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세계사

남 베트남 독재자 디엠 (응오딘지엠, 고 딘 디엠,吳廷琰) 어떤 인물이었나

올드코난 2014. 12. 6.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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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제네바 협정에 의해 프랑스군과 프랑스군의 지휘를 받는 베트남인들은 북위 17°선 남쪽으로 이동시키고, 베트남 독립동맹군은 북위 17°선 북쪽으로 이동하고, 북위 17°선을 비무장지역(DMZ)으로 둘러싸인 군사분계선으로 정한다고 결정했다. 이 결정에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고향을 떠나 남으로 혹은 북으로 떠났고, 프랑스군은 베트남으로부터의 마지막 철수를 시작했다. 제네바 회의의 합의에 따라 공산주의자가 주도하는 베트남 독립동맹은 베트남 북반부를 장악하게 되었는데 이는 북베트남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비공산주의자가 이끄는 베트남 남반부는 남베트남이라고 불리게 되는데, 문제는 미국이 남베트남의 지도자로 지지했던 디엠이 독재정치를 행하게 된다.

 

베트남 전쟁 이야기 7회: 남베트남 독재자 디엠 (응오딘지엠, 고 딘 디엠 ; 베트남어 Ngô Ðình Diệm, 吳廷琰 오정염, 1901년 1월 3일 ~ 1963년 11월 2일) *글의 출처/참고: 위키백과

 

“지엠은 편협하고 과격한 민족주의를 앞세운 독재 정권이었고 친족들로 권좌를 채우는 네포티즘을 펼쳤다” 역사학자 루도안후인(Luu Doan Huynh)


디엠은 옛날 베트남 안남 제국의 응우옌 왕조의 수도인 쿠양빈 캠 마을에서 1901년 1월 3일 출생했다. 디엠의 집안은 안남제국의 명문가로, 17세기 포르투갈 선교사들에 의해 개종한 이래 독실한 가톨릭 신자 가족이었다. 디엠의 아버지는 가톨릭 신부가 되려했으나 베트남이 프랑스 식민지가 되자 황제와 지배층을 변호하기 위한 법률가가 되었다고 한다. 1907년 프랑스에 의해 응우옌 왕조의 10대 황제 성태제가 퇴위당하자 그의 아버지도 고향으로 내려와 농민이 되었다. 프랑스의 가톨릭 학교에서 공부하다가 사립학교에 들어갔고 15살 때 가톨릭 주교가 되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갔으나 자신과는 맞지 않다고 판단 중등 학교를 졸업한 뒤 관료가 되기 위해 행정 법학부에 입학했다.

 

디엠은 1921년 대학교 졸업 후 공무원이 되어 꾸준히 승진해 고향 쿠양빈의 왕실 도서관 관리와 그곳의 300개의 마을 감독관이 되고 25세 때는 지방군 대장으로 승진하는데 이 과정에서 프랑스 지배층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맺었고 당시 확삭되고 있던 공산주의에 대한 반공 운동도 시작한다. 1929년 행정 분야에 침투한 공산주의자들을 적발하는 등 프랑스의 식민 지배에 대항해 공산주의자와 농민들의 반란에 반대하고 친 프랑스와 반공주의 노선과 베트남 황실과 절친하게 지내며 황실의 신임을 얻었다. 전형적인 출세지향적이며, 외세에 비굴하고 약자에 강한 면을 이때부터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디엠에게 시련이 닥쳤는데, 1933년 13대 황제 보대제의 내무상이 되었지만 황제와 맞지 않아 3개월만에 사임하고 이후 10년 동안 관료가 아닌 시민으로 살아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다.

디엠은 1942년에 일본군을 설득해 베트남의 독립을 이루려 했으나 실패하고 비밀리에 베트남 공화국 복원을 위한 협회를 창립했지만 1944년 여름 발각되자 일본군 장교로 위장해 사이공으로 도주했다. 이후 황제 정부와 공산주의 운동에 반대하여 베트남 민족주의 운동에 힘쓰는데, 다음해인 1945년 일본군이 베트남에서 철수를 시작하자 보대제의 임시 괴뢰 정부 작위를 거부했다가 이내 다시 되찾으려는 시도를 했다. 9월 일본군이 완전히 철수하고 공산주의자 호치민에 의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선포되자 보대제를 버리고 여행을 떠나다 호치민(胡志明)의 베트민군에게 체포되어 국경 도시로 추방당했다.

 

1946년 11월부터 베트민과 프랑스와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하고 그 사이 사이공으로가 언론 활동을 하며 영향력을 넓혔다. 가톨릭 계열의 지지를 얻으려던 공산당 주석 호치민으로부터 북베트남의 공산주의 정부에 입각, 참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거절하고 미국, 프랑스, 벨기에 등지에서 망명생활을 한다.

 

1950년 바오다이 황제의 괴뢰 정부와 뜻이 맞지 않아 미국으로 망명하였고 미국의 지지를 받아 바오다이 황제로부터 모든 권력을 빼앗게 되는데 마침 그해 발생한 한국 전쟁 당시 UN군에 남베트남군 일부를 파병하게 되고 미국과는 더 친밀한 관계가 된다. 그 덕분에 미국에서 각종 반공 단체와 대학들의 지도자로 임명되고 1953년 대한민국의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하고, 중화민국의 장제스 등을 방문하는 등 반공외교 활동을 한다.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 9월에 대한민국으로부터 건국훈장 중장을 받게 된다.

 

그리고 1954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끝나고 6월 26일 가족들과 함께 남베트남으로 귀국했는데, 1954년 10월 북베트남으로부터 공산당을 거부하는 베트남 난민 20만 명이 남베트남으로 내려왔고 미국이 적극 도왔는데 특히 1956년 통일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가톨릭 신자의 이주를 적극 장려했다. 그 영향으로 북베트남의 가톨릭 신자 60%가 남베트남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 시기에 베트남의 황제 바오다이(보대제)의 무능은 남베트남을 극심한 혼란으로 몰고 갔고 북베트남과의 분쟁을 일으키는 등 권위가 매우 약화된 상황이었던 아직 베트남에 주둔 중이던 프랑스도 자신들을 지지하는 바오다이 황제가 쫓겨나기를 바라는 형국이었다. 이때를 디엠은 기회로 삼고 정변을 일으켜 선거를 결행한다.

 

 1955년 10월 23일 베트남의 미래를 결정하는 국민 투표가 열린다.

남베트남에서는 45만 명의 유권자가 참가하였고 사이공에서는 98.2%의 높은 투표율로 60만 5025표가 등록되었다. 하지만 미국의 압박으로 북베트남이 굴복하면서 국민 투표의 결과가 보류되는데 그 사이 1955년 10월 26일 국민 투표로 보대제를 몰아내고 국가 최고의 원수가 되고 남베트남 공화국이 선포되면서 남과 북의 분단이 굳어지기 시작한다. (과거 한국의 이승만과 비슷한 행태를 보였다)

 

권력을 잡은 디엠은 공산주의를 극도로 혐오했는데 지주층과 카톨릭, 해외 유학파 출신 지식인들, 군부, 경찰 세력을 기반으로 강력한 반공주의정치를 펼쳤다.

또한 학문, 예술 작품에 대한 검열을 강화하여 반체제, 반정부성이거나 지나친 자유를 외치는 서적, 학문, 작품에 대한 검열과 탄압, 단속 정책을 펴 나갔다. 여기에 자신의 친족들과 측근들을 집중 등용하여 전형적인 독재정치를 해 간다.

 

하지만, 미국은 계속해서 디엠의 행태를 눈감아 주고 디엠의 독재 정치는 갈수록 심각해져 가는데, 그의 동생들은 비밀 경찰 지휘관으로 임명되었고, 다른 형제는 영국 대사, 쿠양빈의 대주교 등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외국 은행에 널린 재산과 라오스를 통한 불법 밀수 등을 이용해 미국과 무역을 해 막대한 이익을 챙겼고, 가톨릭 교회에 대한 농장, 토지, 부동산, 임대 주택 및 고무 농장 등을 지원하여 교회를 지지세력으로 만들었다. 특히 디엠은 카톨릭 외의 종교를 부정했는데 공산주의 봉기를 부추긴다는 이유로 수많은 불교도들을 투옥하고 처형한다.

 

당시 70 ~ 90%의 베트남인들이 불교를 믿고 있었는데, 이들 불교 신도들에게 가한 디엠의 차별은 사회를 극도로 불안하게 했다. 그 내용을 대략 정리해 보면 당시 대다수가 농민들이었던 시대에 가톨릭 교인들에게만 토지를 할당해 주어 불표 신도들은 농사를 짓기조차 힘들었고 카톨릭에게만 세금 감면 정책을 펼쳤으며 불교 절들이 파괴되고 몇몇 불교 마을 역시 철거되기도 했다. 가톨릭 교회는 남베트남에서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했고, 토지 개혁에서도 면제되면서 농민들의 공분을 샀고 공산주의 봉기를 부추긴다는 이유로 수많은 불교도들을 탄압하고 처형하자 이 사실이 알려진 미국 내에서 여론이 악화되고 결국 미국은 디엠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게 된다.

 

디엠 정권이 결정적으로 몰락하게 된 것은 불교 승려 틱꽝득(Thich Quang Duc)의 분신 자살 사건이었다.

963년 5월 디엠의 형 쿠양빈의 대주교로 임명되자 석가탄신일을 금지했고 이에 반발하는 승려들에 대한 총격 사건이 발생했는데, 6월 3일 쿠양빈에서 시위대가 댐으로 이동하던 중 화학 공격을 받았고, 얼마후 6월 11일 세계를 경악시킨 불교 승려 틱꽝득(Thich Quang Duc)의 분신 자살 사건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틱꽝득의 분신 자살은 세계적으로 보도되었는데 이를 촬영한 말콤 브라운은 퓰리처 상을 수상했고, 국제사회의 디엠 정권에 대한 여론은 악화되었다. 그리고 쿠데타의 도화선이 된다. 그리고 베트남인들을 특히 격분하게 만든 것은 당시 영부인 역할을 하던 마담 누가 틱꽝득의 분신 자살은 "땡중의 바베큐 쇼"로 비하하는 발언은 기름에 불을 붙인 격이 되었다.

 

결국 군부에서 쿠데타를 모의하는데, 즈엉반민 장군이 응우옌칸, 응우옌까오끼, 응우옌반티에우, 돈 댓 딘 등의 동료들을 포섭하고 쿠데타를 일으킨다. 1963년 11월 1일 쿠데타는 신속하게 진행되고 남베트남의 군 고위장성들이 체포되고 대통령궁 경호 부대와 전투를 치르고 미국으로의 망명을 거부하던 응오딘지엠은 11월 2일 새벽 쿠데타 세력이 총공세를 펼치는 사이 동생 응오진누와 함께 비상 통로를 통해 중국인 거주 지역인 쩌런으로 도주했지만 그날 오전 6시 대통령궁을 완전히 장악한 쿠데타 세력에게 항복했고 장갑 차량에 호송되던 중 동생 응오진누와 함께 쿠데타 군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올드코난의 잡담]

디엠(응오딘지엠)의 최후는 독재자의 말로를 보여주는 것으로 디엠을 통해 독재자들이 가진 몇가지 공토점이 있는데, 특정 종교(디엠의 카톨릭) 외에는 부정하거나, 외세(미국, 프랑스)에 의종하는 자들 그리고 민족과 인권 보다는 특정 사상(공산당)에 대한 혐오를 보인다는 점이다.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독재자들은 종교탄압, 언론 탄압, 반공 주의, 매국노가 득세하고 독립 운동가가 몰락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이건 베트남의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현재 한국에서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혹 본인이 기독교를 믿는다고 해서, 기독교 외의 종교를 부정하는 것은 결국 자신에게 큰 고통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기독교 목사들이 피해를 주었던 대다수 피해자들은 기독교 신자였다.


글 작성/편집 올드코난 (Old Co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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