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해외

영화 이야기 - HOLLY WOOD COLUMNS 2- 1946-1955

올드코난 2010. 6. 25.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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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HOLLY WOOD COLUMNS

(출처: 내일)


2탄 (1946~1922)
UNFRIENDLY WITNESSES

2차 세계 대전으로 뜻밖의 스타들을 키워냄과 동시에 영화팬들과 스타가 직접 만나는

(위문 공연 등)을 자주 마련, 전후 할리우드 영화계 발전에 한몫 기대를 걸었던 제작진들은 전후 김빠진 모습이 되고 말았다.

  할리우드 역시 전쟁의 승리를 위해 적잖은 공헌을 했으며, 평화의 회복과 함께 한층 번영된 영화 산업을 예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 정반대였다.

  일상으로 복귀한 생활인들 - 그들 중 결혼 적령기에 다다른 사람은 서둘러 가정을 꾸미고 아이 낳는 재미에 빠져들었고 대학생들은 불철주야 밀린 공부에다 학교 생활의 활기참에 열성으로 매달린 것이다. 그들에겐 영화 보는 데 시간을 낼 만한 여유나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1947년 이후 영화 관객은 약 10년간 전쟁 전에 비해 거의 반 정도로 감소해 버려 할리우드로서는 악몽과 같은 상황이 전개되었다.

  영화 산업의 침체만이 영화계를 뒤흔든 건 아니다. 아니 이보다 오히려 더 큰 격랑이 마치 시련과도 같이 영화 예술인들을 휩쓸고 갔다.

  2차 대전 후의 세계는 미국과 소련으로 대별되는 양극 체제, 즉 냉전 체제 속에 동서

양진영으로 나뉘어 으르렁거리게 되었다. 따라서 '냉전' '반공'분위기가 사회 전역에 팽배해 있었다.

  그 무렵부터 시작된  미국 하원 비미 활동 위원회의 영화인에  대한 조사, 탐문이 바로 그것이.

이것이 1947년의 일 이다.

  비미 활동 위원회의 공청회에서는 할리우드의 많은 인물에게 불가피한 증언을 강요, 공산당 멤버가 할리우드의 각본가 조합을 지배하고 있고 영화 내용을 코뮤니스트의 선전에 맞춰 변화시키고 있다고 증명하려 했다.

  그 결과 샘 위드, 로버트 테일러, 아돌프 만주 등이 위원회가 흡족해할 만한 할리우드에서의 공산주의 영향을 보고하였고, 잇달아 '할리우드 10'이라 불리는 9명의 각본가와 1명의 감독이 의심스러운 인물로서 위원회의 표적이 되었다. '할리우드10'의 멤버들은 당연히 표현과 언론의 자유를 주장하며 대항했으나 결국은 형무소로 가게 되었다.

  공청회가 끝난 후 영화 회사의 사주들은 성명을 발표, '할리우드10'의 해고를 명확히 밝히고 이후 영화에서의 공산주의의 영향을 제거하는 데 노력하겠노라고 다짐하였다. 결국 이는 할리우드의 비미 활동 위원회에 대한 순응이었으며 업계의 이러한 반응은 더욱 확산되었고, 소위 '블랙 리스트'가 비밀리에 작성되어 나돌기 시작했다. 한 마디로 순응을 넘어선 과잉 충성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업계의 자발적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비미 활동 위원회는 첫 공청회 이후

할리우드에 관한 두 번째의 대규모 조사를 1951년 실시하였다. 2회 째의 공청회는 단속적으로 1954년까지 개최돼 강요를 넘어선 영화인들끼리의 밀고 성격을 띠게 되었다.

  적색 분자 색출의 태풍 속에서 많은 영화인들이 일할 기회를 잃거나 혹은 배신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무대를 저버려야만 했다. 두 번째의 공청회 결과 324명이 색출되었다  이러한 비미 활동 위원회의 공격은 할리우드가 만드는 작품의 경향에 당연히 영향을 미치기시작했다. 전쟁 직후, 사회의 무정이나 문제를 주제로 한 작품이 제작돼 성공했지만 비미 활동위원회의 공격 이후 이러한 작품을 만들려는 용기를 지닌 프로듀서들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적색 분자 색출의 분위기에 영합한 반공을 주제로 한 영화들이 속속 제작되어 보수적 이미지를 띤 사람들이 할리우드에서 득세하게 되었다. 제한된 주제로 제작된 영화는 보수화를 띨 수밖에 없었고 이는 결국 영화사에 있어선 암흑기, 침체기를 형성할 따름이었다.

 

  거꾸로 흘러가는 할리우드

  비미 활동 위원회의 감시하에 할리우드. 그 즈음엔 소련 영화 한 편을 보러가는 것조차

용이하지 않았다. 음울한 베일에 가려진 어떤 음모가 튀어나오지 않을까, 혹 번호판을 가린 차를타더라고 FBI가 감시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전 영화인들을 옥죄었기 때문이다.

  당시 할리우드에 장관이 파견되어 이러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것은 아메리카의 외교정책이며 반공산주의는 냉전의 일환이다. 하원의 특별 위원회(비미 활동 위원회)는 아메리카합중국에서 공산주의를 멸망시키기 위해 큰일을 하고 있다'는 요지의 메시지였다. 이것이 바로정부, 즉 워싱턴의 입장이었다.

  따라서 험프리 보카트나 로렌 바콜등이 일어나 워싱턴으로 쫓아갔으나 모든 것이 허사일수 밖에 없었다.

  극우주의자들이 득세한 정부, 또한 그에 따라 국정을 지지하는 논조의 기사만을 싣는 언론, 그리고 과잉 충성하는 할리우드계 인사들-----.

  필립 던은 해고당했고, 링 래드너 주니어는 계속 집필을 하기 위해 가명을 쓰고 떠돌았으며, '할리우드10'의 한 사람인 돌턴 트램보는 가명으로 <로마의 휴일>이란 명작을 써야만 했다.

뜻있는 영화인들은 바로 이때 영화 산업이 붕괴해 버렸다고 한탄할 정도였다. '할리우드10'제론할 필요도 없고 조금이라도 체제에 불만을 품거나 사회 개혁 의식이 강한 사람은 그 어떤 메이저에서도 받아주지 않았다. '공산주의자를 고용할 수 없다'는 그 이유 하나로 -----.

  모두를 서로 의심하고 그 의심은 점점 깊어지는 가운데 동료 의식은 점차 희박해졌다. 서로 끈끈한 정으로 뭉쳐져 있던 할리우드 사람들에겐 정말 견디기 힘든 시련기요 암흑기였다.

  1951년 하원의 비미 활동 위원회 블랙 리스트에 올라 있었던 각본가이자 방송 작가인 하워드 코치. 그의 이야기는 주목할 만하다.

  "스튜디오에서는 상당 기간 나를 보호해 주었다. 결코 개인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내 영화가 돈과 직결됐기 때문이다. 나는 뉴딜 정책  시대, 여러 단체에 소속되거나 혹은 기부를 했다,. 차별에 반대하는 스페인 난민 위원회에도 가입하여 당시 사람들의 신뢰를 얻었는데 이것이 할리우드에서도 인기를 얻게 된 하나의 큰 이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루즈벨트가 죽고 냉전이 시작됐을 때 나는 여러 단체에 소속됐었다는 이유로 의심을 받아야 하는 배반을 당했다. 냉전이라는 것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역방향의 정치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그 정치 바람이 할리우드에 불어닥친 것은, 당시 그곳은 참신한 사상을 갖춘 사람들이 대거 모여 시대의 이단을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치가들도 할리우드를 공격하면 그 무엇보다도 효과적인 퍼블리시티를 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할리우드는 희생양으로 바쳐진 정책 홍보의 제물이었다.

  그리고 인간의 역사가 그러하듯 그러한 비미 활동 위원회를 틈타 '달갑지 않은' 사람을

제거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영화인들 중에는 영화 배우 길드 회장이었던 로널드 레이건이 이 위원회에 적극적으로 협력했고, 하원 의원 중에는 후에 대통령이 된 리처드 A, 닉슨 등이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어찌보면 '할리우드10'을 비롯한 수감자들은 정책 홍보뿐 아니라 개인적인 감정의 발로로도 구속되었다. 그 까닭은  '할리우드10'이 결성되기 이전부터 위원회 중심 멤버들그들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며 공공연히 주목했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의 영화계는 관객의 감소와 정부의 탄압이라는 이중고 속에서도 여전히 건재하였다.

그 힘은 몇몇 안 되는 영화인들의 힘겨운 싸움과 영화에 대한 열정이었을 것이다. 워싱턴으로 뛰어든 보가트나 손에 총을 들었던 존 웨인 모두 할리우드를 사랑하였고 영화의 발전이 저해되는 외적 요소를 안타까워 했다. 거꾸로 흘러가는 할리우드의 흐름을 막지는 못했을망정 -----.

그러나 예인들은 새로운 미래와 비전을 감지라도 하듯 어려운 50년대를 묵묵히 지켜냈다. 그것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평범한 비미 활동 위원회에 대한 반항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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