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시

구지가 논문 - 龜旨(구지)를 찾아서

올드코난 2010. 7. 28. 17:31
반응형

龜旨(구지) 찾아서

 

            1

 오늘 우리가 찾아 나선 곳은 구지봉이다.구지봉은 경상남도 지정 문화재 기념물 58호로 경남 김해시 구산동 산 81 2 자그마한 동산을 말한다.이 위에 ?대가락국 태조왕 탄강지지?라 씌어진 돌비석(조선 말기에 세움)이 있고 돌로  거북과 6개의 알을 조각하여 놓았다.그 옆에는 남방식 지석묘가 하나 있는데,그 뚜껑돌에 ?龜旨峯石?이란 커다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이 글씨는 한석봉의 친필이라는 말이 있다.일제가 민족 정기가 서린 곳마다 지맥을 끊어 말살하려는 풍수 작업의 하나로 1920년 이 거북형의 구지봉-김수로왕 탄생의 성역이 자리한 거북머리 부위와 동체부위의 산허리를 잘라 마산으로 통하는 신작로를 내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김해시는 알자리가 있는 이 구지봉의 단절된 목을 동체에 잇는 작업을 하기로 했다.(1991) 이미 나있는 도로를 터널로 덮고 그 윗부분을 연결시켜 복원시키는 지맥연결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화문화재 보수란 차원에서 빛나는 일임에 틀림없다.

  다음으로,경남 김해시 서상동 312 수로왕릉을 崇善殿(사적 제 73)이라 부르는데 안에는 ?수로왕 천강도? 벽화가 그려져 있다.뜰에는 포구나무가 서 있고,여러 돌비가 있다.

                      2

  <가락국기>는 고려 문종 31(1076)에 금관 지주사 문인이 찬한 글이다.

  * 고려 문종 30(1076) 당시 金州知事 金良謚 왕명에 따라 금관국의 시조와 왕후의 능원과 형사 등을 수찬한 비문기록이다.[홍순욱]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엮으면서 紀異(삼국 시조가 탄생하는데 따른 신이한 설화를 모아 놓은 곳) 2에 줄여서 실었다.

  <가락국기>

(1)구간의 통치

(2)시조 수로의 등장

(3)탈해와의 왕위 쟁탈

(4)왕후 허황옥과의 만남

(5)왕과 왕후의 죽음

(6)

(7)거등왕에서 구형왕에 이르는 九代孫 역수

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살펴볼 것은 이 가운데  (1)-(2)의 건국신화와 구지가 대목이다.

 

       <      >

 

  가락국의 형성을 밝힐 수 있는 사료로 삼국사기에 아래와 같은 것이 있다.

① 신라본기 시조 赫居世 居西干 조에

  ?19(기원전 39) 봄 정월,卞韓 나라를 바치고 항복하였다.?

② 신라본기 脫解 尼師今 조에

  ?원년(기원후 57) 탈해 이사금이 이 해 나이 62세 였다.탈해는 본디 多婆那國 소생인데 그 나라는 왜국 동북 1천리에 있다.처음 그 나라 왕이 女人國 왕녀에게 장가들어 아내로 삼았던 바 태기가 있어 7년 만에 큰 알 하나를 낳았다.왕은 말하기를사람으로서 알을 낳았으니 상서롭지 못한지라 버려 마땅하다.”고 하나 그녀는 차마 못하여 비단으로 알을 싸고 보물을 아울러 싸서 독 속에 넣어 바다에 띄워 갈 데로 가게 하였다.그래서 그 독이 처음 金官國 해변에 밀리니 금관 사람들이 괴히 여겨 가져가지 아니하였다.辰韓 阿珍浦口 닿으니 이 해가 시조 혁거세가 재위한 지 39(기원전 19)이었다.?

③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 이사금 조에

  ?21(기원후 77) 가을 8,아찬 길문이 加耶 黃山津 입구에서 싸웠다.?

  에 등장하는 卞韓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변한 12국 가운데 어느 한 나라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그런데에 이미 금관국이라는 국명이 등장하고 있다.기원전 19년에는 금관국이 이미 성립하였다는 말이다.물론 이것이 정확한 연대인지는 더 따져 보아야 한다.기원전 19년에 탈해가 알에서 태어나 자라서 62세에 즉위했다면 기원후 43년이 즉위년이 되어야 한다.그럼에도 기원후 43년은 유리 이사금 20년에 해당하고 탈해의 즉위년은 기원후 57년으로 되어있다.14년의 년대 차이가 나는 것이다.이 때문에 산국사기 초기 기록을 신뢰할 수 없다는 말이 나왔다.하지만 14년 차이가 기록에 나타난다고 하여 이 차이가 역사 전반에 걸친 부정적 요소로 볼 수는 없다.

  에 처음으로 가야라는 명칭이 나타나지만 여러 가야 가운데 어느 가야를 가리키고 있는지 확실하지 않다.아뭏든 기원후 1세기 중엽에는 이미 가야 여러 나라가 형성되어 있었음은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후한 세조 광무제 건무 18(기원후 42)?

에 가락국이 건국하였다고 하였다.정확한 기록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이 안에는 많은 역사적인 진실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대체로 기원전 1세기 말부터 기원후 1세기 중엽 사이까지는 이전 변한 지역에서 국가의 면모를 갖춘 여러 가야가 등장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이상 강봉원,가야 여러 나라의 형성시기와 강역에 관한 연구,경희대 대학원 논문집 12 참조)

 

    <         >

 

  신화는 祭儀 口述的 相關物이다.더구나 건국신화는 건국을 기리는 제의에서 건국 시조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건국 과정을 자랑 삼는 이야기로 빠짐없이 구술되었을 것이다.이를 일러  legomena(thing spoken)라 하기도 한다.이때 제의에서 하는 이야기에는 건국하던 때의 사회 정치 현실이 반영되어 있다.

  신화는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고도의 상징과 우회적 표현으로 굴절하여 무척 함축된 언어로 의미를 전달하고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그래서 우리는 엄청난 초현실적 이적으로 보이는 것 뒤에 숨어 있는 실제적이고 일상적인 의미를 알아낼 수 있다.신화의 출발점은 역사의 구체적인 생활상이라는 점을 늘 잊지 말아야 한다.

 

 *구간이 있던 시대

   ?개벽이후 이 땅에는 아직 나라 이름도 있지 않았고,군신의 칭호도 또한 없었다?그래도 아도간,여도간,괴도간,오도간,유수간,유천간,신천간,오천간,신귀간 등 구간이 있었으니 그들이 곧 酋長이었다.백성을 영솔한 것이 대체로 1백호에 7 5천 명이다.대체로 제멋대로 산과 들에서 살며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서 먹었다.?

  이는 수로가 가락국 군주로 등장하기 이전의 상황이다.구간을 추장이라 하였으니 이들은 바로 정치 지도자였다고 볼 것이지만,강력한 중앙집권을 행사하는 왕은 아니었던 것이다.

 

* 三月 契欲之日:음력 3월 첫 뱀날(上巳)妖邪 씻어버리기 위해서 올리는 제사로 이때 물가에서 술을 마셨다.  이는어떤 경건한 의식을 물가에서 집례한 다음 술잔을 돌려가며 잔치와 같은 분위기 속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 구지봉

- ‘구지에 대해서 가락국기의 작은 주에 ? 是峯巒之稱 若十朋伏之狀 故云也?라 하였다.‘龜旨峯巒의 뜻을 지니고 있는 말인데,그 형상이  十朋한 것과 같아 그렇게 일컫는다고 하였다.따라서龜旨라는 말 속에는峯巒의 뜻과 아울러 그 형상(十朋伏)을 가리키는 뜻이 함께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사전에 나오는峯巒의 뜻은날카로운 산봉우리이다.

  龜旨: 方言猶言地脊也  [大東韻府群玉9]

  이 기록에 따르면方言으로地脊’(땅의 등뼈,땅의 등성마루)을 뜻한다.의 우리말 뜻이산등성마루.산봉우리인 것이다.이는 삼국사기 김유신전() ? 首露 ...登龜峰 望駕洛九村 遂至其地 開國? 하는 기록에서  龜旨 龜峯이라 함을 보아을 뜻함을 알 수 있다.(구지봉의은 구지가 봉임을 더 또렷이 나타내기 위해 붙인 접미어이다.)

  따라서龜旨가 곧峯巒에 대응하는 말임을 알 수 있으며,의 형상이十朋伏한 것으로서,‘가 이에 대응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十朋은 무엇인가. 대해

 :殷時玉與貝皆貨幣也...兩貝爲朋 此朋之本義

이에 따르면 上代 화폐로서 두 말한다.따라서 十朋 20 뜻하며,그 형상은 대체로 가운데 줄을 경계로 양쪽 각각 10매의 이어 늘어놓은 것과 같을 것이다.이렇게 볼 때十朋伏之狀十朋 모양이 연이어 늘어서 있는 것을 뜻하며,그것이 엎어져 있는 듯한 형상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十朋伏之狀이라 한 것이다.

  요컨대龜旨모양이 늘어서 엎디어 있는 듯한 형상의 산봉우리를 가리킨다고 하겠다.

  그럼 이 龜旨 위치는 어디인가.

  盆山 在府北三里

  龜旨峯 在府北三里           [동국여지승람,김해,산천]

  이를 보면 분산과 구지봉은 비슷한 위치에 있음을 알 수 있다.분산은 김해의 진산으로 지금 芬城山이라 하는 곳인데.그 정상은萬丈臺이다.이 만장대의 거대한 바위들의 형상은十朋伏之狀에 비견할 수 있다.그런데 문제는 현재 구지봉이라 일컬어지는 곳은 이 분성산 정상 만장대가 아니라 그 분성산 西麓 끝에 자리하고 국도에 의해 끊어져 있는 나즈막한 언덕이란 점이다.그렇다면 구지는 두 곳이란 말인가.이에 대해 김택규는현재의 구지봉은 원래의 구지봉을 성지로 祭享하는굿하는 장소보았다.

  이 점 경성대 김무조 교수가구지봉에 삽을 넣으면 밑에 걸리는 것이 없다면서혹시 이곳이 솟터가 아닌가생각한다고 한 말과 일치함을 알게 된다.대성동 고분군이 있는 구릉을 김해 사람들은애꾸지’‘애코지라고 부르는데,?작은 구지봉?이란 뜻이라고 한다.(신경철 교수)이로 미루어 가락국 건국 이후에는 제의장소를  구지라 일반적으로 일컬은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아뭏든 현 구지봉은하늘과 여러 신에게 지내던 곳으로 신사가 있던 신앙의 중심지’(박지홍,537)로 볼 것이다.

 

* 衆庶 二三百人

  가락 지역의 주민 75천 인 가운데 2-3백 명이 이 집회에 오였다고 했으니 이들은 주민 대표들이라 할 수 있다.다시 말해,김수로의 즉위식이  구지봉에서 거행되었으며 여기에 백성 대표로 참가하였던 것이다.

 

* 수로왕 탄강 제의

  이 수로왕 탄강 제의는 크게 신탁의식과 영신의식으로 둘로 나눌 수 있다.주술 행위는 크거나 작거나 간에  어떤 형태로든 일정한 의례 절차를 거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 신탁의식

  ?마치 사람의 소리와 같은 데 형체는 감추고 목소리만 내서 말하기를

  여기 누가 있느냐 ?”

  고 하니,구간 등이 이르기를

  우리들이 있노라.”

  고 하였다.또 말하기를

  내가 있는 곳이 어딘고 ?”

  하니 대답하기를

  구지다.”

  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하늘에서 나더러 명령하기를 이곳에 머물면서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 노릇을 하라는 것이다.이런 까닭에 내려온 것이다.너희들은 산꼭대기의 흙 몇 줌을 파고龜何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하고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추어야 한다.그것은 바로 대왕을 맞이하느라고 좋아서 날뛰는 것으로 된다

  고 하였다.

- 세 가지 영신 행위

  영신의식은 세 가지이니 곧,

  (1)봉우리 꼭대기 몇 줌 흙을 파고

  (2)노래하고

  (3)춤을 추고

  하는 것이다.여기서 이 세 행위를 함께 잇달아서 한다는 것을 놓쳐서는 아니 된다., 이 세 행위는 모두 나라의 왕을 맞이 하는 의례인 점에서 한 가지인 것이다.흙을 파는 일이나 춤을 추는 일이나 노래하는 일이나 그 뜻은迎大王하는 뜻으로 보아야만 한다.

  먼저,(1) 흙을 파는 행위의 의미를 알아보자.‘ 掘峯頂撮土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대부분峯上 흙을 파면서’(이병도,조윤제)峰頂 파헤치고’(정형용)로 해석하고 있고,경우에 따라산 꼭대기를 파며 흙을 집다’(이재호),‘봉정을 파서 흙을 모으다’(김승찬),‘꼭대기 흙을 파서 손가락으로 집어 올리다’(성기옥)‘봉우리 꼭대기에 흙을 파서 제단을 우뚝하게 쌓고 손으로 황토를 집어 제단 주위에 뿌린다’(박태진),‘봉우리를 두드리며’(서정범)라고도 해석한다.그렇게 하면이 중복된 의미로 풀이하거나,신화 문맥의 정확한 의미 파악에 어긋나게 된다.

  撮土: 喩極小也      [辭源]

  今夫地 一撮土之多   [中庸]

  이에서撮土한 줌 흙을 말함을 알 수 있다.이렇게撮土한 줌 흙이라는 명사적 의미로 풀이한 이로 홍기문(조선신화연구),최진원(한국신화고석)이 있다.정곡을 찔렀다고 본다.

  그렇다면 이렇듯 산봉우리의 흙을 파는 행위는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종래 이에 대해가래질,타작질을 시늉한 농부의 동작’(박지홍)이라느니 하여  노동요로 보거나(조윤제,장덕순 등),맞이굿이라는 제의의 성격을 고려하여  祭壇이나 제단의 神座 만드는 행위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다양하게 해석하였다.그러나 <구지가>의 제재에서 보나 노래부른 목적에서 보나 노동과는 거리가 멈이 분명하다.(최동원) 오히려신성한 산정의 흙은 國靈으로 생각하여 제의의 대상이 된다.’고 한 三品彰英 말이 그럴 듯하다.?일본서기?의 다음 대목이 암시를 줌 직하다. 神武天皇 처음 나라를 세우려고 천하를 평정하여 가는 과정을 기록한 글 가운데,

  ?천황은 지난해 가을 구월에 몰래 天香山 埴土 파서 80히라가를 만들어 ...드디어 천하를 평정할 수 있었다.?

  ?吾田媛 몰래 香山 흙을 파다 수건 끝에 싸서 주문을 하며이것은 倭國 物實입니다하고 말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아 산꼭대기의 한 줌 흙은 한 나라의 전 영토를 상징함을 알 수 있다.‘掘峯頂撮土하는 행위가 한 나라의 영토를 소유함으로써 지배권을 확립하거나 그 사실을 공인받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더구나 그 산이 鎭山임에랴.전 영토의 精髓 의미하는 진산의 한 줌 흙을 파는 행위는 가락국 전체의 영토와 그 영토의 지배권을 확립하는 상징적인 의례라고 하겠다.그래서 이 행위는 진산의 꼭대기인 분산의 만장대에서 하는 것이다.그러나 이미 지배권이 한 번 확립된 후에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 제의장소가 山麓으로 옮겨진 것이라 본다.

 (2) 노래에 담긴 의미

  구지가는 임금 맞는 제의에서 부른 노래이다.구간과 중서 2-3백명이 함께 불렀다는 점에서 주술의 효력을 한 개인의 주술 능력에 의지하지 않고 여러 사람이 집단으로 행하는 주술의 힘에 의존하는집단적 주술이다.

 

   龜何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

 

  이 노래는 불러내어(호칭)/명령하고(명령)/듣지 않을 경우를 가정하여(부정의 가정)/위협하는(위협) 간결하고 단순한 짜임새로 되어 있다.

  이 노래는 다수의 무리들이 ??라는 대상을 향해 말을 거는 형식이다.

  그러면 대화의 대상인 ??는 무엇인가 ? 거북이 무엇을 뜻하는가.

  본디 거북이가 알을 낳기 때문에 거북의 영력을 천제의 신통력과 결부시킨 것이랄 수 있다.

  우선 문맥으로 보아 구간과 중서 2-3백 사람한테서 ??를 내놓으라고 요구를 받고 있는 존재이다.그러면서 그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구워 먹겠다고 위협,협박을 당하고 있는 존재이다.

  ??의 존재가 무엇인가 옳게 알려면 먼저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는 무엇을 뜻하는가를 찾아내야 한다.그래야,가장 신성하고 외경시되어야 할 건국신화-시조신화에서 불리어진 노래가 위협적이고 어찌보면 모독적인 느낌마저 드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 까닭을 캐낼 수 있다.

 - 가리키는 것은 ?

 (1) 머리(조윤제,김사엽,이병도),(이병기)  (4) 性器 상징

 (2) 추장,,산마루 곧 구지봉(박지홍)

 (3) 수령의 (황패강)

  이 여러 주장 가운데 과연  둘로 나누어야 하는가를 살펴보자.이를 위해 같은 계열의 <해가>를 분석하여 본다.<해가> <구지가>에서 되어 나갔는데,<구지가> <해가>를 대비할 때 ?출수로?와 대응하는 것이 ?수기현야?이다.

   龜何龜何      龜乎龜乎             龜乎龜乎

   首其現也      出水路               出水路也

                 (掠人婦女 罪何極)

                 (汝若悖逆)

   若不現也      不出獻               若不出獻

                 (入網捕掠)

   燔灼而喫也    燔之喫               燔之喫也

 

  =,水路=

  여기 ????의 대상인 ?수로? ??는 서로 대응한다.?수로?는 노래부르는 사람과 거북 사이에 개재하는 제3자이다.고로 ?수로?와 대비되는 ??도 거북의 신체의 한 부분인 머리라기보다는 노래부르는 사람과 거북 사이에 개재하는 제3자로서의 군주를 표상하는 것이라 생각한다.거북에 관한 한 신체의 일부인 머리는 ??보다는 ??로 적는 것이 보통이다.,??은 군주의 등장을 나타내기에 적절한 語辭이다.<가락국기> ?始現故諱首露? ??이 바로 그것이다.

  ??가 수로를 가리킨다면,수로를 내놓으라는 건 어떤 뜻인가 ? 이는 앞서 살펴 보았듯 수로에게 가락 지역의 통치권,지배권을 내놓으라는 말이다.그래서 ??는 구 지배세력 곧 구간과 가락 백성이 더 이상 용납하지 않는 세력을 가리킴일 것이다.구체적으로 그 세력은 무얼 가리키는가.가락 지역에서는 거북이 토템이었다고 보아  존엄한 존재인 최고의 우두머리를  뜻한다고 보면 아니될런지.

 3.4행은 2행의 말을 안들을 경우 행할단순가정절이다.그래서 실행하지 않을 수도 있다.그렇다고 실행할 개연성조차 없다는 뜻은 아니다.그러나 신화의 문맥으로 보아燔灼은 실제로는 이루어지지 않은 듯하다.

 

 이 간단한 노래의 사설이 곧 신군을 나타나게 하는 한 수단,다시 말하면 한 주술적인 힘으로 사용된 것이다.그래서 이 노래는 일종의 주가로 여겨진다.<구지가>의 짜임새는 간결하고 단순하지만,이 짜임새는 우리나라의 주술 시가를 대표할 수 있는 주술 유형이다.

 

  구지가는굿노래” “신맞이굿노래이다.

*구지가의 연원

  많은 이들이 지적하고 있는 바 구지가는 우리 시가의 가장 원초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구지가>는 김수로왕 탄강 제의 때 처음 창작된 것이 아니다.그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던 ?호칭 + 명령 + 가정 +위협?이라는 주술 구조를 빌어 수로왕을 맞이하는 주술로 실현시킨 것이다.

   호칭 + 명령 + 가정 + 위협

  고구려를 세운 동명왕이 즉위 2(기원전 36)에 비류국과 세력다툼을 하는 과정에서 흰 사슴을 잡아 거꾸로 매달고 홍수를 내려서 비류국의 항복을 받고자 행한  기우 주술이 있다.

    天若不雨而漂沒沸流王都者

    我固不汝放矣

    欲免斯難

    汝能訴天

     (가정)하늘이 만약 비를 내려서 비류 왕도를 표몰시키지 않으면

     (위협)내 진실로 너를 놓아주지 않으리니

           이 어려움을 벗어나고 싶거든

     (명령)너 능히 하늘에 호소하라.

                -이규보,동명왕편

  주몽이 홍수로서 비류국을 항복 받고자 사슴에게 비를 내리도록 명령하고 위협했던 주술의 내용과 김해의 주민들이 왕국을 세우고자 거북에게 왕을 보내도록 명령하고 위협하는 주술의 내용은 그 구조가 같다.구조 원리가 같은 것이다.

바다  용이 앗아간 수로부인을 되찾기 위한 주술 목적에 이 주술 구조를 적용하여 실현시킨 것이 바로 <해가>인 것과 같은 원리이다. <해가>에서 눈여겨 볼 점은 ?晝饍?이란 용어이다.주선은 그냥 예사로운 점심이 아니다.‘주선은 왕이나 혹은 제의 때 에게 올리는 음식에 한해서만 쓰이던 용어이다.이렇듯 제의의 측면이 드러나게 되어야 <해가> <헌화가>의 의미가 올바로 파악된다.순정공이 강릉 태수로 부임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의외의 사건이 아니라 나름대로 필연성이 있는 것이다.낯선 강릉 지방의 태수로 부임하는 순정공은 동해변에 나오자마자 무사안녕과 복을 비는 의식-굿-  하였던 것이다.

  龜乎龜乎莫耽睡

  三世宰相虛語耳

           역옹패설 前集 2

  여기서 우리는 <구지가>와 같은 성격의 동질적인 노래가 <구지가> 훨씬 이전부터 널리 전승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그래서 <구지가>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가락국기> 속에 들어 있는 가락국 건국 신화의 한 부분이라는 점이라기 보다는 <구지가>에서 추론해 낼 수 있는 우리 시가의 원류적인 모습 때문이라 하겠다.

주술적 사고나 신화적 세계관이 지배하던 기원전 훨씬 이전까지 소급해서 이 문제를 생각해야지 바로 가락국 건국 연대인 기원 1세기를 원시가요의 흔적이 보이는 이 <구지가>의 생성연대로 잡아서는 안된다.<구지가>는 원시시대부터 구비전승되어 오다가 가락국 건국시기에 불린 것이다.양주동의  상대 가요의 실제 내용을 전하는 유일의 실례란 말은 바로 이를 가리킴이다.

 

  (3) 춤을 추는 행위에 담긴 의미

以之歌舞’하였다 했으니 이 노래는 節奏 갖춘 노래였다.이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가락국기>이다.

  群舞而奏   衆舞而呈

  七日而後   一時所寧

  무리가 노래하며 연주하고 무리로 춤추어 아뢰니

  7일 뒤에 한 때 편안했다.

  7일 동안이나 계속한 의례였다.

 

세 행위는 모두 나라의 왕을 맞이 하는 의례인 점에서 한 가지인 것이다.흙을 파는 일이나 춤을 추는 일이나 노래하는 일이나 모두迎大王하는 뜻을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김수로는 누구인가

 

  수로가 알로서 하늘에서 줄을 타고 내려 왔다는 이 하늘은 그저 막연한 하늘이 아니다. 신성한  천손족이라는 자부심이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으로 나타난다.그러면 수로는 어디에서 왔는가.

- 삼국사기 김유신전()

 首露 不知何許人也 登龜峰 望駕洛九村 遂至其地 開國號曰 加耶 後改爲金官國

 하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해모수신화의不知所從來’(삼국사기)와 마찬가지로 수로가북방에서 이동해온 유이민임을 뜻한다.수로는 유이민인데 그 출자가 어디인가.수로왕의 후예인 문무대왕비문에 ?튀후제천지윤 전칠엽...십오대조 성한왕?이라 하여 흉노 휴도왕의 후예라 하였고,

  李固善,心堂全書,冠文社,1981.6 <단서대강(檀書大綱)>에 보면

 기원후 9년에  마한이 백제한테 망하자 마한왕인 영왕(寧王:)이 동쪽의 낙동강가로 달아나 가야(加羅)라 칭하고 구지봉 밑에 거하며 가야왕이라 하고 그 아들 이비가지(夷毘)로 세자를 삼았다.

  기원후 16년에 영왕이 구간(九干)을 쳐서 그들을 차지했으며

  기원후 17년에 가야의 영왕이 죽고 이비가지가 섰으나

  기원후 42년에 가야의 이비가지가 죽자 그의 둘째 아들인 뇌실청예(惱室靑裔)가 구간의 추대를 받아 금관에 도읍을 정하고 가락(駕洛)이라 하였으며 수로(首露)왕이라고 하였다.이에 그의 형인 뇌실주일(惱室朱日)은 고령에 대가야를 세웠다.”

  하는 기록이 있다.  -오순제,?부여사와 열국시대?,?한배달? 1990. ,111-

 

-동국여지승람 권29 고령현 건치연혁조에

 ?최치원의 利貞傳 살펴보면 가야산신 正見母主 곧 천신 응감한 바 되어,대가야왕 뇌실주일과 금관국왕 뇌실청예 두 사람을 낳았는데,뇌실주일은 이진아고왕의 별칭이 되고 청예는 수로왕의 별칭이 되니,가락국기의 六卵 더불어 모두 허황한 것으로 믿을 수 없다.

 

 

       <        >

 

동국여지승람의 ? 熊川俗 熊山神堂 土人每四月 迎神下山 陳鐘鼓雜戱 遠近爭來 祭之 十月又如之以常爲 ? :가락의 영역이던 웅천에 전래의 영신제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가락국 건국 이후의 일로 역사의 사실을 제의에서 행하면서 전승과정상에 다양한 기능이 덧들어갔을 것이다.

* 盆山 있는 王官堂에는 봉돌이 있다.

  왕관당 안 부부화상 (김수로와 허황후)의 영정 앞에 각각 놓인 망산도의 靈石(海石)인 봉돌은 이 절의 신도들이 허황후 돌은 아들을 잘 낳는다 하여 갖다 놓았고 그 밑에 호왁 대신에 색 헝겊으로 된 방석을 깔아 놓았다. 이 봉돌은 3 3,4월 초파일,5월 단오절에 치성 들이려 오는 신도들의 祈子神 격으로 되어 있다.,남근석인 봉돌과 여음을 상징하는 호왁 사이에 쌀을 놓은 후 봉돌로 갈아 보아 싸래기가 붙으면 딸을,온쌀이 붙으면 아들을 가진다고 믿는다(김기탁,13)

  이 돌은 김수로왕과 허황후가 바당(바다)에서 배를 타고 놀다가 주운 돌로서 삼월 삼짇날 아들 낳기를 빌 때 집에서 쌀을 8번 가려 싸래기와 뉘가 없게 한 후 가지고 가서 봉돌과 방석에 두고 여러 번 갈다가 봉돌을 들어보면 아들 낳은 사람은 살,딸을 낳은 사람은 싸래기,그리고 첩에서 소생을 얻을 사람은 액미(붉은 살)가 붙는데 이들 쌀을 모아서 집에 가지고 와서 입에 털어 넣어 씹지 않고 삼키면 원하는 자식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1972.4.16.김해 동상동 정선이(75.)한테서 김승찬 채록)

  이는 허황후가 아들 열을 낳았다는 王山誌 기록으로 보아

  허황후가 龜石船 타고 왔다는 전설

*허황후의 성혼식을 길이 기리기 위해 7 29일에 베풀어진 망산도 부근의 ?戱樂思募之事?

 

 

삼국유사 권2 끄트머리에 실린 <가락국기>

삼국유사 권1 <오가야>題注

고려사 권11 지리지 경상도 조

신증 동국여지승람 권3 ?김해도호부 산천 구지봉?

동국통감 권2 삼국

대동운부군옥 <구간?>

  <참고자료>

최남선 편,삼국유사

조윤제,한국시가사강,을유문화사,1960

?가야의 맥박?,1989 2월부터 <국제신문>연재   4,5,6,9,10,11 만 있음

?속 가야의 맥박?,1991 4월부터 <국제신문>연재  1,2

  <참고할 논문>

三品彰英(1943),수로전설,日鮮신화전설의 연구(柳原서점)

*       =(1963),삼국유사고증(가락국기 1),조선학보 29(조선학회)

*양주동(1943),고가연구

*정형용(1948),국문학사(우리어문학회,수선사)

손낙범(1948),국문학개론(우리어문학회)

*조윤제(1949),국문학사(동국문화사)

고정옥(1949),조선민요연구(수선사)

*김사엽(1954),개고 국문학사(정음사)

*박지홍(1957),구지가 연구,국어국문학 16

*박지홍(1957),구지가 연구 변명,국제신보=<국문학의 연구>(문성출판사,1970)에 수록

*양염규(1959),국문학개설(정연사)

*장덕순(1960),국문학통론,신구문화사

*이병기.백철(1960),국문학전사,신구문화사

*김동욱(1961),한국가요의 연구(을유문화사)

*이가원(1961),한국한문학사(민중서관)

서정범(1961),고전문학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시론,현대문학 75

*김열규(1961),가락국기고,국어국문학지 3,부산대

       (1981),한국의 신화,일조각 128-134

허영순(1962),고대 사회의 무격사상과 그 가요의 연구,부산대 석사학위논문

*황패강(1965),구하가고,국어국문학 29

윤오영(1967),구지가 신석,현대문학 151

소재영(1967),가락국기 설화고,고려대 어문론집 10

*정병욱(1967),한국시가문학사(),한국문화사대계,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상고시가론,한국고전시가론(신구문화사,1977)

변덕진(1970),구지곡에 대하여,대구 효성여대 논문집 6-7

김기탁(1970),가락국기 연구,영남대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안병태(1970),구지가의 연구,아시아문화 1,우석대

최동원(1973),가락국기고,김해지구 학술조사보고서,부산대 한일문화연구소

이규동(1973),한국신화를 통해본 고대 사회,신동아 104

*이규동(1973),구지가와 고대 제의의 관련성,노산 이은상 박사 고희 기념 논문집 민족문화논총(삼중당)

이 옥(1974),수로왕 신화,한국경제사학논총-최호진 박사 화갑기념논총

*김택규(1974),회고와 전망,신라시대의 언어와 문학

*김승찬(1975),수로 탄강 신화의 한 고구,효원 18

*            =구지가와 그 배경의 연구,문리대 논문집 14(부산대)

*김승찬(1978),구지가고,한국상고문학연구(제일문화사)

김병욱(1976),한국상대시가와 주사,어문논지 2,충남대 국문과

*조동일(1978),한국문학사상사시론

전규태(1980),한국신화와 원초의식,이우출판사

*김학성(1980),상대시가의 미의식체계 한국고전시가의 연구(원광대출판부)

임기중(1981),가요와 그 기술물의 전승 형태와 내면 구조,신라가요와 기술물의 연구,이우출판사

최동국(1982),상고한역가요의 성격,문학과 언어 3(문학과 언어 연구회)

강은해(1983),삼국유사 기이편의 굿노래와 감통편의 주사 연구,민속어문논총,계명대 출판부

조헌국(1983),가락국기의 제의구조 연구,경남대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홍재휴(1983),한국고시율격연구

김종구(1983),삼국유사 서사구조 연구,<삼국유사와 한국문학>(학연사)

박진태(    ),구지가 신연구,한국어문논집 2(한사대)

*      (1984),구지가의 배경과 구조,한국시가의 재조명(형설출판사)

*김동준(198 ),구지가 신고,한국문학연구 4(동국대)

송재주(1984),가락국기와 구지가에 대한 연구서설,국어교육연구,조선대

김태주(1985),구지가의 신고찰,동아 25(동아대)

유효석(1986),구지가의 발생 구조와 시대적 수용,성균관 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성기옥(1987),구지가의 작품적 성격과 그 해석(1),울산어문논집 3,울산대

 성기옥(1987),구지가의 작품적 성격과 그 해석(2),배달말 12

*최진원(1990),한국신화고석(2)-수로신화,대동문화연구 24

성현경,구지가 소고,낙산어문 2

김봉영,구지가의 새로운 고찰,道程 11

유창순,상고문학에 나타난 무격사상,사상4

정하영,신화의 기능변이와 문학적 재현,국어국문학 84

*이상기,구지가와 해가에 대한 일고찰,청주교육대학 논문집 26

*이명선,조선문학사

이기문   <최현배 선생 환갑 기념 논문집>

*김병모,가락국 허황옥의 출자-아유타국고(1),김원룡 교수 정년퇴임기념논총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