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중국

오호 십육국 전연(前燕) 설명, 전연 황제 계보

올드코난 2017. 2. 14.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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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의 왕조에 대해 알아 본다. 다섯 번째 전연(前燕: 337~370)은 선비족(鮮卑族) 모용황(慕容皝)에 의해 건국된 나라로 국호는 연(燕)이지만 동시대 같은 이름을 가진 나라가 5개나 되어 첫 번째로 건국된 이 나라를 전연으로 부른다.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 전연(前燕) 설명


선비족 모용부(慕容部)는 요서 일대를 근거지로 살던 부족으로 서진(西晉)에 복종하면서 선비의 다른 부족과 항쟁을 벌였다. 모용부의 수장 모용외(慕容廆)는 307년부터 선비대선우(鮮卑大單于)를 자칭하고 자립한다. 모용외는 혼란에 빠진 서진의 유민들을 받아들여 세력을 강화하고 319년 서진의 동이교위(東夷校尉) 최비(崔毖)를 물리치면서 요동(遼東) 지방의 패권을 얻는다.

333년에 모용외의 뒤를 이은 모용황(慕容皝)은 내분을 진압하고 337년에 연왕(燕王)을 자칭하며 전연을 건국한다. 338년 단부(段部)를 공격하고 후조(後趙)의 침입을 물리쳤다. 이후 후조와 대립하고 고구려(高句麗), 선비족 우문부(宇文部) 등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341년에는 용성(龍城; 지금의 요녕성 조양시)에 수도를 정했다.

348년 모용황의 뒤를 이어 즉위한 모용준(慕容儁)은 후조 멸망의 혼란을 틈타 350년에 유주(幽州) 일대를 점령하고 기주(冀州)를 공격하였다. 352년에는 염위(冉魏)를 멸망시키고 하북 지역을 점령하였으며 황제에 즉위하였다. 353년에는 업(鄴)으로 천도하고 영토 확장에 주력 화북의 동쪽 지역을 장악한다.


360년, 모용준의 뒤를 이어 모용위(慕容暐)가 즉위하는 나이가 어려 백부 모용각(慕容恪)이 섭정한다. 모용각의 섭정 기간에는 선정을 베풀어 태평성대를 누리지만 367년 모용각이 죽자 모용평(慕容評)이 실권을 잡고 부패한 정치를 하면서 전연의 국력은 쇠퇴한다. 369년 동진(東晉)의 환온(桓溫)이 북벌군을 일으켜 연을 공격하는데 전진(前秦)의 구원군과 모용수(慕容垂)의 활약으로 물리쳤다. 모용평은 모용수의 전공을 두려워해 모용수를 죽이려 하고 모용수는 전진(前秦)으로 망명한다. 370년 전진의 부견(苻堅)의 침입을 받아 항복하며 전연은 멸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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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연(前燕) 황제 계보


연 고조(燕高祖)무선황제(武宣皇帝) 모용외(慕容廆): 경소제 추증 황제

요약: 모용외(慕容廆, 269년 ~ 333년) 오호십육국시대 선비족(鮮卑族) 모용부(慕容部)의 수장으로 훗날 전연(前燕)을 세운 모용황(慕容皝)의 아버지이다. 전연이 건국된 이후 고조(高祖) 선무제(宣武帝)로 추존되었다. 269년 모용부의 대인(大人) 모용섭귀(慕容涉歸)의 차남으로 태어나 283년 모용섭귀가 죽자 그의 동생 모용내(慕容耐)가 정권을 장악하고 모용외를 죽이려 하였으나 모용외가 요동으로 달아나 목숨을 건졌다. 285년에 모용내가 국인(國人)에 의해 살해되자 모용외가 대인으로 추대되었다. 모용외는 선비족의 우문부(宇文部)와 사이가 좋지 않아 공격하려 하였으나 서진(西晉)에서 허락하지 않고 이에 서진과 적대하게 된 모용외는 유주(幽州) 일대를 공격해 노략질한다. 서진 무제(武帝)는 모용외를 공격하여 격파하였으나 노략질은 계속되었다. 또한 서기 285년 부여(扶餘)를 공격하여 부여왕 의려(依慮)를 자살하게 한다. 서진은 부여에 원군을 파견하여 모용외를 격파하고 모용외는 289년에 서진에 복속하였다. 서진은 모용외를 선비도독(鮮卑都督)에 임명하지만 모용외는 우문부, 단부(段部)의 침입을 피해 도하(徒河)의 청산(靑山)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294년에는 다시 본거지를 극성(棘城)으로 옮겼다. 307년, 모용외는 선비대선우(鮮卑大單于)를 자칭해 혼란에 빠진 서진에서 유민들이 모용외에게 귀부하여 오는 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국력을 크게 키웠다. 이에 서진의 평주자사(平州刺史) 최비(崔毖)가 유민들에게 돌아올 것을 종용하였으나 유민들이 듣지 않자 모용외가 억류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318년에 우문부, 단부, 고구려(高句麗)를 끌어들여 모용외를 협공하게 한다. 모용외는 삼국의 군사를 이간질시켜 위기를 벗어나고 우문부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였다. 이에 최비는 모용외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결국 319년에 고구려로 망명하고 모용외는 요동을 차지한다. 이후 모용외는 고구려와 적대하여 여러 차례 교전했다. 320년 동진(東晉)은 모용외를 안북장군·평주자사(安北將軍平州刺史)로 삼았으며, 이후 모용외는 동진에 충성하여 후조(後趙)와 대립하였다. 321년에는 동진에서 모용외에게 도독유평이주동이제군사·거기장군·평주목·요동공(都督幽平二州東夷諸軍事車騎將軍平州牧遼東公)을 제수한다. 325년 후조에 복속하였던 우문부가 석륵(石勒)의 명령에 따라 모용외를 공격하였으나 패하였으며, 오히려 반격을 당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333년에 사망했다.


제1대연 태조 (燕太祖) 문명황제 (文明皇帝) 모용황(慕容皝)

경소제 추증/ 재위기간 337년 ~ 348년/ 능호 용평릉(龍平陵)

요약: 모용황(慕容皝, 297년 ~ 348년, 재위: 337년 ~ 348년)은 전연(前燕)의 제1대 황제로 자는 원진(元眞), 시호는 문명왕(文明王)이었으나, 모용준(慕容儁)이 황제에 즉위한 후 태조(太祖) 문명제(文明帝)로 추존되었다. 모용외(慕容廆)의 적장자로, 321년에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333년에 모용외가 사망하자 뒤를 이어 전연 제1대(초대) 황제가 되는데 서형(序兄) 모용한(慕容翰)과 동생 모용인(慕容仁), 모용소(慕容昭)와 대립하며 모용부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모용인은 모용소와 함께 반란을 모의하였으나 이것이 도중에 발각되어 모용소가 죽자 평곽(平郭)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켜 요동 일대를 장악하고 모용한은 서쪽의 단부(段部)로 망명해 단부의 군대를 안내하여 모용황을 공격한다. 한때 모용황은 멸망 직전까지 몰렸으나 모용한이 모용부가 멸망할 것을 두려워해 철군하자 살아남는다. 336년 모용황은 모용인을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다시 모용부의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337년 모용황은 동진(東晉)에 대한 종속적 관계를 끊고, 연왕(燕王)을 자칭 전연을 건국한다. 모용황은 단부와 대립하였는데 후조(後趙)와 동맹을 맺고 338년에 단부를 협공하였다. 모용황은 협공으로 혼란에 빠진 단부를 공격하여 민호와 가축을 약탈한 후 전쟁에서 이탈하자 후조의 석호(石虎)는 전연에게 원한을 품는다. 단부를 멸망시킨 후조는 전연과 전쟁을 시작하는데 후조의 침입으로 한때 수도인 극성(棘城)이 포위되는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모용황은 농성전 끝에 후조군을 격파하고 반격에 성공해 영토를 일부 확장하기도 한다. 이후 후조의 유주(幽州)를 계속 공격해 약탈전을 벌였고 340년 다시 후조가 대군을 이끌고 전연을 위협하자 모용황은 후조의 전선을 우회하여 계(薊)를 습격, 크게 승리하였다. 342년에 용성(龍城)으로 수도를 옮겼다. 고국원왕 11년에 고구려에 침입해 환도성을 공략해 크게 승리하고 344년에는 우문부(宇文部)를 공격해 멸망시켰다. 모용황은 346년 세자인 모용준과 모용각을 시켜 부여를 공격하고, 부여의 현왕(玄王)과 백성 5만 명을 포로로 잡아 전연으로 끌고왔다. 모용황은 부여계 주민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현왕을 사위로 삼고, 진동장군(鎭東將軍)의 작위(爵位)를 내려 부여는 실질적으로 멸망하게 된다. 모용황은 한족의 유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한화(漢化) 정책을 취하였으며 농경을 장려하여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데 주력하다 348년 수렵 도중 낙마해 머리를 다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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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연 열조 (燕烈祖) 경소황제 (景昭皇帝)모용준(慕容儁)

경소제 추증 황제/ 연호 원새(元璽) 352년 ~ 357년, 광수(光壽) 357년 ~ 360년/ 재위기간 348년 ~ 360년/ 능호 용릉(龍陵)

요약: 모용준(慕容儁, 319년 ~ 360년, 재위: 348년 ~ 360년)은 전연(前燕)의 제2대 황제로 묘호는 열조(烈祖), 시호는 경소제(景昭帝)다. 319년 모용황(慕容皝)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337년 모용황이 전연을 건국하고 연왕(燕王)에 즉위하자 황태자로 책봉되고 348년 모용황이 죽자 뒤를 이어 연왕에 즉위한다. 349년, 동진(東晉)은 모용준을 사지절·시중·대도독·독하북제군사·유평이주목·대장군·대선우·연왕(使持節、侍中、大都督、督河北諸軍事、幽、平二州牧、大將軍、大單于、燕王)에 책봉해 정식으로 연왕이 되었다. 같은 해, 후조(後趙)의 석호(石虎)가 죽고 후조가 혼란에 빠지자 모용준은 후조 정벌 준비를 마친후 350년 출정 계(薊 베이징)를 점령하여 수도를 그곳으로 옮기고 기주(冀州 허베이 성 중남부)를 공격했다. 당시 후조와 염위(冉魏)가 전쟁 중이었고 모용준은 이 전쟁에 개입해 큰 이득을 얻는다. 351년 후조가 멸망하고 352년에 염위도 쇠약해지자 모용준은 모용각(慕容恪)을 파견하여 염위의 황제 염민(冉閔)을 격파·포획하고 뒤이어 염위를 멸망시켰다. 화북의 동부 일대를 차지한 모용준은 352년에 황제에 즉위하고 동진과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영토 확장에 주력하여 산둥 성, 산시 성, 허난 성 지역을 점령하고 전진(前秦), 동진과 대립하였다. 357년에 업(鄴)으로 천도했다. 360년 정월에 병사했다.


제3대유황제 (幽皇帝) 신흥후( 新興侯) 모용위(慕容暐)

연호 건희(建熙) 360년 ~ 370년/ 재위기간 360년 ~ 370년

요약: 모용위(慕容暐, 350년 ~ 384년, 재위: 360년 ~ 370년)는 전연(前燕)의 마지막 황제로 시호는 유제(幽帝)다. 모용준(慕容儁)의 셋째 아들로 350년에 태어났다. 형 모용엽(慕容曄)이 죽어 357년에 황태자에 책봉되고 360년에 모용준이 죽자 황제에 즉위했다. 즉위 당시 모용위가 어렸기 때문에 국정은 모용준의 동생 모용각(慕容恪)이 이끌었는데, 모용각은 선정을 베풀어 전연의 전성기를 이끌어 362년에 동진(東晉)의 낙양(洛陽)을 공격하고 365년에 함락하해 하남 지역을 점령한다. 366년에 모용각이 죽자 모용평(慕容評)이 국정을 맡았는데 모용평은 부패한 인물로 뇌물을 받고 국정을 농단하며 전연의 국력은 쇠약해진다. 369년 동진의 환온(桓溫)이 북벌군을 일으켜 전연을 공격하여 수도 근방까지 진격하고 이에 모용평은 전진(前秦)에 구원군을 요청하는 한편 모용수(慕容垂)를 보내 북벌군을 공격해 격퇴하지만 북벌군을 격파한 모용수의 권위가 높아지자 이를 두려워한 모용평은 태후 가족혼씨(可足渾氏)와 함께 모용수를 암살을 모의하고 이 사실을 알게 된 모용수는 전진으로 망명한다. 전진의 부견(苻堅)은 구원군을 파견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것을 명분으로 전연을 공격하고 370년 왕맹(王猛)이 이끄는 전진군은 업(鄴)을 함락하여 전연을 멸망시키고, 모용위는 장안으로 끌려와 신흥후(新興侯)에 임명된다. 383년 비수대전(淝水大戰) 때 모용위는 모용수를 따라 운성(鄖城)에 주둔하는데 부견이 패배하자 도망쳐 장안으로 돌아왔다. 384년 부견의 암살을 모의하다 살해당하고 400년에 모용덕(慕容德)이 유제(幽帝)라는 시호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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