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세계사

제네바 협정(Geneva Accords 혹은 Geneva Conference, 1954)

올드코난 2014. 12. 6.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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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프랑스-베트남 전쟁)이 종식되고 제네바 협정(Geneva Conference; 1954년 4월 26일 ~ 7월 21일)에 이뤄졌다. 이 협정은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한다는 목적으로 시작되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지 않게 되었다. 거기에는 바로 미국이 있었다.

 

베트남 전쟁 이야기 6회: 베트남 전쟁 전 상황 1탄 - 제네바 협정(Geneva Accords 혹은 Geneva Conference, 1954)

 

스위스 제나바에서 열린 제네바 협정은 크게 2가지 사안을 가진 협정이었다.

첫째는 1953년 종전된 한국전쟁(Korean War)후 한국의 통일 문제에 관한 것이었고, 두 번째는 1954년 5월 7일 공식적으로 전쟁이 끝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프랑스-베트남 전쟁)이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평화 유지의 가능성에 대한 토의였다.

소련, 미국, 프랑스, 영국, 중화인민공화국 5개 강국외에 여러 국가들이 이 회의 참석을 했는데, 한국의 한반도 문제에 관해서는 어떤 선언이나 제안도 채택되지 못했다. 한국 입장에서는 분통이 터지지만, 약소국의 받아 들일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믿었던 미국도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인도차이나의 경우는 다음과 같은 합의에 이르렀다.

우선 베트남은 2개로 분단되게 된다.

북부 지역은 비엣민이 통치하고, 남쪽 지역은 전 황제 바오 다이를 수장으로 하는 베트남국이 통치하게 된 것이다. 이 점은 한국과 유사한데, 북부 베트남은 호치민의 공산주의가 남부 베트남은 미국이 지지하는 황제의 국가로 분리가 된 것이다. (남부를 민주 국가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자세한 내용을 보면 북위 17°선을 휴전선으로 하여 베트남을 남북으로 분할하며, 300일 이내에 양쪽 군대는 총선이 실시되는 라오스와 캄보디아에서 철수하되 프랑스군은 라오스와 캄보디아 정부의 요청이 있을 경우 그 지역에 주둔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분할선은 어떤 경우에도 정치적·영토적 국경으로 해석될 수 없다'고 명백히 밝혀졌다. 협정의 이행은 인도·폴란드·캐나다 정부의 대표들로 구성된 위원단이 감독하도록 했으며, 최종 선언문으로 이름 붙여진 조항에 따르면 통일 베트남 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은 1956년 7월 이전에 이 위원단의 감독 아래 실시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협정으로 회의 전날까지 베트남 전역의 3/4을 통제하고 있던 북베트남에 회담이 벌어지는 동안 17°선 이북의 지역에서 북베트남 병력을 재조직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된다.

 

하지만 제나바 협정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해결할 의지가 없다는 것이 맞는 표현이다.

 

회의에 참가했던 9개국들은 대부분 협정을 준수할 것을 맹세했지만 미국은 이 협정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입장을 확실히 했다. 미국은 베트남의 공산화를 막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다.

미국과 뜻을 같이하는 남베트남은 협정승인을 보류했고 최종 선언문에 어떤 참가국도 조인하지 않았다. 이는 제나바 회담이 프랑스와 베트남의 전쟁은 끝났지만, 자유 진영 대 공산 진영의 전쟁을 이미 시작했다는 것으로 봐야 하는 것이다.

 

제나바 협정 이후 미국은 남베트남에 별개의 반공국가를 수립하려는 작업에 착수했고 북베트남 정부와 협의하여 전국적인 총선을 실시하자는 제안을 남베트남이 거부했을 때(1965) 남베트남을 지지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제나바 협정으로 베트남이 하나된 나라가 될 수도 있었지만, 미국의 방해로 전쟁으로 치닫게 된 것이다. 단순히 공산주의가 나쁘다는 비판을 하기전에, 미국이라는 나라가 다른 국가들에게 과연 어떤 일들을 자행하고 있고, 이들의 이중성을 알 필요가 있다.

제나바 협정에서 도출된 통일 베트남 정부 수립 총선을 미국이 막지 않았다면 베트남 전쟁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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