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은 막을 수 있는 전쟁이었다. 만일 미국이 당시 베트남 문제를 좀더 깊이 이해를 했더라면, 그리고, 케네디의 외교적 성과에 대한 집착을 버렸더라면 베트남 전쟁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베트남 전쟁 이야기 11회: 외교 실패를 만회하려든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정책이 미국대 베트남의 전쟁이 된 원인과 책임이 있다.
1. 케디디 대통령의 잇따른 외교 실책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존 F. 케네디가 당선되었다. 전임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베트남과 라오스, 유럽, 라틴아메리카의 상황에 대해 언급하며 보는 것보다 아시아의 문제는 더 크다며 경고했지만, 케네디는 “얼마를 지불하든, 져야할 짐이 얼마이든, 얼마나 어려운 일이 닥치든, 모든 친구를 지원하고 자유의 승리와 생존을 확약한다”는 야심만만한 공약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취임이후 케네디 정부는 트루먼 정부와 아이젠하워 정부 이래 계속 된 냉전을 바탕으로 한 외교 정책의 핵심 사항들을 유지하였지만 여러 방면에서 실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1961년 미국 정부는 피그스 만 침공의 실패, 베를린 장벽의 형성, 파테트라오 결성 등의 삼면 위기 대처에 실패했다. 이 때문에 케네디는 공산주의 확산을 더 이상 막지 못할 경우 미국에 대한 평판과 동맹들의 신뢰가 낮아지고, 재선에서 불리하게 될 것을 염려했다.
2. 남베트남 문제 개입
케네디는 베트남에서 공산주의가 승리하는 것을 막기 위해 “모래 위에 선을 긋기”로 결심하였다. 1961년 6월 케네디는 소련의 니키타 흐루쇼프 수상과 빈 회동을 갖고 베트남 문제를 논의했지만 합의점을 찾지 못한다. 빈 회동에서 돌아온 직후, 뉴욕 타임스의 제임스 레스턴에게 “지금 우리는 우리 힘이 신뢰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는 문제를 갖고 있고, 베트남이 바로 그런 곳이다”라고 말했다.
3.베트남 문제 전략 수정 및 계획
케네디 정부는 전임 아이젠하워 정부가 베트남의 문제를 남북간 대결로 몰고 가려 한 단순화 전략이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활동으로 실패하였다고 보고, 전쟁의 상황에 따라 선전포고 없는 대게릴라 전쟁부터 시작하여 국지전, 통상전, 전술 핵무기 사용으로 전쟁 수위를 끌어 올리는 ‘유동성 대응 전략’으로 전략을 수정한다.
케네디는 미군 전투 부대의 파병에 부정적이었다. 대규모 파병은 군사적 충돌을 일으킬 수 밖에 없고, 결국 정치적으로 해결은 어려워져 장기적으로는 군사 점령을 지속하게 될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4.무능하고 부패한 지엠 정부
케네디의 남베트남 정책은 지엠의 군대가 스스로 게릴라를 완전히 섬멸하여야 한다는 가정에 세워졌다. 하지만, 당시 남베트남 군대는 무능하고 부패한 지휘부와 정치인들로 인해 군 사기는 물론 질적으로도 형편 없는 오합지졸이었다.
1961년 5월, 부통령 린던 B. 존슨은 사이공을 방문한 자리에서 “지엠은 아시아의 윈스턴 처칠”이라 추켜세웠는데 왜 그런 말을 했냐는 질문에 “거기에 우리 편은 지엠 뿐”이라고 답했다. 자국의 이득을 위해서는 독재자도 지지한다는 전형적인 미국 외교의 위선이었다.
5.소련과의 경쟁 의식
미국이 베트남 전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소련에 대한 경쟁의식 때문이다. 케네디는 소련의 우주 미사일 프로그램이 미국의 것을 앞설지 모른다는 것을 염려하고 있었다. 당시 장거리 미사일의 수준은 미국과 소련이 대등한 수준이었다고 하는데, 케네디는 우주 공간을 군사화해 제3 세계에서 일어나는 공산주의 무장 투쟁에 대응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6. 베트남 미군 병력 증강
베트남의 게릴라들은 프랑스 정규군을 상대로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이미 전선의 후방을 교란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케네디는 미국 육군 특수부대와 같은 특수전 부대를 이용하여 특정 전술 목표에서 소규모 전투를 치르고 전장을 빠져나오는 “브러쉬 파이어” (Brush fire)전술이 주효할 것이라고 여겼다.
케네디의 고문이었던 맥스웰 D. 테일러와 월트 휘트먼 로스토우는 미군을 홍수 방제 인원으로 위장시켜 남베트남에 파병하자고 제안하였다. 케네디는 이 제안을 거절하였지만 남베트남에 군사고문을 증파하였다.
1962년 4월 존 케네스 갈브레이스는 케네디에게 “우리가 프랑스 군을 대체한 식민지 점령군이 되면 프랑스군처럼 피를 흘리게 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였다.
1963년, 남베트남에는 16,000 명의 미군 병사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는 아이젠하워가 권고한 900명을 훨씬 웃도는 것이었다.
7.전략촌
전략촌은 1961년부터 세워졌다. 미국과 남베트남이 함께 추진한 전략촌은 농촌 인구를 일정 지역으로 이주시켜 게릴라와 주민을 분리하고 지방에 대한 정부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전략촌이 세워진 뒤 얼마지나지 않아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활동가들이 전략촌에 잠입하기 시작하였다. 지엠 정권의 전략촌 담당자였던 팜응옥타오는 공산주의자들이 가톨릭 교인으로 위장 침투하여 베트남 공화국을 안쪽부터 파괴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지엠 정권이 토지 개혁을 무산시킨 뒤 농민들은 막대한 지대를 지주에게 내고 있었기 때문에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지지하게 되었다.
8. 지엠 정권 제거 작전
미국은 1963년 중반부터 지엠 정권의 종교 정책 변화를 요구하였다. 미국 국방부가 지엠 정권을 계속 지지하는 동안 미국 국무부는 쿠데타도 용인할 수 있다는 태도를 취하였다. 1963년 8월 23일 미국 국무부는 주베트남 미국 대사 헨리 캐벗 로지 주니어(Henry Cabot Lodge, Jr)에게 전문 243을 보내 불교에 대한 탄압과 응오 일가 통치의 핵심인 비밀 경찰과 특수부대를 장악하고 있는 니우를 제거할 필요가 있다고 지시하였다.
미국 중앙정보국은 지엠 정권을 제거하기로 한 계획을 접수한 뒤 베트남 군부에게 지엠이 하야하더라도 미국은 이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이고 원조를 줄이지도 않을 것이라고 전하였다. 1963년 11월 2일 군부는 쿠데타를 일으켜 지엠과 그의 형제들을 체포하였다. 훗날, 맥스웰 테일러는 베트남 쿠데타 소식을 들은 케네디가 “충격을 받고 집무실에서 달려나와 얼굴을 쓸어내렸다”고 회고하였다. 케네디는 지엠을 죽이는 것을 승인하지 않았다. 주베트남 미국 대사는 쿠데타 지휘자를 대사관으로 초청하여 성공을 축하하고, 케네디에게는 “이로써 전쟁이 더 빨리 종식될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9. 남베트남의 혼란과 미국의 무지.
쿠데타가 일어난 뒤 남베트남은 혼란에 빠졌고, 북베트남은 이 쿠데타로 남베트남 정권은 미국의 꼭두각시일 뿐인 것이 여실히 드러났다고 주장하였다.
미국 군사고문단은 남베트남군의 모든 분야에 투입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내전의 본질에 대해 완전히 무지하였다. 남베트남군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게릴라 사이의 내전은 본질적으로 정치 권력 투쟁으로 군사 교전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케네디 정부는 남베트남의 안정을 확보하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도록 미군의 관점을 재조정하려고 하였고, 이를 통해 주민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미군 지도부는 군사 고문이 베트남 정규군 훈련 이외의 업무를 담당하는 것에 거부감을 보였다.
10.사태파악 못한 미국
주베트남 미군사령부의 폴 D. 하킨스 장군은 1963년 크리스마스까지는 완벽히 승리를 할 것이라고 호언 장담하였다. 그러나, 미국 중앙정보부는 베트콩은 지방의 상당한 지역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으며 그 영역이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라며 조금은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준군사조직인 미국 중앙정보국 특무부는 라오스의 흐몽족을 훈련시켜 베트남에 투입하였다. 이들은 원래 라오스의 공산주의 단체인 파테트라오에 대항할 목적으로 훈련되었다. 미국 중앙정보국은 또한 피닉스 계획을 운영하고 특수작전 수행을 위해 베트남 군사 원조 사령부 연구 관찰 그룹(Military Assistance Command, Vietnam – Studies and Observations Group, MAC-V SOG)을 조직하였지만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11. 불리해진 외교
1962년 7월 23일, 남베트남과 북베트남, 소련, 중국, 미국을 포함한 14개국이 라오스의 중립을 약속하는 조약을 체결하였다. 캄보디아의 시아누크 국왕 역시 중립을 표방하고 있었기 때문에, 베트남 주변국의 상황은 북베트남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외교적으로 북베트남에게 유리해졌다는 것은 미국 입장에서는 불리해졌다는 것이다.
12. 종합
케네디는 소규모 작전 위주이기는 하지만, 전쟁으로 해결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암살 직후 뒤를 이은 린든 존슨 대통령이 베트남전을 확대시킨 것은 케네디 정부에서 분명 그 이유를 찾아야 한다. 베트남 전쟁 전 상황을 보면 케네디에 대한 평화적인 이미지는 과정된 측면이 많다는 것을 알게된다. 케네디는 베트남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려는 노력보다는 외교적 성과에 집착하면서 베트남 전쟁을 피할수 없게 만든 책임이 분명 있다.
대통령 당선전에는 베트남 전쟁을 반대했던 케네디가 대통령이 되고 전쟁에 개입을 하게 된 점은 비판 받아야 한다. 간혹 극우들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지만, 외교의 실패를 만회하려는 목적이 분명히 있었다.
*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베트남 전쟁은 미국 대 베트남의 전쟁을 뜻한다. 공식적으,로 1956년 베트남 전쟁은 시작된 것으로 본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군의 본격적인 전쟁은 케네디 암살후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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