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세계대전

실패한 유화책의 대명사 뮌헨 회담 (Munich Agreement)

올드코난 2015. 8. 15.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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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3월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 주데텐란트 할양을 요구한다. 세계 대전의 발발을 피하고자 했던 영국과 프랑스는 1938년 9월 30일 독일 뮌헨에서 뮌헨 회담 (뮌헨 협정, Munich Agreement *독일어 Münchner Abkommen)을 열어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이 참석한 가운데 히틀러의 요구대로 독일이 주데텐란트를 합병하도록 승인하는데, 당사국인 체코슬로바키아는 이 회담에서 배제된다. 훗날 뮌헨 회담은 실패한 유화책의 대명사로 많은 비난을 받고 있다. 정리해 본다.

실패한 유화책의 대명사 뮌헨 회담 (Munich Agreement)


1.주데텐란트(Sudetenland)

20세기 초반 체코슬로바키아 서부 지역의 독일 민족이 다수 거주하던 지역을 일컫는 말로, 넓게는 보헤미아, 모라바, 실레시아 지역을 의미한다. 현재는 체코의 영토이며, 주데텐란트라는 단어는 수데티 산맥에서 유래하였다.

체코슬로바키아는 1차대전이 종전된후 승전국들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를 분할하며 인위적으로 만든 신생국가였다. 가장 큰 문제는 여러 민족들이 합쳐지면서 매우 혼란스러웠고, 통일된 국가를 이루지 못한 상황이었다. 주데텐란트에는 독일인이 무려 300만명이나 거주를 하고 있는 곳이었다. 더구나 원래 이 지역은 오스트리아 땅이었다. 독일이 이 땅을 취할 명분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2. 히틀러의 야심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히틀러는 이미 체코 슬로바키아를 합칠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전에 국제사회에서 어느 정도 명분을 얻을 수 있는 주데텐란트를 먼저 독일영토로 만드는 것이 순서였다.

히틀러는 연설을 통해 체코에 있는 350만명의 독일인들이 억압을 받고 있다고 주중하며,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라 자신들이 결정해야 한다면서 강대국들을 안심시키려했다. 물론 이는 거짓말이었다.

히틀러는 외교가 안되면 무력으로라도 주데텐란트를 점령하려 했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3. 강대국들이 막을수 없던 이유

2차대전 직전까지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못했다. 국민들이 원치않았고, 경제적으로도 힘든 시기였다. 이러한때에 자신들의 영토가 아닌 국가를 위해 전쟁을 할 이유도 없었고, 하겠다는 의지도 없었다. 당시 유럽의 강대국은 히틀러의 야망을 분명 눈치채고 있었지만, 자신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면 묵인하는 쪽을 택했던 것이다.


4.회담전 상황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는 당시만 해도 전쟁을 피하려 했다. 히틀러를 설득하고 독일의 계속되는 군사 대국화를 우려했다. 독일군 내부에서도 독일군의 실상이 사실 강대국들을 넘어설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전쟁을 피하려 했다 당시 전쟁을 원했던 인물은 히틀러 뿐이었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는 이 문제에 공산국가 소련이 개입하게 되는 것을 특히 우려했었다.

9월초 히틀러는 독일군을 체코 국경부근으로 이동시키고, 유럽 국가들은 긴장을 하는데, 당시 영국의 총리 네빌 체임벌린(Arthur Neville Chamberlain)가 중재에 나선다. 9월 22일 프랑스의 총리 에두아르 달라디에와 외무장관 조르주 보네는 런던에서 영국 외교관과 만나 주데텐란트의 인구 50% 이상을 독일에 보내는 것을 수용하기로 하는 합동 성명을 냈다.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처음에는 이 제안을 거부했지만 9월 21일 마지못해 수용하기로 하지만, 히틀러가 원했던 것은 영토였다. 히틀러는 주데텐란트는 독일에 합병되어야 하고, 체코슬로바키아는 9월 28일까지 주데텐란트에서 군대를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국총리 체임벌린은 히틀러의 요구대로 해 줄 것을 체코슬로바키아에 제안하지만 당연히 거부한다. 주데텐란트 지역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으로 체코 입장에서 주데텐란트를 독일에게 내어준다면 독일로부터 방어를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주데텐란트 양도는 곧 체코 전지역을 히틀러가 노린다는 체코 총리의 생각은 절대 틀리지 않았다.

9월 23일, 체코슬로바키아는 총동원령을 내리고 1백만 명 이상의 군사가 독일의 공격에 대비하고 9월 24일 프랑스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처음으로 부분적 동원령을 내린다. 이는 히틀러에게 잠시 멈칫할 여지를 남겼는데, 이 틈에 영국 총리 체임벌린은 4강 회의 개최를 제안한다. 뮌헨회담이다.


5.뮌헨 회담 (뮌헨 협정)

1938년 9월 29일 독일의 히틀러, 영국총리 체임벌린, 프랑스의 달라디에와 이탈리아 무솔리니는 뮌헨에서 회의를 연다. 그리고 9월 30일 협정을 체결하는데, 내용은 주데텐란트를 독일에 넘겨주되, 독일은 이후 체코슬로바키아의 국경선을 인정한다는 것으로 히틀러는 이 합의문에 서명했다. 하지만 정작 당사국인 체코슬로바키아 총리는 참석을 못했다. 강대국의 뜻대로 결정이 난 것이다.

회담이 끝나고 영국으로 돌아간 영국 총리 체임벌린은 ‘평화를 보장받았다’고 외쳤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6.회담결과

뮌헨 회담으로 독일은 주데텐란트를 피한방울 쏟지 않고 독일의 영토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다음해 3월에는 프라하와 보헤미아, 모라비아 지방을 점령해 버린다. 다음 목표는 이제 폴란드였다.


7.평가

오늘날의 체코와 슬로바키아에서는 뮌헨 협정을 뮌헨 늑약(체코어: Mnichovská zrada; 슬로바키아어: Mníchovská zrada)라고 부른다. 그리고, 프랑스와 체코슬로바키아의 동맹이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에 뮌헨의 배신(체코어: Mnichovská zrada; 슬로바키아어: Mníchovská zrada)이라고도 부른다. 이 회담은 분명 히틀러의 전쟁을 막기 위해 개최를 했지만, 실재로는 히틀러를 막지 못했고, 오히려 체코슬로바키아가 독일에 점령을 당하게 된다. 그래서, 오늘날 뮌헨 회담은 실패한 유화책의 대명사로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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