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세계대전

독일이 노르웨이 침공을 가속시킨 알트마르크 사건(Altmark Incident)

올드코난 2015. 11. 8. 10:14
반응형

독일은 노르웨이를 중립을 유지하는게 좋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독일 최고 사령부의 의견대로 점령을 하기로 결정을 하고 여기서 히틀러에게 침공에 대한 자신감과 명분을 준 일이 있었다. 정리해 본다.

노르웨이 전역(Norwegian Campaign; 1940년 4월 9일 - 6월 10일) 세번째: 독일이 노르웨이 침공을 가속시킨 알트마르크 나포 사건 (Altmark Incident)


1.독일 사령부의 노르웨이 침공 결정

독일 최고 사령부는 원래 노르웨이는 중립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동안 연합국은 노르웨이 해상에 접근하지 않았었고 독일로 수입되는 광석의 배는 노르웨이 해안을 따라 내려가는 안전한 통로가 있었다. 그러나 독일 해군 대제독 에리히 레더는 침략을 주장하는데 그는 노르웨이 통로가 영국과의 전쟁을 위해 독일에게 중요한 것이라고 믿었다.



2. 노르웨이 반역자 크비슬링

1939년 12월 14일 노르웨이 국방장관이었던 비드쿤 크비슬링(Vidkun Quisling)은 히틀러를 만나고. 4일 후 1939년 12월 18일에 크비슬링과 히틀러의 2번째 만남을 가지는데, 여기서 크비슬링은 히틀러를 돕겠다는 의사를 분명한 한 것이고, 크비슬링하고의 만남 후, 히틀러는 독일 국방군 최고 사령부(OKW)에게 노르웨이 침략 계획을 세우라고 지시를 내리게 된다. 노르웨이 침공 최초 계획은, 1939년 12월 14일 히틀러의 지시로 1940년 1월 10일에 만들어진 베저위붕 작전으로 2월 7일 실행되었다.

(‘비드쿤 크비슬링(Vidkun Quisling)에 대한 이야기는 따로 정리한다.)


3. 알트마르크 사건(Altmark Incident)

알트마르크 사건은, 1940년 2월 16일 새벽에 영국 해군 구축함 HMS 코사크가 독일 유조선 알트마르크(German tanker Altmark)를 이외싱피오르에서 나포한 사건이다. 알트마르크는 독일 순양함 그라프 슈페를 위한 보급선으로 그라프 슈페는 남대서양에서 몇 달 동안 통상파괴작전을 수행하는 중이었다. 알트마르크가 독일로 돌아올 당시에는 그라스 슈페가 침몰시킨 연합군 함선의 포로 299명을 태우고 있던 상태였다. 알트마르크 호는 1940년 1월 10일 독일 국기를 달고 트론헤임피오르를 지나 노르웨이 해군의 호위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갔다. 알트마르크가 2월 14일 베르겐 항구 근처로 접근할 때, 노르웨이 해안 당국은 독일의 선박을 검사를 하려 했다. 국제법에 의한 중립 해역과 포로 이송의 문제 때문으로 독일은 이 요구를 거절했다.

선박을 검사하려한 이는 베르겐의 사령관 노르웨이 해군 제독 카스튼 탱크-닐슨(Carsten Tank-Nielsen)으로 알트마르크를 제한된 전쟁으로 간주하고 접근을 거부한 것이었다. 그러나, 탱크-닐슨의 상관이었던 헨리 디슨 (Henry Diesen)제독에 의해 알트마르크는 항구를 빠져 나가게 된다. 노르웨이의 중립법에 따르면, 전국에서 운영하는 국영 함선은 중요 노르웨이 항구를 거치지 않도록 하고 있었다. 헨리 디슨 제독은 영국이 가로챌 우려 때문에 노르웨이 근해를 항해하도록 강요하지 않고 중립법을 어긴 것이었다.

다음 날 2월 15일 알트마르크 호로 영국 항공기 3기가 발진해 선박을 발견한 후 그 해역에 6척의 구축함을 보냈다. 접근한 군함으로부터 따돌리기 위해 알트마르크는 이외싱피오르로 도망쳤지만 노르웨이 전함들에 의해 나포되고 함선 내에 탑승 중이었던 영국인 포로 299명은 전원 해방되고 나포 과정중 7명의 독일인이 사망했다.



4. 알트마르크 사건 이후

사건 후 독일은 노르웨이에게 강력한 항의를 보냈고 노르웨이 정부는 영국에게 강력한 항의를 보냈다. 스웨덴과 미국의 국제법 전문가들은 영국의 행동은 노르웨이의 중립법 위반으로 설명하고, 영국은 그 사건은 도덕적이었으나 기술적인 위반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알트마르크 사건은 노르웨이 침공을 이미 계획중이었던 독일이 분명하고 신속하게 준비하게 만들었다. 2월 21일, 니콜라우스 폰 팔켄호르스트(Nikolaus von Falkenhorst)는 침공 계획 준비에 대한 명령을 내리고, 3월 1일 덴마크와 노르웨이 침공의 정식적인 승인서에 히틀러가 서명함으로서 노르웨이 전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