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세계사

베트남 독립전쟁,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프랑스-베트남 전쟁)

올드코난 2014. 12. 4.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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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The First Indochina War)는 프랑스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베트남 독립 전쟁으로 프랑스-베트남 전쟁(the Franco-Vietminh War) 등으로 불린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 한국을 포함한 많은 식민 국가들이 독립을 했지만 식민정책을 포기하지 않기로 결정한 프랑스는 베트남의 독립을 반대하고 이런 프랑스를 상대로 호찌민의 민족주의 저항세력이 결전을 벌인 것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다. 1946년 12월 19일부터 1954년 8월 1일까지 벌어진 전쟁이다.

 

베트남 전쟁 이야기 5회: 베트남 독립전쟁,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프랑스-베트남 전쟁)

 

1. 전쟁 전 상황

19 세기 이후, 동남아시아는 유럽 열강의 식민지화가 진행되었는데 베트남은 프랑스가 응우옌 왕조 내부의 혼란을 틈타 군대를 파병하여 제1차 후에 조약, 제2차 후에 조약을 맺고 베트남을 보호령에 편입시킨다. 베트남을 프랑스의 식민지로 만든 것이다.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에 총독부를 두게 되는데 과거 조선을 강탈한 일본 못지 않게 무거운 세금과 부역, 소금, 알코올, 아편의 전매 등의 착취를 했고, 여기에 저항하는 독립운동가들은 비밀경찰에 의해 투옥되고 고문과 사형을 받았다. 인도차이나 총독부는 경제적인 수탈뿐 아니라 베트남의 전통 문화를 파괴하고 프랑스 문화를 강요하는 등 가혹한 통치를 한다.

 

그러다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고 프랑스 본국이 독일에 점령되면서 프랑스에 나찌의 괴뢰 정권인 비시 정권이 들어서게 된다. 당시 중일 전쟁 중이던 일본은 비시 프랑스 정권과 친화 정책을 써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일본군 진주를 인정받게 되고 일본군은 1939년부터 1941년 사이에 단계적으로 진주하여 전 국토에 걸쳐 주둔하지만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내정 주권은 전쟁 말기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가 처리될 때까지 프랑스에 있었다.

 

그리고 전쟁전인 1930년 호찌민이 결성한 베트남 공산당과 1941년 결성된 비엣민은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독립을 위한 무장 투쟁을 하고 있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는 인도차이나에 진주한 일본 점령군과 싸웠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동안 호찌민은 비엣민에 대한 중화민국의 중국 국민당 정부와 미국의 승인을 얻어내고 미국의 전략사무국은 일본에 대항하는 비엣민을 지원했지만 문제는 독일로부터 벗어난 연합국이 일원으로 전쟁중이던 1945년 프랑스 측이 비엣민이 공산주의 조직이라고 문제를 제기하자 지원을 중단해 버린 것이다.

 

이후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은 끝이 나고, 호찌민이 이끄는 베트남 독립 동맹(비엣민)은 베트남 8월 혁명으로 빠르게 권력을 탈취하고 임시 베트남 민주공화국 정부를 설립한다. 그리고 일본이 항복문서에 조인하여 전쟁이 종결된 9월 2일에 하노이에 있어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근데 같은 시기 베트남에 있는 프랑스인과 일본군의 포로가 된 프랑스 군인들이 주축이 되어 사이공에서 식민군을 재결성한 상황에서 독립선언은 이들 양측의 충돌을 불렀다.

 

2.전쟁의 시작과 전개

종전후 연합국 일반 명령 제1호(1945년 9월 2일 공포)에 근거 북위 16도선 이북은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이 이남은 영국군 동남아 사령부(South East Asia Command)이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맡게되는데 문제는 프랑스가 베트남을 포기하지 않는데 있었다.

 

1945년 8월 말 북베트남의 노한 장군이 인솔하는 180,000명 규모의 중국군 부대가 진주하였고, 남베트남에는 9월 12일 루이스 마운트밧텐 경(Louis Mountbatten)이 이끄는 영국군 동남아 사령부 제1진이 상륙하여 각각 일본군의 무장해제에 착수했는데 프랑스는 쥬 티엘리 다르잘류 제독을 고등판무관으로 임명하였고 본국의 두 개 사단의 파견을 결정하여 필립 르크레르 드 오트클로크 (Philippe Leclerc de Hauteclocque)장군을 사령관으로 하는 프랑스 극동 원정 군단(Corps expéditionnaire français en Extrême-Orient)을 편제하고 9월 12일에 마다가스카르 여단을 제1진으로 하여 출발, 10월 5일에 선발부대가 사이공에 도착하였다. 필립 르크레르 드 오트클로크 장군은 10월 9일에 잭 마슈 대령이 인솔하는 군대와 함께 도착했다. 11월까지 세 개로 나누어 제3 기계화 사단과 제9 식민지 사단이 도착했다. 공군은 수송기와 전투기를 중심으로 약 100기를 파견하였고, 해군은 필립 오보와노 제독을 사령관으로 하는 호위함대를 인솔하여, 《전함 리슈류》, 《경순양함 그로아르》, 《구축함 르 트리온판》, 《항공기 수송함 베아룬》이 극동 해역으로 배치되었다.

 

오랫동안 적대적인 관계였던 베트남은 중국군의 장기 주둔을 경계하였고 비엣민도 1945년 11월에는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해산하여 중국에 대한 회유를 하는 등 중국군 철수를 위한 노력이 계속했다. 프랑스도 이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프랑스군의 증강과 중국군과 협의를 거듭해 1946년 2월에 프랑스-중국 협정이 체결되어 4월 이후 차례로 철수를 감행했다. 그 댓가로 중국 각지에 있던 프랑스 조차권의 회수와 하이퐁항의 자유화, 인도차이나 화교에 대한 우대조치 등을 받아들였다.

 

9월2일 비엣민의 독립선언 이후 각지에서 분쟁이 발생한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프랑스로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다. 9월말부터 영국군도 의도하지 않게 분쟁에 말려들었고, 10월말 이후 프랑스 원정군이 도착하자 이에 반대하는 충돌이 격화되었다. 중국군의 철수에 즈음에 1946년 2월 28일과 3월 6일 비엣민과 프랑스는 예비 협정을 체결하여, 프랑스 연방 인도차이나 연방에 소속된 하나의 나라로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과 통킹 지방의 프랑스 군 주둔을 인정하였다. 3월 26일에는 프랑스 잔당이 많이 존재하는 남부 베트남에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를 내세운 베트남국을 세워 일시적으로 타협한다.

 

하지만 북(北)은 비엣민이, 남(南)은 프랑스가 장악하고 프랑스가 식민지 야욕을 버리지 않는 상황에서 전쟁은 반드시 일어날 상황이었다. 3월 6일의 합의조항에 대한 해석과 관련해 비엣민과 프랑스가 상호 불신하고 일련의 사건들이 벌어지면서 결국 8년간의 전쟁이 시작된다. 베트남 민주 공화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벌어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대부분의 전투가 북베트남 통킹에서 벌어졌지만, 충돌은 전국으로 이어졌고 이웃한 라오스와 캄보디아로 확대되었다.

 

1946년 11월 23일 프랑스가 하이퐁을 포격했고 12월 9일 베트남의 보응우옌잡이 하노이를 공격한다. 프랑스는 3년 동안 비엣민의 게릴라 부대와 전투를 벌이고 비엣민은 선전과 테러를 동원하여 코친차이나와 통킹의 광대한 농촌지역을 수중에 넣었다. 잡 장군은 1950년부터 중국 공산당의 도움을 받아 통킹 만 북쪽에서 중요한 성공을 거두었다. 프랑스의 장 드 라트르 드 타시니 (Jean de Lattre de Tassigny) 장군은 프랑스계 베트남인으로 구성된 병력을 강화하고 미국의 도움을 받아 2년 동안 군사작전을 벌였지만,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가 패전하면서 전쟁은 종식되었다

 

이후 1954년 4월 26일부터 7월 21일까지 열린 제네바 협정을 통해 평화협정을 맺게 되었다. 제네바 협상에서 프랑스는 북위 17도를 경계로 베트남을 남북 두 지역으로 나누는 임시분할에 합의하였다. 그리고 1953년에 인정받았던 캄보디아와 라오스의 독립을 확약하였다.

국제사회는 제네바 회담을 통해 새로운 선거에 의해 베트남 독립을 약속하게 된다.

제네바 협정 의장국이었던 영국의 외무장관은 "회의 최종 선언"을 발표하여 통일된 베트남을 수립하기 위해 1956년 7월 이내에 보통선거를 진행한다고 규정하였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후 정전 협정의 준수를 감시 하기 위해 캐나다, 인도, 폴란드로 구성된 국제 조정 위원회가 조직되었다. 하지만, 캐나다는 사실상 미국이 원하는 대로 활동하였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를 지원했던 미국은 프랑스가 물러난 뒤 공산화 된 중국을 견제할 전략적 요충지로서 베트남을 바라보았고, 도미노 이론을 내세워 베트남에 반공 정부가 세워져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즉 우리가 알고 있는 베트남 전쟁의 전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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