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국

서진(西晉, 265년 ~ 317년) 건국 진무제 사마염의 사치

올드코난 2016. 9. 11. 16:05
반응형

265년, 사마소가 죽고 진왕 직을 승계한 사마염은 위황제 조환(조위 원황제)을 겁박하여 선위를 요구했다. 선위받은 이후에 조환을 진류왕(陳留王)으로 봉하며, 낙양에서 국호를 진(晉)으로 바꾸고 그해 황좌에 오른다. 훗날 사마예가 건업에 건설한 동진과 구별하기 위하여, 흔히 사마염이 건설한 진을 서진이라 부른다. 


서진의 첫황제 세조 무황제 사마염(西晉 世祖 武皇帝 司馬炎, 236년 ~ 290년)은 280년 명장 두예(杜預)와 왕준(王濬)의 분투로 손호가 다스리고 있던 오나라를 멸망시키면서 60년의 삼국 정립의 시대의 막을 내리며 삼국 시대를 종식시키고 중원을 통일시킨다.


삼국을 통일한 뒤, 즉위 초반 태의령 정거가 바친 꿩의 머리 가죽을 이어 만든 호화스러운 모자와 가죽옷 치두구를 대주전 앞에서 불태우고 다시는 이런 걸 바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는 등 초기에는 사마염은 검소한 생활을 하며 선정을 베풀지만 말년에는 부패해 서진을 몰락하게 만든다.


사마염이 이토록 전혀 다른 정치를 하게 된 것은 사마염의 인간미가 변한 것이 아니었다. 사마염 즉위 초반에는 사마소의 아내이며 사마염의 어머니인 문명황후 왕원희가 있었다. 현명하고 덕이 있는 여성으로 그녀가 살이 있을 시기에는 사마염이 분명 성군의 모습을 보였지만, 그녀의 사후 확실히 타락한 모습을 보인다. 아쉽게도 서진 건국후 3년 만에 52세 나이로 죽었는데, 이후부터 사마염의 사치와 여성 탐닉이 시작된다. 야사에는 1만명의 처녀를 후궁으로 들여와 양이 끄는 수레에 타고 양이 멈추는 곳의 후궁과 밤을 보냈다고 전한다. 


사마염의 사람됨에 관한 한 일화가 몇개 있다. 

첫째는 진무제 사마염이 어느 날 신하들에게 '왜 짐은 공명 같은 신하가 없느냐'고 묻자 '폐하께서는 공명이 여럿 있어도 답이 없다'고 비꼬았다고 한다. 사마염은 후한 말기 환제와 영제와 비견하는 이도 있다.


또 다른 일화는 신하를 지방관에 임명할 때 하나는 사치벽이 심하고 다른 한 사람은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사마염은 “사치가 심하면 좋지만 술병은 평생 못 고친다.”라는 이유로 사치벽이 심한 신하를 임명할 정도로 사치가 심한 인물이었다. 그나마 사마염은 건국 초기라 망국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사마염의 의런 행태가 서진의 멸망을 재촉한 원인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