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티베트계 저족(氐族)에 의해 건국된 전진(前秦, 351년~394년) 황제 계보
진태조(秦太祖) 부홍(苻洪): 묘호 진태조(秦太祖), 시호 혜무황제(惠武皇帝), 경명제 추증
요약: 부홍(苻洪, 284년 ~ 350년)은 중국 오호십육국 시대 저족(氐族)의 수장으로 훗날 전진(前秦)을 세운 부건(苻健)의 아버지이다. 전진이 건국된 이후 태조(太祖) 무혜제(武惠帝)로 추존되었다. 부홍은 약양(略陽)에서 출생했다. 원래 성은 포씨(蒲氏)로 영가의 난이 일어났을 무렵에 저족 무리의 수장으로 부족을 이끌며 호저교위,진주자사,약양공(護氐校尉秦州刺史略陽公)을 자칭했다. 310년 전조(前趙)의 유연(劉淵)이 포홍에게 관작을 내렸으나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활동한다. 유요(劉曜)가 관중(關中)을 장악한 이후 전조에 복속하였으며 329년에 전조가 멸망하자 후조(後趙)에 복속되었다. 333년 석생(石生)의 반란에 참여 석호(石虎)에 맞섰으나 패배한 후 다시 석호에게 복속되는데 석호는 저족과 강족(羌族) 10여 만 호를 관동(關東)으로 이주시켰다. 포홍은 저족을 이끌고 방두(枋頭 : 허난 성 준현)에 주둔하였다. 석호의 치하에서 포홍은 장군으로 활약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이로 인해 염민(冉閔)의 참소를 받기도 했다. 349년, 포홍 등의 장수들은 장안 방면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그 사이에 석호가 죽고 석세(石世)가 즉위한다. 포홍 등은 돌아오는 길에 석준(石遵)을 만나 쿠데타를 일으키도록 종용해 석준을 즉위시켰다. 그러나 염민이 다시 포홍을 참소하였기 때문에 포홍은 불만을 품고 방두를 점거한 채로 동진(東晉)에 투항하여 관작을 받았다. 후조가 후계자 분쟁을 일이키며 혼란에 빠지자 포홍을 비롯하여 각지의 군벌들이 자립하였는데, 포홍과 요익중(姚弋仲)이 모두 고향인 관중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요익중은 포홍을 습격하였으나 패배하였으며, 승리한 포홍은 350년에 삼진왕(三秦王)을 자칭하며 성을 고쳐 부씨(苻氏)로 하였다. 이는 당시에 유행하던 도참인 "草付應王"을 따른 것으로 草(艸)와 付를 합쳐 苻를 성으로 삼았다. 부홍은 관중으로 진격할 준비를 하였으나 부하 마추(麻秋)에게 피습당했고 부홍은 아들 부건에게 관중으로 들어가라는 유언으로 남기고 사망했다.
제1대 진고조 (秦高祖) 경명황제 (景明皇帝) 부건(苻健)
연호 황시(皇始) 351년 ~ 355년/ 재위기간 350년 ~ 355년
요약: 부건(苻健, 317년 ~ 355년, 재위 : 351년 ~ 355년)은 전진(前秦)의 초대 황제로 묘호는 고조(高祖). 시호는 경명제(景明帝). 부홍(苻洪)의 셋째 아들로 317년에 태어났다. 후조(後趙)의 석호(石虎)가 부건의 형을 죽였기 때문에 350년에 부홍이 죽자 부건이 뒤를 이었다. 부건은 관중을 지배하던 두홍(杜洪)을 방심시키기 위해 삼진왕(三秦王)의 칭호를 버리고 동진(東晉)의 관작을 받았고 주둔지에서 보리를 파종하였다. 두홍은 이러한 부건의 책략에 속아 방비를 하지 않았고 부건은 이를 틈타 장안을 점령한다. 351년 정월 부건은 진(秦)을 건국하고 천왕(天王)에 즉위하고 352년에 황제에 즉위했다. 두홍의 잔당을 토벌하고, 전량(前凉), 동진의 사마훈(司馬勳) 등과 싸우면서 관중을 경영하였다. 은호(殷浩)의 북벌군이 사주(司州 : 허난 성 중부)로 침공해오자 이에 맞서 승상 부웅(苻雄)을 파견하여 물리쳤으나 겨울에는 허창을 빼앗겼다. 353년에 장안에서 장우(張遇)의 모반이 일어나 진압하였으나 다시 각지에서 모반이 일어났다. 부건은 부웅 등을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한다. 354년 환온(桓溫)의 북벌군이 쳐들어와 부건은 위기를 맞는데 환온은 주력군을 장안으로 보내 부건을 묶어두는 한편 사마훈에게 장안 서쪽의 비어있는 땅을 공격하게 한다. 부건은 청야작전을 펼쳐 환온군의 보급을 곤란하게 하고 부웅에게 7천의 기병을 주어 사마훈을 공격한다. 환온은 장안 바로 근처까지 진군하다 보급 문제로 철군하고 사마훈은 부웅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해 한중(漢中)으로 퇴각해 위기를 넘긴 부건은 8월에 관중을 평정하는 데 성공한다. 355년 태자 부장(苻萇)이 죽자 부생(苻生)을 태자로 삼았다. 6월, 부건이 병에 걸려 앓아 눕자 부건이 죽은 것으로 착각한 부청(苻菁) 등이 모반하였는데, 부건은 직접 출정하여 이 반란을 진압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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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여왕(厲王) 부생(苻生)
연호 수광(壽光)355년 ~ 357년/ 재위기간 355년 ~ 357년
요약: 부생(苻生, 335년 ~ 357년, 재위 : 355년 ~ 357년)은 전진(前秦)의 제2대 황제로 시호는 여왕(厲王)이다. 부건(苻健)의 셋째 아들로 335년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한 쪽 눈이 불구였고, 성정이 포악하여 조부 부홍(苻洪)에게 미움을 받았다. 354년 형 부장(苻萇)이 전쟁에서 얻은 상처로 사망하자 전진의 태자 자리가 비게 되었다. 부건은 당시 유행하던 도참인 '오양삼안(五羊三眼 : 양 세 마리에 눈 다섯 개)'을 따라 애꾸눈인 부생을 태자로 삼았다. 355년 부건이 죽자 뒤를 이어 황제에 즉위한 부생은 잔혹한 폭정을 일삼았는데 사람을 예사로 죽이고 공신들을 마음대로 처형하였다. 355년 전량(前凉)이 전진에 속국이 되었고 357년에는 강족 요양(姚襄)의 침공을 막아 요양을 전사시켰고 항복해 온 요장(姚萇)을 받아들였다. 같은 해 부견(苻堅)의 반정으로 살해당했다.
문환황제 (文桓皇帝) 부웅(苻雄): 선소제 추증
제3대 진세조 (秦世祖) 선소황제(宣昭皇帝) 부견(苻堅)
연호 영흥(永興) 357년 ~ 359년, 감로(甘露) 359년 ~ 364년, 건원(建元) 365년 ~ 385년/ 재위기간 357년 ~ 385년
요약: 부견(苻堅, 337년 ~ 385년, 재위 : 357년 ~ 385년)은 전진(前秦)의 3대 황제로 자(字)는 영고(永固) 혹은 문옥(文玉),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선소제(宣昭帝)이다. 부건(苻健)의 동생 부웅(苻雄)의 아들로 어릴적부터 명민하여 부홍(苻洪)의 총애를 받았다. 354년에 부웅이 전사하자 동해왕(東海王)의 작위를 이어받았다. 357년 왕맹(王猛)을 등용하고 반정을 일으켜 부생(苻生)을 폐위하고 천왕(天王)에 즉위한다. 즉위 초 왕맹을 중용하여 내치를 다지고 개혁을 실시해 전진의 국력을 크게 성장시키고 영토를 확장했다. 동진과는 적대관계를 유지하고 고구려에 불교를 전파했다.
375년에 왕맹이 병사한 이후 부견은 사치를 일삼고 무리한 전쟁을 지속하여 전진의 국력을 약화시키고 385년에 서연이 장안을 함락하자 부견은 서쪽으로 도망치다가 후진의 요장에게 포로로 사로잡혔고 요장의 선양 요구를 거절 살해당했다. 요장은 부견에게 장렬천왕(壯烈天王)이라 시호를 내렸고 부비는 세조(世祖) 선소제(宣昭帝)로 추증했다.
제4대 애평황제 (哀平皇帝) 부비(苻丕)
연호 태안(太安) 385년 ~ 386년/ 재위기간 385년 ~ 386년
요약: 부비(苻丕, ? ~ 386년, 재위 : 385년 ~ 386년)는 전진의 4대 황제 시호는 애평제(哀平帝), 부견(苻堅)의 서장자(序長子)로 장락공(長樂公)에 봉해졌다. 383년 비수대전(淝水大戰) 무렵 업(鄴)에 주둔 하북 일대를 수비했다. 부견이 비수에서 대패하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부비는 모용수(慕容垂)를 시켜서 적빈(翟斌)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도록 하고 부비는 모용수가 모반할 것을 두려워하여 이를 견제하도록 부비룡(苻飛龍)을 함께 파견했는데 모용수는 부비룡을 죽이고 384년 후연(後燕)을 건국한다. 부비가 업에서 농성하는 가운데 모용수는 업을 포위하고 하북 각지를 점령하였다. 385년 4월까지 치열하게 농성전을 벌인 부비는 동진(東晉)의 원군에 힘입어 포위를 물리치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업을 버리고 장안으로 돌아가려던 부비는 8월에 부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진양(晉陽)으로 들어가 황제에 즉위했다. 부비는 농서(隴西) 지역에서 후진(後秦), 서연(西燕)에 항전하는 세력들을 규합·통제하는 한편 후연에 맞서 전쟁을 벌였다. 농서 지역과 부비의 진양은 후진, 서연 등에 의해 단절되어 있었기 때문에 농서의 전진 세력들은 사실상 독자적인 세력이었다.
386년 8월, 부비는 후연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여 진양을 버리고 남하하다 평양(平陽)에서 서연 모용영(慕容永)의 공격을 받아 패주한다. 부비는 잔병을 모아 낙양(洛陽)을 공격하려 했지만 동진의 반격을 받아 전사한다. 부등(苻登)이 황제에 즉위한 후 애평제(哀平帝)라는 시호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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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대 진 태종 (秦太宗) 고황제 (高皇帝) 부등(苻登)
연호 태초(太初) 386년 ~ 394년/재위기간 386년 ~ 394년
요약: 부등(苻登, 343년 ~ 394년, 재위: 386년 ~ 394년) 전진(前秦)의 5대 황제. 시호는 고제(高帝). 부견(苻堅)의 방계 일족으로 항렬 상 손자에 해당하며 아버지는 부창(苻敞)이다. 부창이 부생(苻生)에게 살해된 후 부견이 즉위해 부등의 형인 부동성(苻同成)에게 작위를 잇게 했다. 부등은 금군을 이끄는 직위에 임명되었으나 부쌍(苻雙)의 난에 연좌되어 좌천되어 적도현의 장으로 임명되었다. 383년 비수 대전으로 부견이 몰락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부등은 부한(枹罕)에서 저족 군단을 지휘하는 하주 자사(河州―) 모흥(毛興)에게 몸을 피했고 모흥은 군대의 지지를 잃어 살해되고 뒤를 이은 위평(衛平)도 경질되자 386년 7월 부등이 군단의 지휘자로 추대되었다. 부등은 후진(後秦)과 전쟁을 치르면서 전진의 황제 부비(苻丕)로부터 남안왕(南安王)에 책봉되었다. 부비가 9월에 전사하고 11월에 이 소식을 들은 부등은 주위의 추대를 받아 황제에 즉위하였다. 황제에 즉위한 부등은 각지의 친 전진계 세력들을 포섭 후진에 대한 포위망을 구축하고 후진과 치열한 전쟁을 치렀다. 초기에는 결사적인 각오로 전쟁에 임하여 후진을 궁지에 몰아넣었으나 389년에 근거지를 급습당하여 황후까지 빼앗길 정도의 큰 피해를 입어 이후 전선이 고착되고 이후에도 계속해서 후진을 공략하였으나 부하들이 배반하는 일이 속출하여 점차 국력이 피폐해져 갔다. 393년말에 후진의 황제 요장(姚萇)이 사망하자 이를 기회로 후진과 결전을 치르기 위해 출진하였다. 394년에 폐교(廢橋)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부등은 크게 패배하고 근거지의 일족들이 패배 소식을 듣고 흩어졌기 때문에 근거지로 돌아가지 못하고 마모산(馬毛山)으로 피신했다. 6월에는 재기를 위해 서진(西秦)의 걸복건귀에게 원군을 청하였으나 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요흥(姚興)의 군대가 도착하여 포위되었다. 전투에서 패한 부등은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부숭(苻崇)이 황제에 즉위한 후에 묘호를 태종(太宗), 시호를 고제(高帝)로 했다.
제6대 부숭(苻崇)
연호 연초(延初) 394년/ 재위기간 394년
요약: 부숭(苻崇, ? ~ 394년, 재위 : 394년)은 전진(前秦)의 마지막 황제로 시호는 없다. 부숭은 부등(苻登)의 장자로 388년에 태자에 책봉되었다. 394년 7월에 부등이 전사하자 황중(湟中)으로 도망쳐 황제에 즉위하고 아들 부선(苻宣)을 태자로 삼았다.
부숭은 서진(西秦)의 걸복건귀에게 의지하여 전진을 부흥시키려 했지만 10월에 이르러 걸복건귀에게 쫒겨나고 이에 부숭은 후구지(後仇池)의 양정(楊定)에게 도망쳤고, 양정의 군대와 힘을 합쳐 걸복건귀를 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부숭과 양정은 걸복건귀에게 살해되고 전진은 멸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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