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해외

영화 이야기 - HOLLY WOOD COLUMNS 1- 1941-1945

올드코난 2010. 6. 25.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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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HOLLY WOOD COLUMNS

(출처: 내일)


1탄 (1941~1945)
 2차 세계대전


2차 세계 대전 후, 대전 중 가장 처참했던 동부 전선 사투에서 독일 병사가 쓴 네 통의

편지가 발견되었다. 그 중 한 통에 이런 글이 씌어 있었다.

  '오른손 손가락 세 개가 동상으로 썩어 할 수 있는 일이란 방아쇠를 당기는 일 뿐 -----.

페허가 된 거리에 그랜드 피아노가 한 대 있었어요. 콜트 한케가 베토벤의 소나타를 연주하자 100여 명의 병사가 먼 포성 속에서 웅크리고 앉아 귀기울였습니다. 아무도 그의 연주를 중단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말살하는 집단적 살인 내지 광신적 행위다. 그러나 그러한 극단적 상황 속에서도 인간의 본성은 '예술'에의 강한 집착과 위안을 그리는 것이다.

  무성 영화 시대 이후 대중 예술의 꽃으로 자리매김한 영화, 전쟁의 포화 속에서 그 영화예술은 어떻게 명맥을 유지했고, 영화인들은 그 예술혼을 어떤 방법으로 불살랐을까. 또한 에스파냐의 내란을 시작으로 극동이 침략 당하고 이어 나치의 마수로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노르웨이, 프랑스 등이 암흑 속에 떨고 있을 때 영화 산업은 어떤 활로를 모색했을까.

 

  할리우드의 끔도 전운의 먹구름 속에  2차 세계 대전은 이미 거대 산업이 되어 버린 할리우드의 영화 산업에 '참전'이라는 냉엄한 현실을 맞닥뜨리게 했다. 영화 배우는 제작 중이던 영화도 내팽개치고 참전 (엄밀히 전쟁을 직접 치른 건 아니다)하여 병사들을 위한 위문쇼나 왜 미국은 참전했고 이겨야만 하는가를 설명하는 영화 시리즈에 출연해야 했다. 할리우드 최고의 영화 제작인은 징병 당해 적국의 영화나 뉴스 영화를 모으는 작업을 해 결국 31년 만주 사변으로부터 진주만 공격까지의 '역사'를 꿰뚫은

<우리들은 왜 싸우는가>란 시리즈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당시 할리우드에서는 도큐멘터리나 역사 영화, 논픽션을 만들어 본 제작인이 하나도 없었으나 그들은 정부로부터 허락되어진 여건을 이유로 도큐멘터리와 픽션 사이를 넘나들며 그들의 창작욕을 달래야만 했다. 또한, 국내 시장 외에는 유럽 각지의 시장이 전체주의에 잠식된 상황 내지는 위험한 지경이었으므로 달리 작품을 만들어도 팔 방도가 없었다.

  전쟁이 필요로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이를 수행하는 병사다. 정해진 작전에 따라 세를 확장하고 나아가 몸을 내던져 사투해야 할 병사인 것이다. 아무리 용기 백배 참전했던 젊은이일지라도 그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애국심보다는 두고 온 고향의 하늘과 땅내음이 더욱 코끝을 간지럽힐 것이다. 따라서 전쟁 중 미국이 가장 필요로 한건(할리우드로부터) 바로 활력소다. 그 활력소는 대중 예술로 인하여 가장 쉽게 얻을 수 있다.

  프랭크 시내트라나 반 존슨은 전쟁 이전에는 물론, 전시에 필요한 2대 배우였다.

그리고 그리아 거슨 역시 제2차 대전하에서 가장 필요했던 여배우였다. 그녀는 영국 혼(미국인이 생각하는)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더욱 큰 배우로, 우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연출도 필요했다. 예를 들면 글래머인 아가씨들을 고용해 기차가 도착, 프랭크 시내트라가 내리면 일제히 사인첩을 들고 환호하며 그에게 달려들게 하고, 시내트라는 경찰의 호위 속에서 사라지는 것과 같은 완벽한 신을 렌즈에 담아 병사들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이로써 위문 공연의 효과는 몇 배 커질 수밖에 없다.

  거슨은 전쟁으로 빅스타의 자리에 오르게 됐는데, 당시 그녀가 출연한 작품을 보면 연기력은 다소 처지지만 화려하고 멋이 있고 달콤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특히 그녀의 핀업은 가장 관능적이었다. 마치 솜사탕 같은 관능미를 갖고 있었으므로 병사들에게 그 인기가 대단했다.

 

  전설과 신화, 인물의 급부상과 다툼

  감독 겸 각본가인 필립 던은 누군가 연습용 영화 나레이터를 할 배우를 찾고 있을 때 군에 있는 사람을 쓸 것을 권유했다고 훗날 술회했다. 그 이유는 개런티를 지불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단지 징용하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그때 소개받은 인물이 바로 그 유명한 로널드 레이건이란 사람. 당시 레이건은 라디오 아나운서를 맡고 있었으므로 이름은 꽤 알려져 있던 편이었다고. 대다수가 말하는 그 당시 그의 첫인상은 꽤나 비즈니스라이크(사무적)한 군인 냄새가 난다고 한다. 공군 비행사용 부츠에 공군 모자, 그리고 완벽한 나레이션----.

  미국 역대 대통령 중 이미지 메이킹에 가장 뛰어났던 2선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2차 대전 당시 이렇게 배우로서의 활동을 시작해 점차적으로 그 주가를 높여갔다.

  전쟁이 끝난 후 할리우드에서의 초국제적 살롱은 산타모니카 캐니언에 있는 사르카 비엘텔의 집에서 열렸다. 비엘텔은 감독 겸 각본가로 그레타 가르보 주연의 <안나 카레리나>등의 각본을 썼으며, 그녀의 아들(소설가인 피터 비엘텔)은 데보라 카의 남편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는 독일에서 도망쳐 온 유럽파 인텔리가 대운집했다. 비엘텔은 가르보와 친한 친구였고 그녀의 남편은 이미 감독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던 터였다. 그들은 망명자들을 잘 알고 있었다.

노벨상에 빛나는 토마스 만, 영화 감독 장 르노와르, 루비치 폰 슈트로하임, 윌리엄 와일러, 빌리 와일더 등 그 무렵 그들은 모두 이곳에 출입하고 있었다.

  그 집은 마치 오픈 하우스 같았다고 한다. 불시에 방문해 보면, 베르토르트 브레히트(독일의 대표적 극작가)가 무언가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있고, 그레타 가르보는 거실 소파에 누워 있고, 그 유명한 피아니스트 아서 루빈스타인은 열심히 피아노를 두드리고 있고, 영국의 저명 작가 크리스토퍼 이셔워드는 2층 거실을 거닐고 있었다-----.

  언제, 누구라도 와서 잘 수 있는 그 장소는 바로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크나큰 전화의 상처를 끌어안고 모여든 문화 예술인들의 정신적 안식처요, 전후 문화계를 이끌어갈 예술인들의 창작욕 재충전을 위한 미의 산실이었던 셈이다.

  이는 전쟁의 혼란 속에서 할리우드가 거대한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국가의 필요에 의해서만 좌우되며 배우들의 활동 또한 극히 제한되어 있을 때 이와는 반대로 전쟁에 회의적이었던 예술인들은 창작욕을 가다듬고 있던 셈이다. 마치 갈팡질팡 폐허와도 같은 할리우드의 현실을 박차고 뛰어나와 들판을 걸으며 때를 기다리는 시인과도 같이 예인들은 예술꽃의 만개와 새시대를 희망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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