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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60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하권) 13

백범일지 (하권) 김구선생 일대기 광주에서는 중국 군대에 있는 동포 이준식, 채원개 두 분의 알선으로 동산백원을 임시 정부의 청사로, 아세아 여관을 전부 우리 대가족의 숙사로 쓰게 되었다. 이렇게 정부와 가족을 안돈하고 나는 안의사 미망인과 가족을 상해에서 나오게 할 계획으로 다시 향항으로 가서 안정근, 안공근 형제를 만나 강경하게 그 일을 주장하였으나 그들은 교통이 어렵다는 이유로 듣지 아니하였다. 사실상 그때 사정으로는 어렵기도 하였다. 나는 안의사의 유족을 적진 중에 둔 것과 율양고당암에서 중국 도사 임한정에게 선도를 공부하고 있던 양기탁을 구출하지 못한 것이 유감이었다. 향항에서 이틀을 묵어서 광주로 돌아오니 거기도 왜의 폭격이 시작되었으므로 또 나는 어머님과 우리 대가족을 불산으로 이접하게 하였..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하권) 12

백범일지 (하권) 김구선생 일대기 어머니는 대로하여서, "내 아들을 찾는 데는 내가 경관들보다 나을 터이고, 또 가라고 허가를 하여서 가장집물을 다 팔게 해놓고 이제 또 못 간다는 것이 무슨 법이냐. 너희놈들이 남의 나라를 빼앗아 먹고 이렇게 정치를 하고도 오래 갈 줄 아느냐." 하면서 기절하셨다. 이에 경찰은 어머니를 김씨네에게 맡기고 가 버렸다. 그 후에 경찰이 물으면 어머니는, "그렇게 말썽 많은 길은 안 떠난다." 하시고는 목수를 불러 다시 집을 수리하고 집물을 마련하시는 등 오래 사실 모양을 보이셨다. 이러하신 지 수삭 후에 어머니는 송화 동생을 보러 가신다 칭하고 신아를 데리시고 신천으로, 재령으로, 사리원으로 도막도막 몸을 옮겨서 평양에 도착하여 숭실중학교에 재학 중인 인아를 데리고 안동현으..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하권) 11

백범일지 (하권) 김구선생 일대기 나는 다시 남경으로 돌아왔으나 왜는 내가 남경에 있는 냄새를 맡고 일변 중국 관헌에 대하여 나를 체포할 것을 요구하고 일변 암살대를 보내어 내 생명을 엿보고 있었다. 남경 경비사령관 곡정륜은 나를 면대하여 말하기를, 일본측에서 대역 김구를 체포할 것이니 입적 기타의 이유로 방해 말라 하기로, 자기가 김구를 잡거든 일본서 걸어 놓은 상금은 자기에게 달라고 대답하였으니 조심하라고 하였다. 또 사복 입은 일본 경관 일곱이 부자묘 부근으로 돌아다니더라는 말도 들었다. 이에 나는 남경에서도 내 신변이 위험함을 깨닫고 회청교에 집 하나를 얻고 가흥에서 배 저어주던 주애보를 매삯 15원씩 주기로 하고 데려다가 동거하며, 직업은 고물상이요, 원적은 광동성 해남도라고 멀찍이 대었다. 혹..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하권) 10

백범일지 (하권) 김구선생 일대기 가흥 성내에 있는 진명사는 유명한 도주공의 집터라 한다. 그 속에는 축오자(암소 다섯 마리를 기른다)하고 또 양어하던 못이 있고 절문 밖에는 도주공유지라는 돌비가 있다. 하루는 길로 돌아다니다가 큰 길가 마당에서 군사가 조련하는 것을 사람들이 보고 있기로 나도 그 틈에 끼었더니 군관 하나가 나를 유심히 보며 내 앞으로 와서 누구냐 하기로 나는 언제나 하는 대로 광동인이라고 대답하였다. 이 군관이 정작 광동인인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나는 곧 보안대 본부로 붙들려 갔다. 저씨 댁과 진씨 댁에 조사한 결과로 무사하게는 되었으나 저 봉장 군은 내가 피신할 줄을 모른다고 책하고 그의 친우요, 중학교 교원인 과부가 하나 있으니 그와 혼인하여 살면서 행색을 감추라고 권하였다. 나는..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하권) 9

백범일지 (하권) 김구선생 일대기 나는 진씨 내외와 동반하여 남호 연우루와 서문 밖 삼탑 등을 구경하였다. 여기는 명나라 때에 왜구가 침입하여 횡포하던 유적이 있었다. 동문 밖으로 10리 쯤 나아가면 한나라 적 주매신의 무덤이 있고 북문 밖 낙범정은 주매신이 글을 읽다가 나락 멍석을 떠내려 보내고 아내 최씨에게 소박을 받은 유적이라고 한다. 나중에 주매신이 회계태수가 되어 올 때에 최씨는 엎지른 동이의 물을 주워담지 못하여 낙범정 밑에서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가흥에 우접한 지 얼마 아니하여 상해 일본 영사관에 있는 일인 관리 중에 우리의 손에 매수된 자로부터, 호항선(상해, 항주 철도)을 수색하러 일본 경관이 가니 조심하라는 기별이 왔다. 가흥 정거장에 사람을 보내어 알아 보았더니 과연 변장한 왜 ..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하권) 8

백범일지 (하권) 김구선생 일대기 식장을 향하여 떠나는 길에 윤군은 자동차에 앉아서 그가 가졌던 돈을 꺼내어 내게 준다. "왜 돈은 좀 가지면 어떻소?" 하고 묻는 내 말에, 윤군은, "자동차값 주고도 5, 6원은 남아요." 할 즈음에 자동차가 움직였다. 나는 목이 메인 소리로,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하였더니 윤군은 차창으로 고개를 내밀어 나를 향하여 숙였다. 자동차는 크게 소리를 지르며 천하 영웅 윤봉길을 싣고 홍구 공원을 향하여 달렸다. 그 길로 나는 조상섭의 상점에 들려 편지 한 장을 써서 점원 김영린을 주어 급히 안창호 선생에게 전하라 하였다. 그 내용은 '오전 10시경부터 댁에 계시지 마시오. 무슨 대사건이 있을 듯합니다.'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석오 선생께로 가서 지금까지 진행한 ..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하권) 7

백범일지 (하권) 김구선생 일대기 새로 얻은 동지 이덕주, 유진식은 왜 총독의 암살을 명하여 먼저 본국으로 보냈고 유상근, 최흥식은 왜의 관동군 사령관 본장번의 암살을 명하여 만주로 보내려고 할 즈음에, 윤봉길이 나를 찾아왔다. 윤 군은 동포 박진이가 경영하는, 말총으로 모자 기타 일용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다가 근래에는 홍구 소채장에서 소채 장수를 하던 사람이다. 윤봉길 군은 자기가 애초에 상해에 온 것이 무슨 큰 일을 하려 함이었고 소채를 지고 홍구 방면으로 돌아다닌 것도 무슨 기회를 기다렸던 것인데, 이제는 중일간의 전쟁도 끝이 났으니 아무리 보아도 죽을 자리를 구하기가 어렵다고 한탄한 뒤에, 내게 동경사건과 같은 계획이 있거든 자기를 써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려는..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하권) 6

백범일지 (하권) 김구선생 일대기 어느 날은 하오리에 게다를 신고 정부 문을 들어서다가 중국인 하인에게 쫓겨난 일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동녕 선생과 기타 국무원들에게 한인인지 일인인지 판단키 어려운 인물을 정부 문 내에 출입시킨다는 책망을 받았고, 그때마다 조사하는 일이 있어서 그런다고 변명하였으나 동지들은 매우 불쾌하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이럭저럭 이씨와 폭탄도 돈도 다 준비가 되었다. 폭탄 한 개는 왕웅을 시켜 상해 병공창에서, 한 개는 김현을 하남성 유치한테 보내어 얻어온 것이니 모두 수류탄이었다. 이 중에 한 개는 일본 천황에게 쓸 것이요, 한 개는 이씨 자살용이었다. 나는 거지 복색을 입고 돈을 몸에 지니고 거지 생활을 계속하니 아무도 내 품에 천여 원의 큰 돈이 든 줄을 아는 이가 없었다...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하권) 5

백범일지 (하권) 김구선생 일대기 엄항섭 군은 프랑스 공무국에서 받은 월급으로 석오(이동녕의 당호)나 나 같은 궁한 운동자를 먹여 살렸다. 그의 전실 임씨는 내가 그 집에 갔다가 나올 때면 대문 밖에 따라나와서 은전 한두 푼을 내 손에 쥐어 주며, "애기 사탕이나 사주셔요." 하였다. 아기라 함은 내 둘째 아들 신을 가리킨 것이었다. 그는 초산에 딸 하나를 낳고 가엾이 세상을 떠나서 노가만 공동묘지에 묻혔다. 나는 그 무덤을 볼 때마다 만일 엄군에게 그러할 힘이 아니 생기면 나라도 묘비 하나는 해 세우리라 하였으나 숨어서 상해를 떠나는 몸이라, 그것을 못한 것이 유감이다. 오늘날도 노가만 공동묘지 임씨의 무덤이 눈에 암암하다. 그는 그 남편이 존경하는 늙은이라 하여 내게 그렇게 끔찍하게 해주었다. 나는 ..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하권) 4

백범일지 (하권) 김구선생 일대기 임시정부에서는 한형권의 러시아에 대한 대표권을 파면하고 안공근을 대신 보내었으나 별효과가 없어서 임시정부와 러시아와의 외교관계는 이내 끊어지고 말았다. 상해에 남아 있는 공산당원들은 국민대표회가 실패한 뒤에도 좌우 통일이라는 미명으로 민족운동자들을 달래어 지금까지 하여 오던 민족적 독립운동을 공산주의 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자고 떠들었다. 재중국 청년동맹, 주중국 청년동맹이라는 두 파 공산당의 별동대로 상해에 있는 우리 청년들은 쟁탈하면서 같은 소리를 하였다. 민족주의자가 통일하여서 공산혁명운동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또 한 희극이 생겼다. '식민지에서는 사회운동보다 민족독립운동을 먼저 하여라.'하는 레닌의 새로운 지령이었다. 이에 어제까지 민족독립운동을 비난하고 조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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