동가들은 공산주의자들이나 다른 반정부 활동가들과의 연계 없이 살쾡이 파업을 주도하였다. 남베트남의 상황은 갈수록 심각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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