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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 HOLLY WOOD COLUMNS 4 - 1966~1977

올드코난 2010. 6. 25.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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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HOLLY WOOD COLUMNS

(출처: 내일)


4탄 (1966~1977)

YOU'RE OUT OF IT, PAL


  최고 재판소의 판정으로 스튜디오 시스템이 무너지자 영화관에 대한 직배권을 박탈당한 스튜디오들은 과연 어떻게 됐을까. 전속 배우도, 화려한 영화도 잃은 채 신세대 신주자들이 뛰는 것을 정신없이 바라보며 나름대로 안간힘을 썼지만 그 커다란 덩치를 추스리기에는 영화산업계의 불황과 메리트가 없었다.

  '5'의 계열인 RKO의 도산에 이은 잇달은 쇼크들은 어쩌면 대전 후의 미국 경제계 동향과 운동의 한 일면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의 예외 없이 할리우드의 각 사가 흡수와 병합의 주체 아닌 객체로서 전락해 버리자 그 반응은 복잡 다단하였다.

  62년 유니버살 음악 산업체 MCA에 매수되었다(그 이후 30년이 지난 MCA는 일본의

마쓰시다에 매수됨). 66년 파라마운트가 자동차 범퍼 제조로 사업을 시작, 업무를 확대한 걸프 & 웨스턴 사에 흡수된 데 이어 이듬해 유나이티드 아티스트가 보험과 금융업을 하는 트랜스 아메리카의 자회사가 되었다. 그리고 69년에는 워너가 차량 대여와 주차장 관리로 시작해 돈을 벌어들인 키니 내쇼날 서비스에 팔렸고, 그 자랑스럽던 MCA도 라스베이거스의 부동산 개발업자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남아 있던 콜롬비아와 20세기 폭스 사 역시 70년대 초반 이와 비슷한 경험을 겪게 된다.

  위와 같은 일련의 흐름에 의해 할리우드에서는 각 스튜디오의 역사나 전통을 전혀 알지 못하고 영화 그 자체에도 그다지 흥미가 없는 듯한 약삭빠른 업자에 침략당했다는 것, 그에 대해 한탄과 불만이 끊이지 않았다. 각 회사의 창시자들에게 있어선 이윤이 남아야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것이므로 역사, 전통 또는 영화에의 애정 같은 감상적인 일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지도 모른다.

  사실 객관적으로 볼 때도 60년대의 할리우드는 흡수, 병합과 같은 형태가 아니더라도 수익성있는 기타 업종에 손을 대야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영화 관객의 감소 경향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삶의 다른 방편이 필요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공개된 작품이 무조건 최고의 영화관에서 개봉되는 것도, 또 균등한 수익이 보장된다고 기대하기도 곤란하고 오히려 작품에 따라서는 제작비조차 건지기 힘들 정도로 흥행에 참패할 경우도 종종 있는 것, 따라서 영화 제작에 관한 리스크를 분산시키는 것이 급선무였을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69년에 개봉된 <이지 라이더>의 제작 시스템이 구세주가 될 것인가 기대도 모았지만 결국 이것은 특별한 예로 그치고 말았다.

 

  카운터 컬처(Counter Culture)의 전환

  <비버리 힐즈 캅> <탑건>등을 연속 내보내 히트시킨 프로듀서 돈 심프슨은 할리우드를'소돔과 고모라'라 표현한다. 60년대 후반 워너 사 사장 아내가 만든 한 작품의 성공을 위해 기발한 아이디어를 짜냈다. 바로 시사회 때의 마리화나와 붉은 포도주를 무료로 입장객 전원에게 제공한 것이다. 모두들 술과 마리화나에 취해 영화평은 그야말로 최고로 나올 수밖에 없었고 샌프란시스코에서 개봉된 그 영화는 대히트를 거두었다. 이로써 그는 할리우드의 천재로 인식된 할리우드 최초의 히피가 되었다.

  1960년 일어난 대항, 반체제 문화인 카운터 컬처. 이는 지식층을 중심으로 번져간 미국의 히피라든가 파시스트 등으로 두각을 나타냈는데, 전쟁에의 후유증 외에 학생 운동의 영향에 의한것이다. 할리우드계의 신세대 바람에도 불구하고 더딘 시간의 흐름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젊은이들의 욕구는 <이지 라이더>와 같은 작품이 흥행 폭발로 이미 입증이 되었다. 확실히60년대의 할리우드는 내일에의 핑크빛 희망이나 기대보다는 불안이 앞섰던 시기였다. 이러한 심리적불안이 예기치 못한 스타일의 영화 감독들을 맞아들였다. 그들은 기존의 존 웨인 스타일의 '그저 그런 서부극' 타입에서 탈피하여 사회와 개인간의 문제, 체제 등에 대해서도 과감히 대시하였다. 그들은 학생 운동을 겪은, 대학에서 영화 제작을 공부한 엘리트였는데, 그들이 차세대 할리우드의 주역이 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들은 카운터 컬처에 공감할 수밖에 없는 세대였고 그것이 곧 자신들이요, 자신들의

이상이었다.

 

  두개의 축-'사회적 관심과 오락'

  카운터 컬처 시대를 맞은 할리우드가의 영화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하나는 사회성이 짙은 영화이고 다른 하나는 오락 영화이다. 영화계의 이러한 흐름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는지도 모른다. 체제에의 반항이 허무주의에 빠진 히피나 학생 운동 때 과격한 구호를 외치던 파시스트로 나타난 것처럼 체제에 대해 적극적이거나 오히려 이를 외면, 즉흥적이고 말초적인 반응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 시기를 대표하던 프란시스 F. 코폴라 감독은 로저 코망 아래에서 영화를 배운 인재 중 한명이었는데 코망은 B급 연화의 제왕으로 군림하던 프로듀서 겸 감독이었다. 코폴라는 코망에게서 적절한(?) 누드신의 삽입과 프로다운 기질, 체제에의 거부, 무관심, 오락성 등을 익혔던 것이다.

  코폴라 외에 미국을 대표하는 영화 감독을 꼽는다면 바로 마틴 스코세시다. 스코세시는 코폴라보다 예술적 차원에서 한수 높은 감독. 그는 진정한 영화는 외국 영화(프랑스나 이탈리아의 뉴웨이브)라고 생각했던 인물이다. 그는  그 당시 주류를 이룬 영화가 서부극의 파편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며, 위대한 예술 작품에 대한 욕망이 끓어오르던 아티스트 감독이었다.

그가 영향받은 인물은 앤드류 새리스란 미국의 유명한 영화 평론가. 그는 반동주의적 파시즘에심취, 사실을 은폐하지 않는 솔직한 감정과 논조로 글을 써내려 간 휴머니스트였다  사회적 관심과 오락성 짙은 영화의 붐을 타던 할리우드의 큰 조류 가운데서 이 당시 특기할 만한 것은 시대의 급속한 수레바퀴 속에서 나타난 짙은 우주에 대한 관심이다  <이지 라이더> <택시 드라이버>등 적나라한 사회상 고발작이나 <퍼포먼스> 같은 말초적 오락물을 뛰어넘어,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 관객들은 또 다른 차원의 세계를 염원하였던 것이다.

귀재 스티븐 스필버그와 같은 감독의 출현은 관객의 색다른 기호에 맞춘 당연한 귀결인지모른다. 점차 우주로 향해 치솟는 지구촌 주민들에게는 미니추어 속의 우주가 바로 미래에의 꿈 그 자체일 것이다.

  우리 나라 역시 60년대의 전화 복구에 이어 70년대는 고도 성장을 위한 급변의 시대였다. 할리우드도 격변과 시련, 과도기를 거치면서 나름대로 빠른 속도로 사회, 과학 문명의 발전과 더불어 변화, 관객의 발길을 극장으로 돌리려는 양적 성장이 끝이 없던 시기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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