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국사-조선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피신 아관파천 (俄館播遷)의 뜻과 역사적 의미

올드코난 2016. 7. 21.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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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년 전 1896년 2월 11일 명성황후가 시해된 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데(아관파천) 당시 고종이 이동했던 길과 옛 러시아 공사관 건물이 단계적으로 복원된다고 한다. 아관파천에 대해 정리해 본다.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피신 아관파천 (俄館播遷), 고종과 조정의 무능함이 조선을 러시아에게 갖다 바친 치욕적인 사건이었다.


1. 개요

아관파천 (俄館播遷)은 노관파천(露館播遷)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아관은 당시 러시아 공사관을 뜻한다. 고종 황제가 신변의 위협을 느껴 러시아 공사관으로 비신한 것을 아관파천이라고 한다.


2. 을미사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우월권을 확보한다. 여기에 청으로부터 랴오둥반도(遼東半島) 등지를 할양받지만 일본의 독주를 우려한 러시아와 프랑스·독일이 연합한 삼국간섭으로 랴오둥반도를 청에 반환하게 되고 이런 러시아의 영향력을 본 조선에서는 배일친러 경향이 싹트게 되고 친일파에 눌려 있던 명성황후와 민씨 척족세력과 함께 구미 공관과 밀접한 접촉을 가지며 친미·친러적 경향을 보이던 정동파(貞洞派) 인사들이 득세하고 친일 세력은 급격히 세력을 상실하며 김홍집(金弘集) 내각이 붕괴한다. 이후 민비 세력과 친미/친러파가 요직을 장악하면서 친일파들이 축출되고 일본에 의해 육성된 훈련대마저 해산 당할 위기에 처하자, 신임 일본 공사 미우라(三浦梧樓)는 1895년 음력 8월 20일에 일본인 낭인과 훈련대를 경복궁에 침입시켜 민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켜 다시 친일파들이 권력을 장악한다.


3. 의병들의 봉기

을미사변으로 권력을 잡은 친일파들은 단발령 등 급진적인 개혁을 강행하는데 명성황후 시해로 커져가던 백성들의 반일 감정은 단발령을 계기로 폭발하고 전국적으로 의병들이 봉기를 하게된다.

김홍집 내각은 지방의 진위대를 이용해 의병을 진압하려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중앙의 친위대 병력까지 동원하게 되지만 이로인해 수도경비에 공백이 생겼고, 이 기회를 틈타 친러파 측은 고종을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기려는 모의를 하게 된다.


4. 아관파천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시키려는 시도는 1895년 음력 10월 12일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 때에도 있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당시 사건을 모의하고 해외로 탈출했던 친러파 이범진(李範晉)은 비밀리에 귀국하여 이완용(李完用)·이윤용(李允用) 및 러시아 공사 베베르 등과 고종의 파천 계획을 모의한다. 이들은 궁녀 김씨와 고종이 총애하던 엄상궁(후의 嚴妃)을 통해 고종에게 접근, 대원군과 친일파가 고종의 폐위를 공모하고 있으니 왕실의 안전을 위해 잠시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할 것을 종용하였다. 이에 을미사변 이래 불안과 공포에 싸여 있던 고종은 그들의 계획에 동의한다.

러시아측은 1896년 2월 10일 공사관 보호를 구실로 인천에 정박중이던 러시아군함 수군 120여 명을 무장시켜 서울에 주둔시켰고 다음날 11일 새벽 고종과 왕세자(순종)는 극비리에 궁녀의 교자에 타고 경복궁 영추문(迎秋門)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다. (아관파천)


5. 결과

파천 직후 고종의 명령에 의해 총리 대신 김홍집과 농상공부 대신 정병하(鄭秉夏)가 참형되었고, 내부 대신 유길준(兪吉濬)을 비롯한 10여 명의 고관들은 일본 군영으로 도피한 뒤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탁지부 대신 어윤중(魚允中)은 도피 중에 백성에게 살해되었고, 외부 대신 김윤식(金允植)은 제주도로 유배되고 친일 정권이 무너진다.

그동안 은신중이었던 친러·친미파 인물들을 대거 등용, 되어 친러 내각을 구성하였다. 그 결과 법부 대신과 경무사를 겸임하게 된 이범진을 비롯하여 이완용·이윤용·박정양(朴定陽)·조병직(趙秉稷)·윤용구(尹用求)·이재정(李在正)·안경수(安駉壽)·권재형(權在衡)·윤치호(尹致昊)·이상재(李商在)·고영희(高永喜) 등의 인사가 요직에 임명되었다.

친러 내각은 친일파를 국적(國賊)으로 단죄하는 한편, 단발령의 실시를 보류하고 의병을 회유하며 공세를 탕감하는 등 인심 수습에 나섰다. 그리고 갑오·을미의 개혁 사업을 폐지하였다.

그 밖에 23부(府)였던 지방 제도를 한성부(漢城府)와 13도로 개편하였고, 호구 조사도 재정비하였다. 한편 의정부로 환원한 신내각은 국내에 있던 일본인 고문관과 교관을 파면시키고 대신 러시아인 고문과 사관으로 대신 초청하였으며, 러시아 학교를 설립하는 등 러시아의 영향력이 한층 강화되었다.


6. 의미

아관파천은 을미사변을 통해 불법적으로 조선의 정권을 장악한 일본 세력에 대한 친러 세력의 반발로 초래된 사건이었다. 아관파천으로 말미암아 일본의 침략이 일시적으로 지연되기는 했지만 조선의 자주성과 국력은 크게 손상되었고 열강의 경제적 침략이 심화되었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는 1년 동안 조선 정부의 인사와 정책은 러시아 공사와 친러파에 의하여 좌우되었는데 경원·종성 광산 채굴권, 인천 월미도 저탄소 설치권, 압록강 유역과 울릉도 삼림 채벌권 등의 경제적 이권이 러시아에 넘어가고 러시아의 알렉시예프(Alexiev,K.)를 조선 정부의 탁지부 고문으로 앉혀 조선의 재정을 농락했다. 러시아뿐만이 아니다. 다른 열강들도 전차·철도부설권, 삼림 채벌권, 금광·광산 채굴권 등 시설 투자와 자원 개발에 관한 각종 이권을 획득했고 일본은 이들 열강으로부터 전매하는 방법으로 이권 쟁탈에 참가한다. 이후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민중들의 자주 의식이 각성되었지만 왕실과 기득권 세력은 여전히 현실 인식도 부족하고 조선을 개혁할 능력도 없었다. 아관파천은 고종이 일본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착각했겠지만 러시아에게 조선을 갖다 바친 격이었다. 고종은 일본과 러시아 어느 한편을 의지하겠다는 생각을 버렸어야 했다. 아관파천은 당시 조선의 외교에 대한 무지와 무능을 단적으로 보여주었고 고종은 왕으로서의 자질이 부족했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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