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국

후조(後趙)의 창건자 석륵(石勒) 설명

올드코난 2017. 2. 14.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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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십육국 시대 후조(後趙)의 창건자 후조 고조 명황제 석륵(後趙 高祖 明皇帝 石勒, 274년 ~ 333년, 재위: 319년 ~ 333년)은 흉노(匈奴)의 하위 부족인 갈족(羯族) 소부락의 수령 주갈주(周曷硃)의 아들로 상당군(上黨郡 : 산시 성 유사) 출신이다. 전조(前趙)의 장수로 활동하다 독립해 후조를 건국하였다. 묘호는 고조(高祖), 시호는 명황제(明皇帝)이다.

서진시대 302년의 기근으로 부족이 뿔뿔이 흩어졌고 석륵도 떠돌아 다니다가 서진(西晉)의 동영공 사마등에게 사로잡혀 산동 지역의 사환에게 노예로 팔렸는데 비범한 재능을 인정받아 노예에서 해방되고 근방의 목장에서 일하게 되고 팔왕의 난이 일어나자 석륵은 목장 주인 급상(汲桑)과 함께 도적이 되었으며 팔왕의 난에 참여 용병으로 활약한다. 이때 급상은 석륵에게 성과 이름을 지어주었다.


석륵은 용병으로 활약하다 패배 군사와 근거지를 상실하고 307년 한(漢)의 유연(劉淵)에게 항복한다. 유연의 휘하에서 여러 전공을 세운 석륵은 독자적인 병력을 이끄는 장군이 되었고, 유연이 사망한 후 유총(劉聰)의 휘하에서 하북 및 하남 지역을 휩쓸고 다녔다. 석륵은 글씨를 읽을 줄 몰랐지만 식견이 뛰어나고 인재를 모으는 것을 좋아하였다. 309년에는 하북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뛰어난 선비들을 모아 군자영(君子營)이라는 부대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때 등용한 장빈(張賓)은 석륵의 1등 참모로 활약하였다.


석륵은 310년에는 한수를 건너 장강 유역까지 진격했다. 311년 영가의 난에 참여 도망치던 왕연(王衍)의 무리 10만을 격파하고 유요(劉曜), 왕미(王彌) 등과 함께 낙양을 함락시켰다. 낙양 함락 이후 황하 이남에서 약탈전을 지속하며 석륵을 죽이고 군대를 탈취하려고 모의하던 왕미를 속여 죽이고 왕미의 군대를 흡수한다.


312년, 석륵은 수춘(壽春)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장마로 인해 위기에 빠졌다. 이때 장빈은 석륵에게 약탈전을 그만두고 기주(冀州 : 하북성 중남부) 지역에 거점을 만들 것을 건의하였다. 석륵은 이를 따라 양국(襄國 : 허베이 성 형태시)을 수도로 하여 하북 일대에 반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였다. 316년에는 세력권 안으로 쳐들어온 병주(幷州 : 산시 성)의 유곤을 격파하고 병주 북부 일대를 차지하였다.


318년 한(漢)의 황제 유총이 사망한 후 반란이 일어나 황제 유찬(劉粲)이 죽고 병주 중남부 일대를 반란군이 점거하자 석륵은 장안에서 황제에 즉위한 유요의 명을 받아 조공(趙公)에 임명되어 반란군을 진압한다. 석륵의 군대에 패배한 반란군이 유요에게 항복하자 석륵은 분노하여 수도 평양(平陽)을 공격하여 불태웠다. 이후 유요와 화친하기 위해 사신을 보냈으나 유요는 사신을 죽여버리자 석륵은 유요와 결별 독자적인 세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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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년 11월 석륵은 조나를 세우로 조왕(趙王)에 즉위한다. 장안의 유요도 국호를 조(趙)로 바꾸었기 때문에 유요의 조나라를 전조(前趙), 석륵의 조나라를 후조(後趙)라고 부른다. 이후 석륵은 청주(靑州 : 산둥 성 동부), 연주(兗州 : 산둥 성 서부) 등 주변 지역을 점령해 나간다. 


그리고 324년부터 전조와 후조는 본격적으로 대립하기 시작하는데 325년 후조의 병주가 유요의 전조에게 항복하고 동진(東晉)의 사주(司州 : 허난성 중남부)도 유요에게 투항하고 낙양을 지키는 후조의 석생(石生)이 포위된다. 석륵은 석호(石虎)를 구원군으로 보내어 전조 군을 격파하고 오히려 역포위하게 된다. 전조의 유요는 장안에서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진격해 석호를 격파하지만 군중에서 갑작스런 혼란이 일어나며 패주하고 만다. 이로 인해 병주, 사주 일대를 후조가 모두 장악하게 되면 화북의 동진 세력도 크게 위축되어 후조는 회수(淮水) 이북을 모두 지배하게 된다.


328년, 후조의 석호는 병주 지역에 남아있던 전조의 거점을 공격하고 유요는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반격에 나서 석호가 크게 패배하고 낙양 일대를 유요가 포위하게 된다. 낙양 포위는 3개월 동안 계속되고 석륵은 구원군을 이끌고 낙양의 유요를 공격하는데 유요는 반격에 대한 대비를 소홀하는 바람에 석륵의 구원군이 근접하는 것을 허용하고 이로 인해 포위를 풀고 낙양 서쪽에 포진한다. 그리고 그해 12월 5일 석륵은 유요의 군대를 공격하는데 이때 유요는 술에 취해 있었고 덕분에 석륵은 크게 승리하고 유요도 포로로 잡아 처형한다. 329년에는 상규(上邽)로 도망가 있던 전조의 잔당도 토벌해 전조를 멸망시켰다.


330년 2월, 석륵은 천왕(天王)에 즉위하고 9월에 황제로 즉위하고 연호를 건평으로 정했다. 333년 석륵은 병에 걸리고 이에 큰 세력을 가지고 있던 석륵의 조카 석호는 권력을 장악하고 전횡을 부린다. 7월 석륵이 사망하자 석호는 석륵의 시신을 몰래 파묻어 아무도 무덤을 찾을 수 없게 만들었다.


[참고: 이 시기 고구려의 사신과 석륵의 일화]

석륵(石勒)이 고구려(高句麗) 사신 우문옥고(宇文屋孤)를 대접하는 술자리에서 신하인 서광(徐光)과의 대화 중 서광은 석륵은 한고조 유방과 하은주의 삼왕을 능가하니 헌원에 버금간다고 칭송하자 이에 석륵은 자신이 한고조 유방을 만났다면 그를 섬겼을 것이며 광무제 유수를 만났다면 천하를 다투었을 것이므로 한고조와 광무제의 중간에 있으니 자신을 헌원에 견줄 수는 없다고 자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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