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국

사치를 일삼은 왕개(王愷)와 석숭(石崇)

올드코난 2017. 2. 13.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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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은 개국한지 52년만에 멸망하는데 이는 초대황제 사마염 시대의 사치에서 시작된 것이다. 서진초기 대표적인 엄청난 부호이며 사치를 겨뤘던 왕개와 석숭에 대해 정리해 본다.

사치를 일삼은 왕개(王愷)와 석숭(石崇)


1.왕개

왕개(王愷, ? ~?)의 자는 군부(君夫)로 왕랑(王朗)의 손자이자 왕숙(王肅)의 아들이다. 그의 누나인 왕원희(王元姫)는 사마소(司馬昭)에게 시집을 가 서진의 초대황제 세조 무황제(世祖 武皇帝)의 어머니이자 동시에 서진의 황태후가 된다.

그는 집안이 명문일 정도로 서진의 대귀족이나, 학문으로 유명했던 누나 왕원희(王元姫)와는 달리 사치로 유명했다. 특히 후장군 시절 산기상시 석숭과 사치의 경쟁으로 라이벌 관계였다. 왕개는 사치 뿐만 아니라 인간성으로도 석숭과 호적수가 될 만 했는데, 악사가 음악을 좀 잘못 연주했다고 그 자리에서 끌어내 때려 죽였다고 한다. 말 위에서 활쏘기를 좋아해 땅을 사서 울타리를 만들고 땅 한 쪽에 돈을 깔아 당시 사람들이 금전의 제방이라고 불렀다는 등의 석숭과 비슷한 일화가 남아 있다. 세조 무황제는 외삼촌인 왕개를 꽤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왕개가 석숭과의 사치 경쟁에서 조금 밀린다는 이야기를 듣자 황실의 보물인 산호수를 내어줄 정도였으며, 그 뒤 서진은 이때부터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2. 석숭

석숭(石崇, 249년 ~ 300년)은 석포의 막내아들이며, 자는 계륜(季倫), 아명은 제노(齊奴)다. 청주(靑州) 발해군(渤海郡) 남피현(南皮縣) 사람욿 관직을 이용해 향료 무역 등을 독점하여 큰 부자가 되었다. 백여명의 처첩(妻妾)을 거느렸으며, 집안의 하인도 8백여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중국과 한국 등 동아시아 지역에서 오랜 기간 동안 부자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다. 중국에서 석숭은 복(福), 녹(祿), 수(壽)의 삼선(三仙)의 가운데 녹(祿)을 상징하는 인물로 숭앙되었다.


무제(武帝) 때 수무령(修武令)으로 관직을 시작해 성양태수(城陽太守) 등을 지내고 안양향후(安陽鄕侯)로 봉해졌다.

혜제(惠帝) 때 중랑장(中郞將), 형주자사(荊州刺史) 등의 벼슬을 하였다. 형주자사에 부임하면서 항해와 무역으로 큰 부자가 되었는데, <진서(晉書)>에는 "멀리 가는 상인과 상인을 위협하여 치부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마충의 황후인 가남풍(賈南風)이 조정에서 전권을 휘두르며 가씨(賈氏) 일족의 권세가 커지자 가남풍(賈南風)의 조카인 가밀(賈謐)과 가까이 지내며 이른바 '24명의 벗(二十四友)' 가운데 하나로 불렸다. 학문과 시에도 능통하여 문인으로서의 명성도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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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권으로 된 문집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늘날에도 '사귀인(思歸引)', '사귀탄(思歸歎)' 등의 시가 전해진다. 석숭에게는 녹주(綠珠)라는 애첩(愛妾)이 있었는데, 피리를 잘 불 뿐 아니라 악부(樂府)도 잘 지었다. 그는 녹주를 총애하여 '원기루(苑綺樓)' 또는 '녹주루(綠珠樓)'라고 하는 백장 높이의 누각을 지었다. 조왕(趙王) 사마륜(司馬倫)의 측근이었던 손수(孫秀)가 녹주의 미색을 탐하였으나 석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낙양 서쪽에 금곡원(金谷園)을 지었는데, 집안을 매우 호화롭게 꾸며 뒷간도 화려한 옷을 입은 십 여명의 시녀들이 화장품과 향수를 들고 접대하게 하여 손님들은 침실인 줄 알고 놀라 돌아올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금곡원(金谷園)에 관리와 문인들을 초대하여 주연(酒宴)을 자주 열며 풍류를 즐겼는데, 주연(酒宴)에서 시를 짓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벌로 세 말의 술을 마시게 하였다고 한다. 이 고사에서 '금곡주수(金谷酒數)'라는 말은 '술자리에서 받는 벌주'를 가리키게 되었다.

300년, 사마륜이 가후(賈后)의 세력을 제거하고 전권을 장악하자, 석숭은 황문랑(黃門郞) 반악(潘岳)과 함께 사마윤(司馬允)과 사마경(司馬冏) 등과 연합해 사마륜을 제거하려 했다. 손수가 이를 알고 대군을 이끌고 금곡원을 포위하자, 녹주는 누각에서 몸을 던져 자살하였고, 석숭은 반악 등과 함께 사로잡혀 참수당했다.


3. 사치를 겨룬 왕개와 석숭

진서(晉書)와 세설신어(世說新語) 등에서 석숭은 황제의 인척 왕개(王愷)와 부를 다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왕개는 당시 매우 귀했던 엿물로 솥을 씼었고, 석숭은 양초로 땔감으로 사용했다. 왕개가 자주색 비단으로 40리에 이르는 병풍을 만들자 석숭은 수를 놓은 비단으로 50리 병풍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는 과장이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진무제가 왕개를 위해 2척이 넘는 산호수를 하사하고 왕개를 이를 석숭에게 들고가 자랑하자 석숭은 전혀 놀라지 않으며 하인을 시켜 산호수를 부숴버린다. 이에 화가 난 왕개에게 자신의 산호수를 보여주었는데, 3척이 넘는 산호수들이 가득했고 왕개는 할 말을 잃었다고 전한다. 이들이 이야기는 과장된 점이 있지만 이들이 사치를 겨룬 것은 맞다. 그리고 이들의 부는 모두 권력을 이용한 부정부패라는 점에서 이들이 사치를 하면 할수록 백성들의 고통은 커지고 국가는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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