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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60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31

백범일지 김구선생 일대기 그러나 도변이 놈의 엑스광선은 내가 17년 전 인천 감옥의 김창수인 줄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연전 해주 검사국에서 검사가 보고 있던 '김구'라는 책에도 내가 치하포에서 토전양량을 죽인 것이나 인천 감옥에서 사형정지를 받고 탈옥 도주한 것은 적혀 있지 아니하였던 것과 같이 이번 사건에 내게 관한 기록에도 그것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내 일을 일러바치는 한인 형사와 정탐들도 그 일만은 빼고 내 보고를 하는 모양이니 그들이 비록 왜의 수족이 되어서 창귀 노릇을 한다 하더라도 역시 마음의 한구석에는 한인 혼이 남아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도변이 놈이 나의 경력을 묻는데 대하여서 나는 어려서는 농사를 하다가 근년에 종교와 교육사업을 하고 있거니와 모든 일을 내놓고 하고 ..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30

백범일지 김구선생 일대기 이번 통에 잡혀 온 사람은 황해도에서 안명근을 비롯하여 신천에서 이원식, 박만준, 신백서, 이학구,유원봉, 유문형, 이승조, 박제윤, 민영룡, 신효범, 안악에서 김홍량, 김용제, 양성진, 김구, 박도병, 이상진, 장명선, 한필호, 박형병, 고봉수, 한정교, 최익형, 고정화, 도인권, 이태주, 장응선, 원행섭, 김용진등이요, 장연에서 장의택, 장원용, 최상륜, 은률에서 김용원, 송화에서 오덕겸, 장홍범, 권태선, 이종록, 김익룡, 장연에서 김재형, 해주에서 이승준, 이재림, 김영택, 봉산에서 이승길, 이효건 그리고 배천에서 김병옥, 연안에서 편강렬등이었고, 평안남도에서는 안태국, 옥관빈, 평안북도에서는 이승훈, 유동열, 김용규의 형제가 붙들리고, 경성에서는 양기탁, 김도희, 강원도..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29

백범일지 김구선생 일대기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장차 서울 북달은재에서 이완용을 단도로 찌른 의사 이재명이 될 사람이라고 생각지 못하고 한 허열에 뜬 청년으로만 보았다. 노백린도 나와 같이 생각한 모양이어서 그의 손을 잡고 큰 일을 하려는 사람이 큰 일을 할 무기를 가지고 아내를 위협하고 동네를 소란케 하는 것은 아직 수양이 부족한 것이라고 간곡히 말하고 그 단총을 자기에서 맡겨 두고 마음을 더 수양하고 동지도 더 얻어 가지고 일을 단행하라고 권하였더니, 이재명은 총과 칼을 노백린에게 주기는 주면서도 선선하게 주는 빛은 없었다. 노백린이 사리원역에서 차를 타고 막 떠나려 할 때에 문득 이재명이 그곳에 나타나서 노에게 그 맡긴 물건을 도로 달라고 하였으나 노는 "서울 와서 찾으시오." 하고 떠나버렸다. ..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28

백범일지 김구선생 일대기 나는 배천을 떠나 재령 양원학교에서 유림을 소집하여 교육의 필요와 계획을 말하고 장연 군수의 청으로 읍내와 각 면을 순회하고, 송화 군수 성낙영의 간청으로 수년 만에 송화읍을 찾았다. 이곳은 해서의 의병을 토벌하던 요해지이므로 읍내에는 왜의 수비대, 헌병대, 경찰서, 우편국 등의 기관이 있어서 관사를 전부 그런 것에 점령이 되고 정작 군수는 사가를 빌어서 사무를 보고 있었다. 나는 분한 마음에 머리카락이 가락가락 일어날 지경이었다. 환등회를 여니 남녀 청중이 무려 수천 명이니, 군수 성낙영, 세무서장 구자록을 위시하여 각 관청의 관리며 왜의 장교와 경관들도 많이 출석하였다. 나는 대황제 폐하의 어진영을 뫼셔오라 하여 강단 정면에 봉안하고 일동 기립 국궁을 명하고 왜의 장교들까지 ..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27

백범일지 김구선생 일대기 당초 상동회의에서는 몇 번이고 상소를 반복하려 하였으나 으례 사형에 처할 줄 알았던 최재학 이하는 흐지부지 효유방송이나 할 모양이어서 큰 문제도 되지 않는 것 같았고, 또 정세를 돌아보니 상소 같은 것으로 무슨 효과가 생길 것 같지도 아니하여서 우리 동지들은 방침을 고쳐서 각각 전국에 흩어져 교육사업에 힘을 쓰기로 하였다. 지식이 멸이하고 애국심이 박약한 이 국민으로 하여금 나라가 곧 제 집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전에는 아무 것으로도 나라를 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황해도로 내려와서 문화 초리면 종산 서명의숙의 교원이 되었다가 이듬해 김용제 등 지기의 초청으로 안악으로 이사하여 그곳 양산학교의 교원이 되었다. 종산에서 안악으로 떠나온 것이 기유년 정월..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26

백범일지 김구선생 일대기 정창극은 실로 진실한 아전이었다. 당시 상하를 물론하고 관리라는 관리는 모두 나라와 백성의 것을 도적하는 탐관으로 되었건마는 정창극만은 일 푼도 받을 것 이외의 것을 받음이 없었다. 이러하기 때문에 군수도 감히 탐학을 못하였다. 얼마 후에 농상공부로부터 나를 종상위원으로 임명한다는 사령서가 왔다. 이것은 큰 벼슬이어서 관속들이며 천민들은 내가 지나가는 앞에서는 담뱃대를 감추고 허리를 굽히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태 동안이나 살던 사직동 집을 떠나지 아니하면 안되게 되었다. 그것은 오 진사와 내 종형이 죽은 때문이었다. 오 진사는 고기잡이 배를 부리기 이태만에 가산을 패하고 세상을 떠나니, 나는 사직동 가대를 그의 유족에게 돌리지 아니할 수 없었다. 또 종형은 본래는 낫 놓고..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25

백범일지 김구선생 일대기 나는 집상 중에 아무 데도 출입을 아니하고 준영 계부의 농사를 도와 드렸더니 계부는 매우 나를 기특하게 여기시는 모양이어서 당신이 돈 2백 냥을 내어서 이웃 동네 어떤 상놈의 딸과 혼인을 하라고 내게 명령하셨다. 아버지도 없는 조카를 당신의 힘으로 장가들이는 것은 당연한 의무요, 또 큰 영광으로 아시는 준영 계부는 내가 돈을 쓰고 하는 혼인이면 정승의 딸이라도 나는 아니한다고 거절하는 것을 보시고 대로 하여 낫을 들고 내게 달려 드시는 것을, 어머니께서 가로 막아서 나를 피하게 하여 주셨다. 임인년 정월에 장연 먼 촌 일가 댁에 세배를 갔더니, 내게 할머니 되는 어른이 그 친정 당질녀로 17세 되는 처녀가 있으니 장가들 마음이 없는가고 물었다. 나는 세 가지 조건에만 맞으면 혼인..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24

백범일지 김구선생 일대기 유인무는 그동안 나를 이리저리로 돌린 연유를 설명하였다. 이천경이나 이시발이나 성태영이나 유인무와는 다 동지여서 새로운 인물을 얻으면 내가 당한 모양으로 이 집에서 한 달, 저 집에서 얼마, 이 모양으로 동지들의 집으로 돌려서 그 인물을 관찰하고 그 결과를 종합하여 그 인물이 벼슬하기에 합당하면 벼슬을 시키고, 장사나 농사에 합당하면 그것을 시키도록 약속이 되어 있던 것이었다. 나는 이러한 시험의 결과로 아직 학식이 천박하니 공부를 더 시키도록 하고 또 상놈인 내 문벌을 높이기 위하여 내 부모에게 연산 이천경의 가대를 주어 거기 사시게 하고 인근 몇 양반과 결탁하여 우리 집을 양반 축에 넣자는 것이었다. 유인무는 이런 설명을 하고, "아직 우리 나라에서는 문벌이 양반이 아니고는 ..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23

백범일지 김구선생 일대기 이튿날 조반 후에 어떤 키가 후리후리하고 얼굴이 숨숨 얽은, 50세나 되었음직한 사람이 서슴지 않고 사랑으로 들어오더니 내 앞에서 글을 배우고 있는 윤태를 보고, "그 새에 퍽 컸구나. 안에 들어가서 작은 아버지 나오시래라 내가 왔다고." 하는 양이 이춘백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이윽고 진경이가 윤태를 앞세우고 나와서 그 손님에게 인사를 한다. "백씨 소식 못 들었지?" "아직 아무 소식 없습니다." "허어, 걱정이로군. 유인무의 편지 보았지?" "네, 어제 받았습니다." 주객간에 이런 문답이 있고는 진경이가 장지를 닫아서 내가 앉아 있는 방을 막고 둘이서만 이야기를 했다. 나는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는 아니 듣고 두 사람의 말에만 귀를 기울인다. 그들의 문답은 이러하였다. "유..

자서전) 백범일지 - 김구선생 일대기 21

백범일지 김구선생 일대기 하루는 물을 길어오다가 물통 하나를 깨뜨린 죄로 스님한테 눈알이 빠지도록 야단을 맞았다. 어떻게 심하게 스님이 나를 나무라셨는지 보경당 노승님께서 한탄을 하셨다. "전자에도 남들이 다 괜찮다는 상좌를 들여 주었건마는 저렇게 못 견디게 굴어서 다 내어 쫓더니 이제 또 저렇게 하니 원종인들 오래 붙어 있을 수가 있나. 잘 가르치면 제 앞쓸이는 할 만하건마는."하고 하은당을 책망하셨다. 이것을 보니 나는 적이 위로가 되었다. 나는 낮에는 일을 하고 밤이면 다른 사미들과 같이 예불하는 법이며 "천수경", "심경" 같은 것을 외고 또 수계사이신 용담 스님께 "보각서장"을 배웠다. 용담은 다시 마곡에서 불학만이 아니라 유가의 학문도 잘 아시기로 유명한 이었다. 학식만이 아니라, 위인이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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