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년 이복형 혜제 사마충이 독살 당하자 사마치(司馬熾)가 황제가 되는데 이가 서진 3대 황제 회제다. 311년 흉노에 의해 세워진 한나라의 열종 소무제 유총에 의해 사로잡힌다. 그리고 온갖 수모를 당하게 된다.
312년 유총에 의해 회계공(會稽公)에 봉해지는데 유총은 연회에 사마치를 초대하고, 이때 사마치가 예장왕이던 시절에 서로 만났던 일에 대해 평했다.
"공이 예장왕이던 때에, 왕제(王濟)와 함께 당신을 뵌 적이 있습니다. 왕제는 나를 칭찬했고, 공은 "당신의 명성을 들어서 알고 있소."라고 했지요. 그리곤 공은 손수 작곡한 음악을 보여주었고, 왕제와 내게 작사를 부탁하였습니다. 우리는 공을 찬양하는 가사를 썼고, 당신은 정말 좋아했지요. 그리고 화살을 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난 열두 번 명중시켰고, 왕제와 당신은 아홉 번씩 명중시켰죠. 그리고 뽕나무 활과 은 벼루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기억하시나요?"
그리고 사마치가 말하길, "어떻게 그것을 잊겠습니까? 후회스러운 것은 용을 미처 몰라뵈었다는 것입니다." 라고 하자, 이 칭찬을 들은 유총이 이에 감탄하여 묻길, "일족끼리 살육을 벌인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라고 하자 사마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그건 사람의 의지가 아니고 하늘의 뜻이었습니다. 한나라는 신의 가호를 받으려는 참이었고, 우리 일족은 그래서 한나라를 위해 제거되었습니다. 우리가 무제의 뜻을 받들어 단합된 상태로 있었다면, 어떻게 주군께서 황제가 되었겠습니까? "
유총은 깊이 감명하였고, 밤새도록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 날, 유총은 아끼던 첩을 사마치에게 선물로 주었고 그 첩은 회계공작부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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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년 황실 새해 맞이 행사에서 유총은 사마치에게 고급 관리용 포도주를 접대하도록 하고 회제에게 노예의 옷을 입히자 유민(庾珉)과 왕준(王雋)은 이런 굴욕적인 광경에 분노가 참지못하고 그만 크게 울고 만다.
이것이 유총의 화를 돋워, 유민과 왕준은 물론 서진 시대의 관리들에게 모두 반역 및 서진 장수 유곤(劉琨)에 대한 내통 혐의를 뒤집어씌워 사형에 처했고 서진 회제(사마치)도 독살당한다.
3개월후 회제가 죽었다는 소식이 장안에 있던 태자 사마업(서진 민제)이 황제가 된다. 이 당시 장안의 상태는 총 가구 수가 100호도 되지 않았고, 수레도 다해서 4대 밖에 되지 않은 상황이었고 관리들이 사용할 도장과 피복까지 부족했다. 군사력은 국윤(麴允)과 삭침(索綝)에게 맡겨진 상태였다. 서진 민제는 진주(秦州; 지금의 간쑤 성 동부 지역) 에 그때까지도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사마보(司馬保)를 남양왕(南陽王)에 봉하고, 양쯔강 유역 및 남쪽에 상당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던 사마예를 낭야왕(琅邪王)에 봉했는데 이는 그들에게서 도움을 얻기 위한 것이었지만 별 도움을 주지 않는다.
316년 가을 전조의 장군 유요가 장안에 대규모 침공을 하고 중과부족이었던 민제는 결국 항복하게 되고 서진은 멸망한다.
전조의 군주 유총은 민제 사마업을 회평후(懷平侯)에 봉했고 318년 초 연회에서 유총이 사마업에게 하인 노릇을 시키는 등 굴욕을 주었다. 이후 여러 봉기가 있었고 황태자 유찬(劉粲)을 대신해 진 황제를 다시 옹립하려하자 유찬은 사마업의 처형을 건의하고 유총은 이를 받아들여 사마업을 처형시켰다.
동진(東晉)건국
306년 서진 말기, 영가의 난(永嘉之亂)에 의해 낙양(洛陽)이 함락되었고, 회제(懷帝)가 포로가 되고 진의 낭야왕(琅邪王)인 사마예는 건업(建業)으로 피하여 낭야의 호족 왕도(王導)의 힘을 빌려 이 땅에 동진을 건국했다. 이후 약 100년간 11대에 걸쳐 지속되었고, 화북으로부터 피해 온 북쪽 세력과 강남 토착의 호족 세력과 협력으로 운영되었다. 당시 화남 지역은 인구가 적고 낙후된 지역이었으나 화북지방으로부터 온 피난민은 초기에 세금을 감면하는 등 세제상 혜택을 주어 적극적으로 유랑민을 받아들이고 미개지 개간을 장려하였다. 그 결과 원래 습기가 많아 수자원이 풍부한 지역이기도 해 경제적으로 당시의 화북 지방과 겨룰 정도로 번영한다.
제9대 효무제(孝武帝)때 전진(前秦)의 남하정복 전투에 의해 위기를 맞게 되었다. 383년 비수 대전(淝水大戰)에서 승리하여 위기를 넘기지만 이때부터 농민 반란이 잦아지자 무장 환현(桓玄)이 반란을 탄압한다는 명분하에 거병하여 집권하게 되었다. 유유(劉裕)가 이를 진압하고 이에 대한 명분과 북벌 성공으로 새로이 집권에 성공한 뒤 아예 새로운 왕조를 세워 제위에 오르면서 동진은 멸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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