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국

중국 후조(後趙) 황제 계보

올드코난 2017. 2. 14.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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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조(後趙: 319~351)는 오호십육국 시대 갈족(羯族)의 석륵(石勒)에 의해 건국된 나라로 국호는 조(趙)이지만 같은 시대 유연(劉淵)에 의해 건국한 조(趙)와 구분하기 위해 유연의 조를 전조(前趙{혹은 조한趙漢}), 석륵의 조를 후조라고 구별하고, 석씨의 왕조이기 때문에 석조(石趙)라고 부르기도 한다. 32년 7명의 황제가 있었다. 정리해 본다.


중국 후조(後趙) 황제 계보 설명


조 명제 추숭: 선황제(宣皇帝) 석사(石邪) *묘호없음

조 명제 추숭: 조세종(趙世宗) 원황제(元皇帝) 석주갈주(石周曷朱)


제1대 석륵(石勒)

묘호 조고조(趙高祖), 시호 명황제(明皇帝)/ 연호: 태화(太和) 328년 ~ 330년, 건평(建平) 330년 ~ 333년/재위기간 319년 ~ 333년/ 능호 고평릉(高平陵)

요약: 후조 고조 명황제 석륵(後趙 高祖 明皇帝 石勒, 274년 ~ 333년, 재위: 319년 ~ 333년) 오호십육국 시대 후조(後趙)의 창건자. 흉노(匈奴)의 부족 갈족(羯族) 출신으로 전조(前趙)의 장수로 활약하다 후조를 건국.


제2대 석홍(石弘)

시호 해양왕(海陽王)/ 연호 연희(延熙) 334년/재위기간 333년 ~ 334년

요약: 석홍(石弘, 313년 ~ 334년, 재위 : 333년 ~ 334년)은 석륵(石勒)의 차남으로, 330년에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학문에 뛰어났지만 심약하고 군사적 재능이 떨어졌다. 333년 7월에 석륵이 사망하자 석호는 석홍을 제위에 올려 놓고 실권을 장악한다. 여러 왕으로 책봉되어 있던 석륵의 자식들은 모두 폐위되거나 거세되고 석호의 자식들이 왕으로 임명되었고 이에 반대하여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지만 석호는 이를 모두 격파하였다. 334년 4월, 석홍은 석호에게 제위를 물려주겠다고 제안하였으나 석호는 이를 거절하였으나 다시 조정 대신들이 선위할 것을 권하자, 석호는 석홍을 폐위시키고 자신은 천왕(天王)의 지위에 올라 섭정하였다. 이후 폐위된 석홍은 해양왕에 봉해졌고, 숭훈궁(崇訓宮)에 유폐되었다가 살해당했다.


조 무제 추숭 무황제(武皇帝) 석배사(石㔨邪)

조 무제 추숭 조 태종(趙太宗) 효황제(孝皇帝) 석구멱(石寇覓)


제3대 석호(石虎)

묘호 조 태조 (趙太祖), 시호 무황제(武皇帝)/ 연호 건무(建武) 335년 ~ 348년, 태녕(太寧) 349년/ 재위기간 334년 ~ 349년/ 능호 현원릉(顯原陵)

요약: 석호는 석륵(石勒)의 조카로 아버지는 구멱(寇覓)이며 석륵의 아버지 주갈주(周曷硃)가 석호를 아들로 삼았다. 그래서 석호와 석륵이 형제로 기록되기도 한다. 석호는 천성이 잔인하고 무도하여 석륵의 군중에서도 많은 물의를 일으켰고 이에 석륵은 석호를 죽이려고 했지만 모친이 반대해 그만두었다. 석호가 장성하여 군사적 재능이 뛰어났기 때문에 석륵은 석호를 장군으로 삼고 총애한다. 석호는 석륵의 휘하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고 330년에 석륵이 황제에 즉위하자 중산왕(中山王)에 책봉되고 333년 7월 석륵이 사망하자 실권을 장악 334년 석홍을 폐위하고 섭정을 하면서 후조를 통치하다. 349년 정월에 황제로 즉위 얼마후인 4월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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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대 초왕(譙王) 석세(石世)재위기간 349년

요약: 석세 (石世, 339년 ~ 349년, 재위:349년)는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후조(後趙)의 제4대의 황제이다. 시호나 묘호는 받지 못하고 폐위된 후에 초왕(譙王)에 봉해졌다. 석호(石虎)의 아들로 어머니는 유씨(劉氏)이며 339년에 태어났다. 석호는 348년에 태자 석선(石宣)의 모반을 처단하고 난 후에 장성한 아들을 태자로 삼으면 다시 모반을 일으킬 것이라 생각하고 10세의 석세를 태자로 삼았다. 그리고 장시(張豺), 장거(張舉), 이농(李農) 등을 석세의 측근으로 보필하게 하였다. 349년에 병으로 쇠약해진 석호는 태자가 어렸기 때문에 이를 보필하도록 팽성왕(彭城王) 석준(石遵)을 대장군(大將軍)으로 삼아 관중(關中 : 산시 성 중부)을 진수하게 하였으며 연왕(燕王) 석빈(石斌)을 승상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석세의 모후 유씨는 석준이나 석빈이 황위를 찬탈할 것을 두려워하여 이들을 축출하려 하였다. 마침 석호의 병세가 깊어졌기 때문에 유씨는 석빈을 속여 수도 업(鄴)으로 오는 것을 막다가 황명을 위조하여 살해하였으며, 업으로 들어온 석준도 석호를 만나지 못하게 하였다. 석준이 부임지로 떠나고 난 후 석호가 죽자, 석세가 즉위하였다.

황태후(皇太后)가 된 유씨는 석준과 의양왕(義陽王) 석감(石鑒)을 좌·우승상으로 삼아 회유하려 하였다. 정권을 잡은 장시, 장거, 이농 등은 곧 내분을 일으켰고, 패배한 이농은 광종(廣宗)으로 달아나 유민을 모아 반군을 조직하였다. 이에 장시는 장거를 보내 이농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업을 수비하는 병력이 외부로 돌려졌으며, 이때를 틈타 석준이 일으킨 군대가 업을 접수하였다. 석세는 폐위되어 초왕(譙王)에 봉해졌으며 태후 유씨도 폐위되었다가 곧 살해되었다.


제5대팽성왕(彭城王) 석준(石遵) 재위기간 349년

요약: 석준 (石遵, ? ~ 349년, 재위:349년)은 후조(後趙)의 제5대 황제로 시호나 묘호는 받지 못했다. 석호(石虎)의 아들로 석호의 치세 때는 팽성왕(彭城王)에 책봉되었다. 어머니는 정씨(鄭氏)이다. 349년에 석호에 의해 대장군(大將軍)에 임명되었으며 관중(關中 : 산시 성 중부)을 진수하도록 명을 받았다.

이에 업(鄴)으로 귀환한 석준은 황후 유씨(劉氏), 장시(張豺) 등의 방해로 석호를 만나보지 못한 채 임지를 향해 떠났다. 곧 석호가 사망하고 석세(石世)가 즉위하였다. 석준은 하내(河內)에서 이 소식을 들었으며, 마침 반란을 진압하고 귀환중이던 포홍(蒲洪), 요익중, 석민(石閔) 등과 이성(李城)에서 조우하였다. 제장들이 석준에게 황위를 빼앗을 것을 권하자 석준은 찬탈을 결심하고 거병하였다. 이때 수도 업의 병력은 이농(李農)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떠나 있었기 때문에 석준은 손쉽게 수도를 장악하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석준은 각지의 종실왕들을 위무하고 석민과 이농을 중용하였다. 그러나 석준의 즉위에 반대하여 패왕(沛王) 석충(石沖)이 계(薊)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며, 동진(東晉)이 쳐들어와 서주(徐州 : 장쑤 성 북부)를 위협하였다. 석준은 석민을 파견하여 석충의 반란을 진압하고 이농을 보내 동진군을 격파하였다. 낙평왕(樂平王) 석포(石苞)가 관중에서 반란을 일으키려 하였는데 동진의 양주(梁州)에서 관중을 위협하였기 때문에 거병하지 못하였다. 이를 틈타 석준은 석포를 체포하고 관중을 안정시켰다. 정세가 안정되자 석준은 석민을 제거할 모의를 하였다. 석민은 석준의 쿠데타에서 큰 전공을 세운 후 세력이 크게 성장하여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등 전횡을 부렸다. 이로 인해 석준은 여러 종실왕들과 석민을 제거할 모의를 하였으나 태후 정씨가 반대하여 결론을 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모의에 참여하였던 의양왕(義陽王) 석감(石鑒)이 석민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곧 석민이 반정을 일으켜 석감을 옹립하고 석준을 폐위해 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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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대 의양왕(義陽王) 석감(石鑒)

연호 청룡(靑龍) 350년/ 재위기간 349년 ~ 350년

요약: 석감 (石鑒, ? ~ 350년, 재위:349년 ~ 350년)은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후조(後趙)의 제6대의 황제로 시호나 묘호는 받지 못했다. 석감은 석호(石虎)의 서자로 의양왕(義陽王)에 책봉되었다. 349년에 석세(石世)가 즉위하자 우승상(右丞相)에 임명되었으며, 석준(石遵)이 즉위하자 시중과 태보(侍中·太傅)에 임명되었다.

349년 11월 석준은 석민(石閔)을 숙청하기 위해 석감을 비롯한 여러 종실왕들을 소집하여 모의하였다. 석감은 이 사실을 석민에게 밀고하였으며, 석민은 반정을 일으켜 석준을 폐위·살해하고 석감을 황제로 옹립하였다. 석감이 황제에 즉위하기는 하였지만, 후조의 실권은 석민이 쥐고 있었다. 석감은 석민을 대장군, 이농(李農)을 대사마(大司馬)로 임명하였다. 석감은 석민을 제거하기 위해 암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다른 부하에게 누명을 씌워 석민의 보복은 피하였다. 양국(襄國)에서는 신흥왕(新興王) 석지(石祗)가 요익중(姚弋仲), 포홍(蒲洪) 등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석민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출정하려 하였으며 이를 틈타 석민을 암살하려던 석감은 다시 암살에 실패하였다. 석민은 석감을 유폐하고 수도 업(鄴)의 한족(漢族)을 선동하여 호족(胡族 : 이민족)을 학살하였다. 350년 정월, 석민은 국호를 위(衛)로 고쳤고 각지에서 석민에 반대하는 반란이 일어났으며 윤정월에 석민은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고 석감을 폐위해 살해하였다.


제7대 신흥왕(新興王) 석지(石祗)

연호 영녕(永寧) 350년 ~ 351년/ 재위기간 350년 ~ 351년

요약: 석지 (石祗, ? ~ 351년, 재위:350년 ~ 351년)는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후조(後趙)의 제7대의 황제이다. 시호나 묘호는 받지 못하였다. 석지는 석호(石虎)의 서자로 신흥왕(新興王)에 책봉되었다. 349년에 석감(石鑒)이 즉위하고 석민(石閔)이 실권을 장악하자 양국(襄國)에서 요익중(姚弋仲), 포홍(蒲洪) 등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350년에 석감이 폐위되고 석민(후에 염민冉閔으로 개명)이 염위(冉魏)를 건국하자 석지는 양국에서 황제에 즉위하였다. 6월에는 염민에 반대하는 여러 이민족 세력을 규합하여 석민을 공격하였으나 크게 패하였으며 10월에는 염민에게 수도를 포위당하였다. 석지는 351년에 황제 칭호를 폐지하고 조왕(趙王)을 자칭하며 전연(前燕)에 구원군을 청하였으며 2월에 염민의 포위군을 격파하였으나 염민에게 매수된 부하 유현(劉顯)에게 살해당해 후조가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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